필룸 10. <우리의 20세기>, 진정한 사랑과 자유에 대하여. '나'를 '자유하고', '사랑하기'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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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room.10 (film)


<우리의 20세기>,진정한 사랑과 자유에 대하여. '나'를 '자유하고', '사랑하기'

*본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 <우리의 20세기> 시사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격변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까? - ‘나’대로 살기


이 영화의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무엇일까.

필자에겐 아무래도 처음 등장한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마트에 주차된 도로시아(아네트 베닝)의 포드 자동차 한 대가 불타버린다. 인류가 산업혁명을 거치고 얻게 된 문명의 이기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 자동차다. 그런데 이 작품은 시작부터 그 문명의 이기를 불살라버린다.

자동차가 처음 보급될 무렵에 이것은 혁신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러 더 이상 그것은 혁신이 아니게 된다. 도로시아는 자동차가 ‘혁신적으로 보일 무렵’에 태어나, 온 동네에 마차대신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현재’에 이르는 세월을 보냈다. 아마도 도로시아가 그동안 가져온 사상이나 생각도 그와 같은 처지에 직면해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혁신적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보편적으로 퍼져나간 것.

문명의 한 가운데서 불타버린 낡은 자동차!

이 뜬금없이 불탄 자동차는 이후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영화적 장치도 서사의 매개물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는 영화의 시작을 여는 열쇠 구멍 같은 장면인데, 대체 뭘 말하려는 걸까?

문명 속에서 어떤 낡은 가치들은 불타 없어질 수 있다.

그것이 이 영화가 처음 던지는 메시지다. 도로시아가 비록 과거에는 진취적인 여성이었을지 모르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것은 진취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진취는 벌써 이만치 낡아 고장 난 채 불타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명의 시간이란 그렇다. 잠깐 한눈팔고 있으면 강산이 변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떨까? 도로시아는 한바탕 삶의 소동을 겪고 나서 주기적으로 경비행기 티켓을 끊어주는 새 남편을 만나 경비행기를 타고 넓은 바다로 날아간다.

바다는 한없는 자유다. 그런데 그 자유를 더 자유롭게 날아간다. 도로시아가 과거에 항공업에 종사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신은 본연의 가치를 찾고 난 뒤에 비로소 자유를 만끽하게 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헌데 도로시아는 이때도 문명의 산물인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기 때문에, 문명 속에서도 자신이 가진 본연의 가치를 찾고자 한다면 결국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도 시사한다.

이 처음과 끝을 보여주는 두 신만으로도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복잡한 얼개들은 제법 해소가 된다. 문명 속에서 자라나는 격동의 산물들, 정치와 경제, 문화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빠르게 변하고 창조와 쇠퇴를 거듭한다. 더구나 20세기다. 마차를 끌고 총검을 휘두르던 시절에서 불과 수십 년 만에 탱크와 비행기가 날아가고 원자폭탄이 개발된 20세기다.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격변의 시기에 사람들의 사상도 급진적으로 진화했다. 수천 년을 같은 양식과 생각을 이어오던 기존 인류의 사고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10년마다 시대의 흐름이 변화하는 이 격변의 시절 속에 늙은이와 어린 아이가 공존하는 것이다.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타협하는 일이 가능해 보이는가? 불과 수십 년의 차이지만, 이 수십 년은 그 이전 인류 역사 수만 년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세대 차이를 보여준다. 인류가 진보에 시기에 들어서서 처음 겪는 급격한 세대의 격차 속에서, 20세기를 살아왔던 이들은 과연 어떻게 이 갈등을 해결했을까? 이것이 이 영화의 동력이 되면서 영화가 끝나도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을 메시지가 된다.

아무리 급변하는 문명일지라도, 각자의 ‘좋음’을 쫓아간다면 그 문명 안에서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의 ‘좋음’에 의한 행동, 나아가 타인의 ‘좋음’을 이해하는 행동은 변화무쌍한 문명의 복판에서 불타사라지는 것이 아닌, 자유를 주게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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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그들의 시대를 이해해보려는 도로시아. 그녀는 이 과정 속에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사진 : 다음 영화 <우리의 20세기> (2017) 스틸 컷


도로시아가 에비(그레타 거윅)가 찍어준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먼)의 사진을 보고 ‘나의 아들은 이런 사람들, 이런 음악을 좋아했다’고 독백하며 한 시대의 이미지들을 나열했던 것처럼, 각자의 ‘좋음’을 이해하는 순간 시대의 흐름 따위는 벽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이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나의 기준에 맞추는 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좋음’을 인정하고 나의 ‘좋음’을 인정하는 일에 더 몰두해야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도로시아와 윌리엄(빌리 크루덥)이 에비와 함께 펑크 클럽에 찾아갔다가 돌아와 젊은이들의 음악을 들어보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억지로 이해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인정해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돌을 던지다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가는 시대가 와도, 그런 문명이 닥쳐와도, 우리는 분명 자유롭게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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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결핍을 앓는 사람들이 '쉐어하우스'에 모인다. 어쩌면 우리는 한 시대라는 지붕을 잠깐 빌려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 다음 영화 <우리의 20세기> (2017) 스틸 컷


2. 시대가 아니어도 보이는 것들 - 진정한 사랑 갈망하기


20세기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한 인간일 뿐이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놓여도 크게 변하지 않을 감정들이 있다. 예컨대 행복, 사랑과 같은 것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어떤 결핍에 놓여있는데, 그 결핍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갈구하는데서 온다. 행복한 삶에 필요한 것이 뭐가 있을까? 많은 재산? 좋은 직업? 그러한 것들이 행복의 요소가 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진정한 사랑’만이 행복을 담보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가식 없는, 그야말로 상대의 불완전함마저도 좋을 수 있는 진정한 사랑. 그런 깊은 사랑에 빠진 이와 평생을 함께한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극중 인물들은 모두 그 진정한 사랑이 가져올 행복을 알고 있고, 그 행복을 얻고 싶어 한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에 빠지기 위해선 먼저 상대에게 ‘나’라는 존재가 온전히 좋아야한다. 상대의 ‘좋음’을 충족하는 일, 즉 말해서 ‘좋은 사람’이 되면 진정한 사랑에 빠질 확률은 높아진다. 하지만 극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결핍 때문에 상대의 '좋음'을 얻지 못할 상태에 놓여있다.

먼저 에비는 자궁경부암(비록 양성 판정이 나지만)의 여파로 아이를 낳기 힘들다는 진단을 받는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가족을 이룰 수는 없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에비에겐 행복한 가족이니, 일상이니 한 것은 시작부터 불능에 빠지게 된다.

윌리엄은 도공이 되는 꿈이 있었지만 현실의 벽 앞에 정비 기술을 배워 삶을 연명한다. 꿈과 현실의 괴리에서 그의 미래는 열정적이지도 않고 흐린 구름 떠가듯 불분명하다. 그가 자신이 진정 원하는 미래를 정할 수 없듯이, 그는 진정한 사랑을 정하지도 못한다. 늘 ‘여자를 가져보지만, 가지고 난 뒤 뭘 할지 모르겠더라’는 그의 의미심장한 대사가 그의 결핍을 드러내준다.

마지막으로 줄리는 어머니의 심리 치료 프로그램에 함께 하면서, ‘사람 분석’에 시달린다. 그래서 좋고 나쁨에 대한 기준이 명확해질수록 완전한 ‘좋음’을 발견하긴 어려워진다. 어떤 부분이 좋으면 반드시 어떤 부분이 나쁘다. 줄리의 입장에서 모든 남자는 그런 존재다. 그래서 어떤 남자와 사랑을 나누든 어차피 ‘적절한 남자’는 없으며, 진심에 이를 수는 없다고 여긴다.

이렇게 제각각의 결핍을 앓는 사람들은 이룰 수 없는 자신의 이상에 환멸을 느끼고 일탈에 빠지고 만다. 이때 이들이 수행하는 일탈의 방법도 결핍의 종류만큼 다양한데, 에비는 자신의 결핍을 예술과 펑크로 달래고, 줄리는 담배로, 윌리엄은 다양한 여자들과 만나는 것으로 달랜다. 그런데 유독 이 셋이 공통적으로 저지르는 일탈이 있는데, 그건 바로 ‘사랑 없는 섹스’다.

남녀의 관계 중에서 가장 밀접하고 궁극적인 지점을 향해가는 것이 육체적 결합이다. 그러나 이들, 결핍된 이들은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스스로를 불신하고 좌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섹스는 진정한 사랑을 이룩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아닌 그저 동물적인 유희에 불과해진다. 어차피 자신들에게 진정한 사랑은, 미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에비와 윌리엄이 곧장 관계를 가지지 않고 '스토리'를 만들어보는 우스꽝스런 장면에선 행여 이 과정에서 진심이 튀어나올까 기대하는 심리도 엿보인다. 하지만 역시나 그 기대는 거품처럼 금새 사라진다.

어떤 과정이 있었건, 가벼운 육체적 관계에서 진정성을 찾기란 불가능하니까. 이미 그 자신들 스스로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까. 진정성에 도달하지 못한 사랑은 작은 자극에도 쉽게 부서질 따름이다. 어딘가 ‘좋지 않음’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사랑은 쉬이 깨져버리듯이. 극중에서 줄리가 제이미에게 오르가즘에 대해 설명하면서 오르가즘에 이르지 못한 이유를 ‘사소한 것들’에서도 비롯된다고 한 것처럼.

그렇다면 왜 이들은 진정한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진정성에 이르지는 못하는 걸까?

그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단 이것은 제이미의 조언자를 자처한 두 사람과 주변의 윌리엄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이미의 어머니인 도로시아도 진정한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이미 겪은 실패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에 빠져있다. 그녀는 회사 직원들이 ‘레즈비언은 아닐까?’라고 의심할 지경으로 그녀 스스로의 사랑을 단념했다. 그리고 ‘엄마 외로움이나 신경 써’라는 제이미의 폭언에 주저앉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애써 감춰왔던 공포도 엿보인다.

결국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보다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그 진정한 사랑에 스스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자신의 결핍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결핍이 다가올 사랑에게 ‘좋음’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혼한 경험(도로시아), 불임(에비), 불확실한 미래(윌리엄), 성적인 타락(줄리) 등 제각각 가진 결핍의 반작용들은 이들이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가는데 망설임을 준다.

이 결핍 때문에,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니까.

그들은 스스로 이렇게 확신해버리고 만다. 그 결과는 행복과도 이어지지 않을 것이고, 막연한 자기 불신과 갈망이 반복되어 일탈의 크기만 커져간다. 망망대해에서 바닷물을 들이켠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결핍이 있다고 해서 진정한 사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상대의 ‘좋음’에 맞추는 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격변의 시대 속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나의 좋음과 상대의 좋음을 그저 인정해버리면 된다. 거꾸로 되짚으면 나의 좋음과 결핍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것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사랑은 결핍을 숨기고 억지로 ‘좋음’으로 뜯어고치는 일이 아니라, 결핍 또한 인정하고 정면으로 끌어안는 일이다.

제이미를 구심점으로 진정한 사랑을 얻는 법을 알려주던 이들은 오히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결핍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극의 마지막에서 제이미와 도로시아가 서로의 결핍을 정면으로 주고받았던 것처럼, 이들 다섯 인물들은 자신의 결핍을 끌어안기 시작한다. 윌리엄은 다시 도공의 꿈을 이뤄가기로 하고, 에비는 '생리'를 외치며 자신의 결핍과 연관되는 단어들을 거침없이 꺼내며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그리고 스스로 타락했다고 생각하던 줄리도, 순수를 대변하는 제이미와도 함께할 수 있음을 깨달으며 해변으로 함께 떠나버린다.

이것이 20세기 사람들만의 이야기일까? 행복을 갈망하고, 그 행복을 위해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마주하기 위해 나 자신을 사랑하며 내 결핍조차 끌어안는 일. 이것은 한 세기에 그치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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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의 20세기>


영화의 결말은 주인공들이 각자의 인생으로 나아가면서 끝이 난다.

초반부에 언급했듯이 도로시아는 경비행기 티켓을 끊어주는 남편과 재혼해 1999년 3월에 암으로 죽는다.

줄리는 어느 순간 에비와 제이미를 잊고 살아간다.

제이미 역시 훗날 평범한 가정을 꾸려 살아간다.

윌리엄은 도자기 가게를 열고 싱어송라이터와 결혼하지만 1년 뒤에 이혼한다.

에비는 불임의 위험 속에서도 기어코 아이를 둘이나 낳아 산타바바라에서 계속 살아간다.

이들의 결말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이 두려워하던 결핍에 정면으로 맞서 결국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결말이 모두 해피엔딩은 아니다. 끝내 행복한 삶을 맞이한 이도 있지만, 다시 불행에 빠진 이들도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인 도로시아의 삶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이미 도로시아는 불행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불행이 있더라도 결코 그 불행의 연속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명화된 이 사회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대로라면, 우리는 우리의 ‘좋음’을 좇아 상대의 ‘좋음’, 그리고 모든 결핍들을 인정하면서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면 된다. 그리고 우리의 좋음과 결핍을 인정해주는 ‘또 다른 나’를 만나 진정한 사랑에 이르고, 행복한 삶에 이를 수도 있다. 그것은 어느 세기에나 적용되는 일이다.

부디 우리의 21세기가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과 진정한 사랑으로 끝나길. 그리고 그 끝에서 자유의 바다 위를 여행하다 어느 햇살 좋은 날에 미소 지으며 눈감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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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어 하우스, 단순한 공간의 공유가 아닌 마음과 치유의 공유가 있는 곳이군요. 꼭 빌려서 봐야겠군요.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아네트 베닝은 여전히 그 사랑스런 눈길을 유지하고 있군요. 러브어페어의 엔딩씬과 벅시에서의 워렌 비티와의 환상의 조합은 여전히 한 편의 꿈처럼 다가옵니다. 지금 러브어페어 피아노 곡을 들으면서 스팀 써핑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러브 어페어를 보지 않았습니다만 아네트 베닝과 워렌 비티가 주연이었군요! 벌써부터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추천해주신 러브 어페어를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실례지만 나이가 어느정도인지 모르겠으나..영화란 어느 정도 그 시대를 반영하니...명화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제목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아름다운 영화입니다..

저의 독해력이 부족한 관계로 남겨주신 댓글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이해한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되는데,

'나이가 어리셔서 아마 이 영화를(러브 어페어)를 접하지 못했으리라 추측되는데, 그럼에도 그 영화 역시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어 명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제목이(러브 어페어의 혹은 필자의 글) 조금 어울리지는 않을 수 있지만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가 맞는지요? 제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확실히 러브 어페어는 제가 감상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94년도)에 개봉한 작품이라 접할 수는 없었지만 말씀해주신 것처럼 훌륭한 명화는 시기를 따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추천해주신 작품 꼭 보고 기회가 된다면 감상도 남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한국말로 불륜이니..제목은 좀 그렇죠. 쿨한 요즘 세상이 어느 정도 받아들일지? 예전에 정서에는 좀 파격적이었거든요..내용과 영화자체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네트 배닝 참 좋아하던 배우였는데 많이 늙었네요. 여전히 고운 느낌이긴 하지만..

영화 자체가 옛시대의 아네트 배닝이 현재를 살아가는 아들을 이해해가는 과정으로 그려지고 있어 더 의미 깊은 것 같습니다 :)

자아의 혼란과 혼자만의 고뇌, 고독을 잘 풀어낸 영화인 듯 하네요.
나의 결핍을 인정하고 싶고, 진정한 나를 찾고 싶은 사람으로써 꼭 보고싶어지는 영화네요:)

재밌다곤 말할 수 없지만 꽤나 건질만한 생각거리가 많은 영화인 듯 합니다 :)
채은님께서 간절히 찾고 있는 어떤 '확신'이 하루빨리 찾아오길 빌어봅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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