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만약의 두 얼굴
산 주니페로. 블랙미러 시리즈의 모든 에피소드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블랙미러에서 묘사하는 미래 사회 중 유일하게 무섭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산 주니페로는 죽음을 앞둔 자, 연명 치료 중인 자들이 죽음 후에 접속하여 영원히 살 수 있는 가상현실 네트워크이다. 육체는 사라지지만 클라우드에 이식한 의식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곳, 산 주니페로는 아름답고, 산 주니페로를 선택한 자들은 행복하기만 하다. 아름답고 행복한 가상현실이라. 나는 좀 헷갈렸고, 그래서 이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는 미래의 기술이 인간을 해방하리라 믿지만, (지나치게 사람 같이 생긴) 휴머노이드나 가상현실은 정말 적응이 안 된다. 진짜 별로다. 그건 진짜인 척하는 가짜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지 기술 자체에 대한 혐오는 아니다. 사실 최대한 진짜 같아지는 것이 이 기술의 핵심이긴 하다. 동시에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인간의 능력도 진화하고 있으니 앞으로 모든 가짜는 점점 더 진짜 같아질 것이다. 젠장. 젠장은 무슨. 괜한 오지랖이다. 인간은 '진짜 같은 가짜'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진짜 같은 가짜'를 기꺼이 선택하는 걸. 심지어 현명한 최종 선택을 위해 맛보기 체험도 가능하다니. 으악, 이를 어째.
기술은 인간을 해방했다. 앞으로도 기술이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 진보할 것이라 믿는다. 21세기의 빅 브라더나 킬러 로봇 같은 걸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여전히 그렇다. 이걸 무책임한 태도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어차피 진보의 과정은 선형적이지 않고, 의미 있는 평가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난 뒤에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억압하는 기술이 나타나면 해방하는 기술이 나타난다. 기술에는 죄가 없고, 다만 선택은 인간이 한다. 그 싸움에 뛰어들어 무언가를 잃거나 무언가를 얻는다. 그것의 반복이다. 내내 돈에 억압만 당하던 인간도 이제는 해방을 시도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기술을 통해. 돈도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 모양이다.
잠시 헷갈렸지만, 그럼에도 산 주니페로는 내게 디스토피아가 맞다. 인간을 삶의 유한함으로부터 해방하는 기술은 오싹하다.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인간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해왔다.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꿈꾸고 좌절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나아가고 투쟁하여 이루는 모든 것들이다.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이 노력하여 얻은 것. 고통인 줄 알면서도 사는 것. 울면서도 웃는 것. 빨간 약을 삼키고 또 삼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