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그러니 우리는 모두, 흰색이었다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4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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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색기>, 리단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지하철역에 내릴 때는 언제나 살짝 긴장하고 만다. 카카오맵으로 별 쓸모도 없을 사전 조사를 마쳤다. 그리고 지하철역 주변의 지도를 스크린샷으로 저장해두었다. 처음 내리는 역이나 정거장에서는 늘 그렇게 한다. 길을 찾을 때 저장한 이미지를 참고하기 위해 찍는 것은 아니다. 이건 체크인과 비슷하다. 2022년 2월 3일 오후 1시 12분, 금호역에 내리다. 말하자면 의식 같은 것이다. 금호역은 작년 두 계절을 보내는 내내 지하철을 타고 지나쳤던 역이다. 1번 출구로 나와 마을버스를 탔다. 좌석도 몇 개 없는 옛날의 그 자그마한 버스였는데, 탈 때 상체를 살짝 숙여야 해서 좀 설레었다. 마을버스 정거장에서부터는 가파른 비탈길을 한참 걸었다. 몇 걸음 옮기자마자 숨이 차서 헉헉거렸다. 맞은편에서는 동네 사람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두 팔과 두 다리를 팔랑거리며 축지법을 쓰듯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아주 잠깐 그녀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오기가 일어 나도 덩달아 팔랑거리고 싶었지만, 나의 초라한 체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흔한 주택가임에도 동네 분위기가 어쩐지 이국적이었다. 오후 1시를 막 넘긴 겨울 해가 미처 녹지 않은 눈 무덤 위에 부서져 눈이 부셨다. 그리고 세상의 끝처럼 느껴지는 곳에 책방이 보였다. 긴 연휴를 마무리하고 이제 막 출근한 책방 주인이 부지런히 가게 앞을 쓸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들어가서 주문한 책을 찾으러 왔다고 하니 책방 주인이 "아! 조색기요?" 하고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살짝 반가운 마음이 묻어있다고 느꼈는데, 긴 연휴 끝에 찾아온 첫 손님이 반가운 것인지, 이 책을 찾아온 손님이 반가운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후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 감이 틀림없다는 확신도 든다. 창가의 테이블 위에 앉은 검은색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고 서너 차례 야옹야옹 울었다. 반짝이는 두 눈이 신비로웠다. 나는 고양이가 "야옹." 할 때마다 "안녕." 하고 대답했다. 개나 고양이에게 말을 걸면 말투와 목소리가 언제나 달라지는데, 이번에도 무의식적으로 내 목소리가 고양이의 그것과 비슷해져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좀 쑥스러웠다. 책방 주인이 책장에서 뽑아 든 책을 금세 내 손에 들려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서둘러 책방을 빠져나왔다. 책방 안에 머문 시간은 1분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힘들게 도착한 곳이기도 했고 구경할 만한 것이 많아서 한 차례 둘러봄 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문을 나서 한참 걷다가 한 번쯤 뒤를 돌아보고 싶기도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나의 행동은 좀 우습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조색기를 다시 펼쳤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되어 기쁜 마음 1번. 사라진 것 중 가장 먼저 찾아내 손에 쥐게 된 책이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이라 말했던 이 책이어서 기쁜 마음 2번. 너도 나도 같은 흰색이어서 기쁜 마음 3번. 그럼에도 나와 다른 너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곱씹으며 기쁜 마음 4번. 사라진 것들을 모두 되찾으리라 다짐하며 기쁜 마음 5번. 여러모로 기쁘기만 한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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