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그 좋았던 시간에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4 years ago (edited)

시인을 동경한다. 국문과로 진학해서 시 수업을 딱 한학기 밖에 듣지 않았던 건 노교수의 괴팍함도 있었지만 시는 나의 영역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도 하다. 시 수업에서 난 세 편의 시를 썼는데, 2편은 어디론가 증발했고 내가 그나마 제일 낫다고 생각한 <잿빛 인생>이란 시만 간직하고 있다. 장난꾸러기 친구들은 나를 놀리며 종종 이 시를 읽어 달라고 했고 그 민망함에 수치사 직전까지 갔지만, 친구들을 위해 읽어주곤 했다. 내게 시란 딱 그 정도였다. 입 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운. 나는 그 수업 이후로 한번도 시를 쓰지 않았고 시는 나의 것인 적이 없었다. 가끔, 아주 가끔 시집을 사서 읽을 뿐. 내 글을 다듬기에 앞서서 남의 책을 많이 읽는 버릇이 생겼다. 남의 글을 보다가 내 글의 빈곳을 발견하고 영감을 얻기 때문. 이 책도 그렇게 읽은 책 중에 하나다. 시인의 여행산문집이라는 게 흥미로웠고, 넘기다 읽은 시에 반해 망설이지 않고 바로 구매했다. 화려한 미사여구도, 특별한 사건도, 과장도 없이 수수하지만 따뜻한 시선과 성찰로 풀어낸 시집 같은 여행 산문이었다. 생각보다 더 담백하고, 생각보다 더 좋았다. 여행자로서 나도 느꼈지만 정돈되지 않은 뒤엉킨 생각이 참으로 정갈하고 소박하지만 맛깔난 언어로 피어올라 내 가슴에 쿵, 떨어졌다.

나에게 여행은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구별 짓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로 기꺼이 나아간다. 낯설어져서 비로소 새로워지는 나를 자랑하고 싶을 때, 엽서를 사러 나간다. 엽서를 고르는 데에 한나절, 엽서에 쓸 문장을 고르는 데에 한나절을 쓴다. 엽서를 부치면 나는 내용을 잊는다. 그 내용을 기억하는 건 친구들의 몫이다. "나는 이곳에 와 있어"로 시작되는 엽서 한 장을 씌 위해서 어떤 하루를 다 쓴다.

어떤 여행지에서는 여행을 멈추는 게 더 좋은 여행일 때가 있다. 여행을 멈추고 방을 얻어 많이 자고 많이 먹으면서 많이 쉬는 것이 더 좋은 여행이 될 때가 있다. 이렇다 할 찾아갈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없는 장소인 것은 아니다. 그곳은 지내기 좋은 빵집과 찻집이 있고, 오래 머물기 좋은 서점과 도서관이 있고, 무엇보다 모든 것이 저렴하다. 모두가 인심이 좋다. 그런 도시에서 방을 얻어 한참 동안 머물고 나면 또다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을 떠날 힘을 얻는다.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일에는 실컷 그걸 지켜보는 사람이 되었고, 아름다움을 기록하는 일에는 한껏 건성인 사람이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장면을 오래 들여다볼 때가 많다. 하염없이. 생각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장면인 줄 알지만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내가 아는 말 중에 가장 기만에 가까운 말이 되어간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 요즘 나의 주된 업무이다. 아무것도 아닌 장면을 차곡차곡 모아서 이불을 내다 널듯 이 세상에 내다 널고 싶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가 우리집을 올려다보면서, 아 나도 이불널어야겠다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좋았던 시간에>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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