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아, 입이 없는 것들
시집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가끔 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액자틀처럼 생겨 시집 이름과 시인의 자화상이 단촐하게 들어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앞으로 간다. 제목을 보고 내용을 뒤적이다 마음에 드는 시집을 골라 산다. 지금이야 책 선물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대학시절에는 책 선물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 중에 간혹 시집이 있었고 이 시집은 대학교 선배 y가 내게 선물로 줬던 걸로 기억을 한다. 사실, 너무도 오래되었기에 정교한 기억은 아니다.
며칠 전, 친구의 집에 모여 점심을 먹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을 졸업한 해를 손으로 헤아리다가 세월의 무색함을 새삼 느꼈는데 대학 후배 b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누나, 농활 때 기억나요? 난 그 철없는 모습이 여전히 생생한데...."
육체 노동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나는 농활에서 처음 나의 육체라는 것이 얼마나 유약한지를 느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쭈그려 앉아 몇 시간 딸기를 따고, 농사일을 하니 죽을 맛이었다. 새참하라고 가져다 주신 막걸리 몇사발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내 팔의 움직임은 더 더뎌졌다. 나는 내 마음 같게 움직이지 않는 육체 앞에서 곤혹했고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밤, 마을회관에 모여 하는 평가시간에 '내가 얼마나 나약한지 알았다고' 말하며 울컥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잠 많은 나는 당연하게 일찍 일어나지 못했고 b는 어제 울고불고한 사람다운 행보가 아니라며 몇십년 째 나를 놀리고 있다.
농활 이후로 내가 육체의 무력감을 느끼던 때가, 티베트 여행에서 고산병에 시달리던 시절이다. 그 여행의 끝자락인 라다크에서 난 이 시집을 읽었다.
겨울 오후, 밥알처럼 풀어지는 저희의 추운
하루 오 육체가 없었으면 춥지 않았을 것을
저 안이 저렇게 어두워 中
쌓인 눈 위에 밀린
오줌누고 나면 순무처럼 굵게
패이는 구멍, 생각나는가 목에 뚫린
구멍으로 더운 피 쏟던 잔칫날 돼지
오, 육체가 없었으면 없었을 구멍
육체가 없었으면, 없었을 中
이 괴로움 벗어 누구에게
산을 올라가다가 이 괴로움 벗어
누구에게 줄까 하다가,
포크레인으로 파헤친 산중턱
뒤집혀 말라가는 나무들을 보았다
박명(薄明)의 해가 성긴 구름 뒤에서
떨고 있는 겨울날이었다
잘린 바위 틈서리에서 부리 긴 새들이
지렁이를 찢고 있었다
내 괴로움에는 상처가 없고, 찢겨
너덜너덜한 지렁이 몸에는
괴로움이 없었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 검은 산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은
흘러내린다 옷만 있고 몸뚱이가 없다
마라, 나는 너의 허리를 감는다
살아 있느냐고,살아 있었느냐고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눈먼 바람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낮은 하늘 네 눈동자 속으로
빨려드는 것이다 마라,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검은 돌로 쌓은 장방형의
무덤에서 마지막 영생의 꿈에 붙들리는
것이다 눈먼 바람이 우리를 찢을 때까지
찢기는 그림자를 향해 절하는 것이다
혹독한 라다크 대자연 앞에서 나약한 육체에 진저리치며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귀가 먹먹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해발 5,500m가 넘는 카르둥라의 길 위에서, 아무도 없이 버림받은 듯한 휑한 사막 길 위에서, 영하 40도 까지 떨어지는 매정한 겨울 앞에서. 산다는 것은 어쩜 이렇게 지긋지긋한지. 무거운 몸뚱아리는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지긋지긋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게 하는 이유이다. 육체가 없었으면 없었을 고통을 마주하며 삶의 비루함에 매번 마른 기침을 하며 좌절하다가도, 가학적 기쁨에 웃기도 하고, 고통을 자양삼아 성장하기도 한다.
검은 바위들 끼고 흐르는 물 위로
겹친 나무 그림자 어둡고 거기,
나뭇가지 사이로 신음하던 해가
끙 하며 선지 덩어리 쏟아 붓는다.
어떤 풍경은 늦게 먹은 점심처럼
그렇게 우리 안에 있다.
주먹으로 누르고 손가락으로 쑤셔도
내려가지 않는 풍경,
밭 갈고 난 암소의 턱에서
게 거품처럼 흐르는 풍경,
달리는 말 등에서, 뱃가죽에서
뿜어나오는 안개같은 풍경
(중략)
그러나 또 어떤 풍경은 전화 코드 뽑고
한 삼십 분 졸고 나면 흔적이 없다.
어떤 풍경은 中
헐벗은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겨울 해가
기어내려오고 있다. 통조림 캔에서 금방
꺼낸 복숭아 알을 닮은 해, 매연과 땟국물로
식사하고도 아프단 소리 한번 안 하는 해는
해마다 한 번씩 건강 진단을 받는 것도 아니다.
여리고 성 근처 中
육체가 없었으면 좋았을,,,이라는 시의 구절들을 되뇌이다가도 고개를 들어 경이로운 라다크의 풍경들을 보면 육체의 고통은 순간 사라지고 육체의 존재에 한 없이 감사하기만 했다. 육체가 없었으면 못봤을 라다크의 풍경들은 늦게 먹은 점심처럼 내려가지 않고 평생 내게 남아있을 거다.
육체노동을 멈춘 젠젠님의 글은 갈수록 좋군요. 부디 손가락 하나 까딱 마시길. 조앤도 육체노동을 멈추고 대작을 썼으니
마법사님의 칭찬에 어깨가 덩실덩실 절로 춤이 나오네요. 몸은 춤을 추는데에만 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