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Bowling Green - 불시착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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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wling Green


미국, 켄터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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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 나무와 열매


어학연수를 가게 된 건 순전히 휴학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당시 학교를 쉬는 거 말고는 원하는 게 없었고 학교를 쉬기 위해 둘러 댈 명분이 필요했다. 21살 겨울, 갑자기 덜컥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부모님은 교육에 관해서 남들 하는 거 다 해줘야 한다고 믿고 있었고, 아빠는 특히 나에 대한 신뢰가 강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덜컥 3주만에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Bowling Green을 고른 건 외사촌 언니가 당시 그곳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이다. 서류 접수를 대행한 유학원은 이왕이면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이 좋다고 했다. 출발하기 1주일 전, 이모와 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밀려드는 현실감에 무슨 일을 벌인거지, 두려움에 가지 않겠다며 엉엉 울었다.

내가 선택하고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비행기를 탔다. 그전까지 제주도에 가는 비행기를 한 번 타본 걸 제외하고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홀로 15시간 가량 그것도 두 번이나 환승해서 그곳에 도착해야 했다. 애써 쥐어짠용기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사라졌다. 목이 너무 말랐는데 미국 승무원은 'water'라는 내 말을 듣고 다정히 콜라를 건넸다. 감히 다시 물을 달란 요청도 못하고 어둠 속에서 눈물을 질질 짰다.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멋지게 시작한 적이 없다. 내가 선택해 놓고도 두려워서 질질 짰다. 어깨가 쪼그라들고 심장이 쾅쾅 뛰고 밤마다 외로움에 눈물을 흘렸다. 첫 해외 생활 역시 질질짜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내게 해외는 별나라였다. 어릴 때조차 모험은 꿈꿔도 해외 여행을 꿈꾼 적 없었다. 나는 내가 외국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해본 적조차 없다. 그런 건 특별한 사람, 용기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 내가 아닌 사람만 갈 수 있는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나는 단 한번도 내가 외국을 거니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학창시절 가장 싫어하는 과목은 일본어와 영어였다. 문법과 독해를 열심히 해봤자 영어듣기평가에서 점수가 다 깎였다. 영어가 필수과목인 게 싫었다. 대학에 온 이후 영어가 중요하다고 다들 말했지만 나는 영어를 공부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휴학하고 싶다 이외에는 내가 결정한 게 별로 없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도시에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우연히, 한바탕 울고나서 불시착했다.
그게 내게 얼마나 큰 선물이 될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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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언니와 종종 오리를 보러 가던 호수


Bowling Green의 별명은 Boring Green이였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심심했다. 백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한국인은 많이 없었다. 다른 한국인이라면 이곳을 선택한 걸 후회했을지 모른다.

한국의 대학에서 잘 적응하지 못한 내게 한국인 커뮤니티가 없는 게 내 마음을 편하게 했다. ESLI 과정에 한국인은 나를 빼고 둘 뿐이었고 나보다 레벨이 높아 다른 반이었다. 게다가 운좋게도 그들은 다정하고 사려심이 깊어서 낯선 나를 반갑게 맞아주고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국인이 없어서 영어를 쓸 수밖에 없었다. 놀러나갈 곳도 없어서 공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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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여행간 날, 흔들렸지만 즐거워보여


같은 반 태국 친구들과 친해졌다. 아니 같은 반 친구들과 모두 친해졌다. 모두들 어학연수는 처음이었고 그곳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서로밖에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의 나를 잊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롭게 적응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모두가 처음이었다.

미국인과 외국인 학생 교류를 위한 교내 행사가 많았고 영어를 못 하는데도 사촌 언니 덕에 여기저기 놀러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저스틴을 만났다. 저스틴은 나보다 한 살 어렸다. 영어가 통하지 않아 답답했을 법한데도 차분하고 끈기있게 어떻게든 내 말을 알아들었다. 또 영어를 못하는 와중에도 저스틴이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굉장히 지적인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저스틴은 오른 무릎과 허벅지에 기계 장치를 달고 있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일시적인지 영구적인지 영어를 못해서 알아듣지 못했다. 저스틴이 자신의 다리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나 또한 신경쓰지 않았다.

가끔씩 저스틴을 만나면 저스틴이 밥을 사줬다. 숙제도 도와주고 도서관 앞에 같이 누워 바람도 맞았다. 어느날 저스틴에게 어젯밤에 사실은 외로워서 울었다고 말하니 저스틴은 그런 날에는 자기에게 연락해도 좋다고 말했다. 프롬을 따라한 행사를 하는 날 저스틴 덕에 빨간 드레스를 빌려 입고 오른손목에 꽃을 달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했다. 정작 본 행사는 너무도 허접했지만, 저스틴은 엎드려서 상체만으로도 춤을 춰서 나를 놀라게 했다. 빠져나가 발아픈 구두를 벗어던지고 맨발로 조심스레 걷고 또 걸으며 우리는 재잘거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새벽나절 헤어지기 전 아주아주 천천히 저스틴을 수고했다는 듯이 애정을 담아 포옹을 했다. 나는 이 장면을 내가 영원히 기억할 거란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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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찍은 사진은 이게 전부다, 역시 흔들렸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교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지나가던 학생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용지가 바람결에 마구 흩어져 땅에 떨어졌다.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 저스틴은 1초의 생각도 하지 않고 깽깽이 발을 뛰며 그 종이를 함께 주웠다. 곧 아무렇지 않게 돌아와 나와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그에게 무척 감동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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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학기가 끝나고 내가 알던 모든 친구들이 나와 다른 반이 되었다. 저스틴도 떠났다. 억울했다. 왜 나만? 이거 벌인가? 행정실에 가서 반을 바꿔주면 안되냐고 물었지만 소용 없었다. 우리 반은 처음 보는 사우디 남자 4명과 새로온 중국인 여자 2명 볼리비아 남자 1명 그리고 나였다. 아마 다른 곳이었다면 그곳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랍 사람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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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친구들이 살던 동네 주변, 찍은 사진이라곤 이런 것밖에 없네.

처음 그들은 내가 새침하고 오만한데 그 와중에 진지하다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는 생소한데다가 장난이 심하고 유치하게 노는 그들과 친해질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들과 과제를 하게 되고, 메신저를 하게 되고, 그들의 집에 놀러가서 그들이 해주는 전통음식을 먹게 되었다. 그들은 파티를 할 때면 꼭 나를 초대했다.

그들은 손님에게 귀한 걸 내주는 문화가 있다고 말하며 나를 극진히 대접해주었다. 특히 Zuhair라는 친구와 엄청 친해져서 나는 그의 오토바이 뒤를 타고, 그의 집에 놀러가고, 그를 '파파'라고 불렀다. 그는 내가 궁금해하던 아랍 문화와 그의 나라에 대해서 조금씩 이야기를 해줬다. 한 번은 그에게 김치볶음밥을 해줬는데 그가 먹다가 뱉고는 혹시 햄을 넣었냐고 물어봤다. 맞다 햄도 돼지고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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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스에 한국말로 메시지 적기, 시작은 파파

Zuhair는 나를 정말 사랑했다. 한 번은 파티에 갔다가 그가 보이지 않아 먼저 집에 갔다. 다음날에도 연락이 되지 않던 그는 그 다음날에야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 집은 잘 갔는지, 밥은 먹었는지, 별일 없는지 잠은 잘 잤는지. 내가 대체 어디갔었냐고 묻자 그는 오토바이 사고가 있었다고 말했다. 곧 그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나는 막 울었다. 심각하게 다쳐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 와중에 깨자마자 내게 전화해서 걱정을 해주는 그가 너무 바보같아서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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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도시, 시카고

미국에 갔는데 뉴욕에 가본 적도 없고 시카고를 제외하면 관광지에도 가본 적 없다. 8개월 내내 Bolwing Green 대학 캠퍼스 내에 있었다. 미국 친구는 저스틴을 제외하고 사귄 적 없다. 영어는 별로 늘지 않았다.

나는 Bolwing Green 날씨가 1주일 사이로 변한다는 것과 미국에서는 기숙사에서 임신한 학생들을 봐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과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알게 되었다. 헤어짐이 정해진 사람들과 잠깐동안 마음을 모두 나누는 경험을 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염려하고 위로하고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어도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새로운 세상을 보기 위한 자격 같은 건 없다는 것도. 별나라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하고 눈물을 질질 짜던 나도 덜컥 선물같은 인연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나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다른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마음을 열면 세상은 더 활짝 내게 마음을 열었다. 언제든지 나갈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Bowling Green, 그 작은 캠퍼스는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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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행복해 보여서 친구의 동의도 얻지 않고 올린다. 연이 닿아 다시 볼 수 있다면 좋겠다.


2021년 5월 24일, by 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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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years ago 

고물님. 어학연수를 가셨었군요. 정말 따뜻하고 행복해지는 글이에요 ;-) 사진 속 고물님 표정도요!

맞아요 새벽에 포스팅 작성하면서 너무 행복했어요. 젠젠님께 닿아서 기뻐요.
그러고보면 저는 추억과 사람 컬렉터에요. 아마 젠젠님과의 추억도 쌓여 따뜻하고 아름다운 글로 탄생하겠죠!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5 years ago 

고물님은 참 많은 이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셨군요. 죽기 전에 다 쏟아 놓고 가셔요.

맞아요 마법사님 새삼 저는 이렇게 많은 귀한 사랑을 받았네요. 저의 City 100은 사랑의 기록이 될 것 같아요.
죽기 전까지 가능한 다 쏟아내고 갈게요!!! 불끈!

글을 읽어내려가면 갈수록 다른 느낌이나 감정들보다는,
그냥 고물님 참 멋있다... 라는 생각이 계속 드네요 ㅎㅎㅎ
왜인지는 잘 모르겠음 'ㅡ' 진짜ㅋㅋㅋㅋ

아기아기한 고물님 사진도 잘 보았습니당 😉😉😉

그리고,

그가 먹다가 뱉고는 혹시 햄을 넣었냐고 물어봤다. 맞다 햄도 돼지고기였지.

ㅋㅋㅋㅋㅋ 이거 어쩌실겁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체 어떤 부분에서 멋짐을 느끼신거죠? 이상하다 ㅋㅋㅋ 특이 취향 뉴발님🙋🏻‍♀️🎈

앜ㅋㅋㅋ 햄.... 제가 아마 두번쯤 먹였어요. 한 두숟가락 먹고 이상한 걸 느끼던데요 그때 너무 미안했어요 ㅋㅋㅋㅋ

 5 years ago 

목이 너무 말랐는데 미국 승무원은 'water'라는 내 말을 듣고 다정히 콜라를 건넸다.

ㅋㅋ

마음을 닫은게 너무 오래 됐는데 ,
제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글이네요.

저 진따 심각했음ㅠㅠㅠ 눈물을 흘리니 더 목이 마르더라고요 ㅋㅋㅋㅋ

택슨님 마음 제가 열어보겠습니다(응??)Open the d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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