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크루즈 투어] 로맨스가 필요해

in #tripsteem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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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브리티의 11층 리플렉션 바는 매일 밤 클럽으로 변신한다. 춤추고 술 마시는 데에 빠질 수는 없기에 배에 탄 다음 날 혼자 쭈뼛쭈뼛 바에 올라가 봤다. 바가 클럽으로 변신하기 직전 퀴즈가 한 창 진행 중이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서 자리라고는 구석에 혼자 앉은 여자의 맞은편 자리만이 남아 있었다.

“여기에 앉아도 될까?”

여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퀴즈의 주제는 비틀즈로 비틀즈가 어디 나라 사람인지, 어디 출신인지 등을 문제로 내고 종이로 적고 있었다. 크루즈에서는 이렇게 유난히도 문제를 내고 문제를 맞히는 프로그램이 즐비하다. 퀴즈가 끝난 뒤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를 떠났고 잉글랜드 노래로만 구성된 클럽이 시작되었다. 내 앞에 앉은 여자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어깨를 강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스테이지는 사람들로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노부부라 저기에서 혼자 춤을 추는 건 뻘쭘할 것 같았다. ‘에이 잠이나 자자.’하고 일어나려던 순간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물었다.

“우리 같이 춤추러 가지 않을래?”
“와이 낫”

그녀는 캐나다 출신의 베리였다. 나이는 40~50대 정도일까? 아니면 내 또래일 수도 있겠다. 나는 나이 맞추기를 잘하지 못하고 특히나 서양 여자의 나이는 영 모르겠단 말이지. 그녀는 정말 춤과 음악에 심취해서 ‘이 노래 뭐지?’ ‘이 노래 좋아’ ‘너 이 노래 뭔지 아니’ 등 노래에 대한 얘기만을 내게 했는데 난 모른다는 답변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저기요. 이건 오래된 영국 노래고 저는 한국에서 왔단 말이죠. 모릅니다. 몰라요.

스테이지를 누비면서 춤을 추는 베리는 사람들과 금세 친해졌고 자신과 인사한 친구를 내게도 소개시켜줬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친구는 텍사스에서 온 할아버지였는데 이름은 음악이 시끄러워 제대로 듣지 못했다. 샤기컷으로 층층이 멋 낸 하얀 머리에 턱수염까지 치렁치렁하게 기른 할아버지는 꽉 끼는 청바지와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유난히도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춤을 췄다. 할아버지는 그 헤어스타일이며 외모며 옷차림 때문에 영화에서 갓 나온 사람처럼 보였는데 특히나 레니게이드의 노인 버전 배우 같았다. 나는 춤을 출 때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굉장히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미어캣 마냥 고개를 뽑고 이곳 저곳에 시선을 분산하곤 한다. 보고 있지 않아도 할아버지의 집요하고 느끼한 눈길이 느껴졌다. 다행인건 그 눈길이 나를 향한 게 아닌 베리를 향한 거 였다는 것. ‘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텍사스 할아버지는 엉덩이를 엑스자로 흔들며 베리의 주변을 맴돌았고 나는 졸지에 방해꾼이 되어 버렸다. 때마침 정찬을 함께 먹으며 알게 된 노부부 수와 조니가 인사를 해 그들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하게 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30분 정도 지나고 스테이지를 보니 둘 다 없었다. 그럼 둘 사이에 썸이라도 생긴 걸까?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도 텍사스 할아버지는 모든 파티에 나타나 벽에 기대어 외롭게 서있었던 걸 보면 그건 아닌 거 같다.

배라는 고립된 장소에 몇 주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만큼 크루즈는 사랑을 싹 틔우기 좋은 곳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크루즈에 타기 전 나는 우연히 생길지 모르는 로맨스를 상상하며 혼자 설레곤 했다. 바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든지 모두가 잠든 사이 갑판에서의 밀회라든지. 내가 서쪽으로 여행을 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과거를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 망령처럼 지긋하게 날 따라다니는 전 남친 H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H를 찾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그러다 보니 크루즈에서 타이타닉 처럼 운명 같은 사랑이 내게도 있지 않을까 하는 김칫국을 콸콸 들이켰는데 네 번의 크루즈를 타는 동안 로맨스는 전혀 1도 없었다. 크루즈에서 낭만적인 로맨스는 헛된 망상이라는 것을 나는 승선을 하면서 바로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노부부가 함께 타고 젊은이가 탔다 한들 대부분 커플이기 때문에 솔로인 사람 자체가 없는 데다가 있다고 해도 이 큰 배 안에서 이야기를 할 접점을 만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상황에서도 로맨스는 존재한다. 내가 세번 째로 탄 스페인 배 풀만투르에서 만난 독일인 도라와 스코틀랜드인 휴가 딱 그런 경우이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4년 전 지금 타고 있는 이 배 안에서였어. 나는 혼자 여행을 했고 휴는 친구와 여행 중이었는데 그날은 트로피컬 파티를 하는 날이었지. 휴의 친구가 내게 같이 놀자고 하길래 알았다고 하고 그 테이블에 가니 휴가 앉아 있었어. 그리고 뭐 사랑에 빠졌지 뭐야.”

“이 배에서 처음 만나서 지금 함께 다시 타고 있는 거라고? 진짜 로맨틱하다. 그나저나 휴의 친구가 널 좋아했던 건 아냐?”

“그건 아냐. 아닐 거야. 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휴의 친구가 도라를 마음에 들어서 말을 건 것 같지만 뭐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니. 현재 독일에서 함께 사는 이 커플은 4년째 연애 중이지만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절절했다. 또 풀만투르 배에서 같이 저녁을 먹는 멕시코에서 온 카르멘과 영국 출신 스티브는 말도 통하지 않는데도 썸을 탔다. 같이 자쿠지에서 사우나를 하고 영화를 보고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짧은 영어와 짧은 스페인어로 소통을 하는 이 노년의 커플이 얼마나 귀엽던지.

썸을 타는 커플이나 애정이 들끓는 연인이나 다정하게 서로를 살뜰하게 챙기는 노부부나 볼 때마다 나는 참을 수 없이 연애가 하고 싶어졌는데 주변에는 할아버지들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그만 할아버지와 연애하는 상상을 해버린다. 크루즈에서 많은 서양 할아버지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엘프나 난쟁이처럼 사람을 닮았지만, 사람이 아닌 신화 속 종족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특히나 눈처럼 하얀 머리에 뭉쳐놓은 하얀 실처럼 북슬북슬한 콧수염의 할아버지들을 보면 자동반사적으로 귀여움을 느꼈다. 무례하지만 그 몽글몽글한 수염과 머리를 만지고 싶었고 캐릭터화하고 싶을 정도였다. 연애하는 데에 나이 차는 그다지 상관없다 생각하지만, 할아버지를 그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던 나였다. 하지만 이렇게 서양 할아버지를 귀여운 종족으로 받아들이고 보니 까짓것 할아버지와 연애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크루즈에서 같이 수영을 하다 선베드에 누워있다가 서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다 키..키…스를 한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상상을 하다 보면 스스로가 남사스러워 손을 휙휙 내저으며 상상을 지워버리고 만다. 귀엽긴 하지만 연애의 상대로는 무리다. 음 무리이고 말고. 그나저나 레니게이드 할아버지는 결국 연애에 성공했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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