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추억하다 #5-1. [싱가포르] 남편과의 첫 데이트

in #tripsteem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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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같은 과 선배였지만, 내가 휴학한 후 그가 복학했기에 그를 마주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여전히 휴학 중이었던 그해 여름, 5일간 짧게 서울에 머물 일이 있었는데, 우리는 어떤 계기로 인해 단둘이서만 밥을 먹고 영화를 보게 되었다. 신기한 것은 잘 모르는 사람임에도 그가 정말 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뭔가 핑곗거리를 만들어서 그를 만났고, 결국 지방에 있던 집으로 돌아간 후에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바로 거절당했기에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것은 그 일로부터 5일이 지난 후였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던 나는, 내일 아침에 잠시 만나자던 그에게 차마 이유를 묻지 못한 채 순순히 약속 장소를 정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초조한 마음으로 지하철역에서 그를 기다렸다. 몇 번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좋아한다고 고백했음에도 그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나였다.

사실 그날은 1년간의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 싱가포르로 출국하는 날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만난 그는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했고, 그 짧은 거리를 함께 걷겠다고 이곳에 왔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일단 그러라고 했다.

야속하게도 공항버스는 우리가 정류장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와버렸고, 나는 아쉽지만 인사 후에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그도 뒤따라 버스에 오르더니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이미 거절도 당했고, 한국을 떠나는 날이었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있었는데, 고민이 많았던 것은 나뿐이 아니었는지, 그 또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던 그는 인천공항에 다다를 즈음에서야 굉장히 애매한 말을 꺼냈다. 싱가포르에 가서도 자기 생각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출국장에서 인사를 한 후, 싱가포르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계속 고민했다. 그래서 사귀자는 건가? 아니라는 건가?

싱가포르에 있던 친척 집에 도착 후 메신저를 켜고 대화를 하고서야 사귀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장거리 연애가 시작되었다.

매일같이 메신저로 채팅을 하는 동안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4개월만 참으면 방학이었지만, 신생 커플이었던 우리에게 그 기간은 너무나도 길었다. 결국 그는 열심히 아르바이트한 돈을 모아 사귄 지 약 2달만에 싱가포르에 왔다. 그에게는 첫 해외여행이었고, 나 또한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그린 싱가포르 지도

당시엔 구글 맵도 구글 어스도 없었기에, 종이로 된 지도를 보고 대충 갈 곳을 적어서 그에게 보내줬다. 지금 보니까 실제 위치와 거의 비슷하지만, suntec 타워는 잘못된 곳에 적혀있다. 그리고 멀리 있는 night safari와 왜 적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는 pulau ubin을 제외하고는 모두 돌아보았다.


입국장에서 그를 기다리며 나오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보았는데, 2개월간 못 봤을 뿐 아니라 그간 메신저로 주고받은 사진들은 죄다 과한 보정이 들어간 스타샷 사진이었기에, 나에게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서야 '아! 저 사람이 내 남자친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유독 그의 얼굴만은 기억하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입국장에서 남편을 기다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손을 잡고 걸었던 첫 데이트의 기억

만나지 못했던 2개월간 우리가 가장 바랐던 것은 손잡고 거리를 걷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에 짐을 풀자마자 오차드 거리를 구경한 후, 걸어서 2시간이 걸리는 집까지 걸어왔다. 그렇게 걷고서도 아쉬워서 집 주위를 조금 더 걸었던 기억.

이 사진을 메인 사진으로 택한 것은 그래서였다. 버튼을 누르면 사진이 찍힌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었던, 5일간의 여행을 위해 빌려온 카메라로 찍은 흐릿한 이 사진처럼 내 기억도 오래된 만큼 여행기도 흐릿할 것이다. 그래도 더 잊히기 전에 한 번쯤 써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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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정보
● Orchard Road, Singapore



여행을 추억하다 #5-1. [싱가포르] 남편과의 첫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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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모아서 산문집 내세요!!! 꼭꼭!!! 으 달달하다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여기다가 쓰는걸로 만족하겠습니다.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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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소중한 첫 데이트의 추억 담긴 사진이군요~
단숨에 끝까지 읽어내려갈만큼 재미있는 스토리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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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데이트 사진이라 그런지 흔들리고 초점도 안맞는데도 마음에 들어요. :)

첫사랑?과 결혼하신것 같네요!
남편분 마성의 매력이 있는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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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의 매력까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 때 고백하지 않으면, 돌아왔을 땐 누군가의 남자친구가 되어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눈 딱 감고 질렀습니다.

로맨틱하다~~~♡
타국에서의 첫데이트라 더 설렜을 것 같아!!

ㅋㅋㅋㅋㅋ 아니야 그냥 첫 데이트라 설렜어. 당시 우리에겐 장소 따윈 중요치 않았다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출국장까지의 동행, 2달만의 재회. 로맨틱하네요. :)

이렇게 쓰고보니 로맨틱해보이지만, 장거리 연애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힘들었어요. ㅎㅎ 뭐 그래도 결국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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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맨틱하빈당+_+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런 랑꾼 부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풋풋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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