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희석식 소주 말고 화요 소주

in #stimcity3 years ago

KakaoTalk_20190730_011610808.jpg

대학교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술집은 후문에 있는 할매집이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 흔한 이름의 술집은 흰머리의 욕쟁이 할매가 욕을 푸지게 할 것 같지만, 의외로 엄마뻘의 이모가 운영하고 있었다. 고기도 팔고 순댓국도 파는 술집이었는데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늘 5000원짜리 술국을 하나 시키고 콩나물 밑반찬을 곁들여 세 명이서 소주 예닐곱병을 노나 마시곤 했다. 당시 과에서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은 차를 즐겨 마시는 ‘차 파’와 술을 즐겨 마시는 ‘술 파’로 나뉘었다. 당연히 나는 ‘술 파’였고 우리 ‘술 파’ 셋이 즐겨 다닌 술집이 할매집이었다.

누군가 남친이 바람을 폈던지 한껏 분노에 차 술을 마시던 날. 이모님은 슬그머니 옆에 앉아 친구의 하소연을 듣고 툭 뱉었다.

"밖에 달린 것들은 다 그래."

연륜이 느껴지는 농도 짙은 발언에 우린 박수까지 치며 깔깔 웃으며 ‘이모님 최고’를 연발 하다 그날도 온몸에 소주 냄새를 풍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울고 웃고 취하고 박수치고 넘어지고 온갖 추태를 선보였던 그 추억의 장소는 애석하게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이제는 고기도 일인당 2인분씩 시켜먹고 순댓국도 껍데기도 모두 사먹을 수 있는데,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그리고 나와 나의 친구들은 이제 예전처럼 소주를 콸콸콸 들이부을 수도 없다. 나이가 들어 쓴 소주가 몸에서 받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동안 좋은 술을 많이 먹어온 것이 더 큰 이유인 듯 하다. 싸구려 희석식 소주를 먹고 취하기엔 우리의 간은 너무 주름졌고 입은 고급져졌다.

​지금으로서는 굉장히 오래 전에 화요 시음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화요는 한 두 번 술집에서 시켜먹은 적은 있지만 가격이 부담되어 즐겨 마시지는 못했던 술이다. 얼핏 기억에 굉장히 깔끔하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 더 기대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먹는 소주가 진짜 소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우리가 먹는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같은 소주는 고구마나 당밀 등에서 뽑아낸 주정 즉 95%의 에틸 알코올을 물로 희석해 도수를 낮추고 감미료 등을 첨가하는 희석식 소주로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으니. 말하자면 야매인거다. 야매가 국민 술이 된 아이러니라니. 화요와 같은 증류식 소주가 우리 선조들이 먹었던 전통 그대로의 ‘진짜 소주’다. 그럼 ‘진짜 소주’ 화요의 맛은 어떨까?

KakaoTalk_20190730_011611265.jpg

시음회에서 이 날 마신 화요는 총 5가지 였다. 화요 17도, 화요 25도, 화요 41도, 화요 53도, 화요 X.Premium

​우선 화요 17도는 참으로 부드럽고 부드럽다. 보통 일반적으로 마시는 참이슬이나 처음처럼의 도수가 19도 안팎인데 그 알코올향과 쓴맛이 싫어서 최대한 입에 닿는 면적을 적게 하고 목에 넘기는 것과 달리 화요 17도는 그냥 입 안에 한없이 머금고만 싶어진다. 쌀 냄새가 나고 청주의 느낌도 들면서 부드럽고 상큼하다. 배나 사과 맛이 얼풋 나는 듯도 하다. 알코올의 역하거나 강한 느낌이 없어서 꿀떡 꿀떡 마실 수 있다. 17도면 그렇게 낮은 도수는 아닌데 너무 부드러워서 인가 약간 밍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41도, 53를 마시고 난 후에 마시는 17도는 맹물이 되는 마법을 경험하기도 했다.

​화요 25도는 17도에서 아쉬웠던 밍밍함이 보완된다. 확실히 쌀의 풍미도 향도 풍부해지고 맛도 깊어져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저렴하면서 깔끔하고 무난하게, 마실 수 있는 화요의 대표 상품이 아닌가 싶다.

​화요 41도는 41도라는 도수가 무색할 정도로 부드럽고 깔끔하다. 41도의 소주를 이렇게 스트레이트로 마시는데도 전혀 부담감이 없다는 데서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면 좋은 술은 도수가 세다고 술을 마실 때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독해지거나 부담스러워지는 게 아니라 높은 도수라 가능한 더 깊은 향과 맛을 풍기고 담아낸다. 기존에 한번 술집에서 토닉과 함께 마신 적이 있었는데 이 아까운 술을 왜 그렇게 마셨지 싶을 정도로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게 훨씬 훌륭한 술이다.

​화요 53도는 강렬하다. 입에서 화아아악 퍼지는 알코올기운이 다른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다. 많은 사람들이 바이주, 백주에 그 맛을 비교했는데 나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 역시 도수가 53도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53도를 풀어서 먹으면 더 맛있다며 한 40분 정도 에어링을 거친 잔을 건네받고 먹었는데 사래가 걸리고 말았다. 보통 위스키는 에어링을 거치면 쎄한 알코올 기운과 잡맛이 사라지고 순해졌기에 나는 더 순해졌을 맛을 기대하며 한 모금을 입안에 넣는데 이게 왠걸, 기존의 부드럽고 오일리한 느낌이 사라지고 오히려 맛이 더 쨍해지고 도수도 더 강해졌다.

​X.Premium은 프리미엄 화요 41도를 5년 이상 버번 위스키통에 숙성한 술이다. 무색의 다른 화요와 달리 호박색의 영롱한 빛깔을 선보인다. 버번 위스키 숙성 위스키는 보통 더 흐릿한 옅은 색인데에 비해 굉장히 진하다. 한 입 먹어보니 버번의 풍미와 함께 달콤한 바닐라 맛이 화사하게 입안을 감싼다. 소주이지만 숙성을 버번 캐스크에 함으로 소주라기보다는 확실히 위스키에 가까운 술이 되었다는 사실이 참 재밌다. 어쩔 수 없이 위스키가 최애 술인 내가 제일 맛있게 먹었던 술이기도 하다.

​화요를 먹는데 '술 파' 생각이 났다. 소주 예닐곱명을 함께 마시던 ‘술 파’ 셋은 아주 가끔 보긴 했지만 예전처럼 소주만 마시는 일은 없었다. 늘 누군가는 외국에 있어 잘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늘 이어져있던 사이였다. 하지만 우리 셋이 함께 만나는 건 이제 더욱 더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한 친구는 워킹맘이 되어 육아전쟁을 치르느라 고생 중이고 한 친구는 곧 남편을 따라 영국으로 이주하기 때문이다.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놀 수 있는 나는 분명 둘 다를 만나겠지만 셋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영국으로 떠나는 그녀의 송별회를 위해 우리 셋의 마지막 술자리를 할매집을 추억하며 화요 소주에 술국을 준비해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제 소주를 잘 못마시니 25도 정도가 적당할 거 같다. 아니 조금 욕심내어 41도를 마셔도 좋겠다. 눈물 콧물 쏙 빼놓을 만큼 재밌었던 대학시절 이야기를 하며 우리를 괴롭히는 새로운 두려움에 대한 얘기를 밤새도록 하고 싶다. 거친 희석식 소주를 마시며 거칠었던 20대의 우리를 지나 30대의 끝자락에 있는 우리는 부드럽지만 도수는 더 높아진 화요와 닮은 지금의 삶과 미래를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나누겠지.

Coin Marketplace

STEEM 0.31
TRX 0.11
JST 0.034
BTC 64852.72
ETH 3178.07
USDT 1.00
SBD 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