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류학자의 초록생 일기장] 언어와 민족의 동일시라는 환상

in #stimcity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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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nowflower




2011년 여름, 다람살라 맥그로드 간즈.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도르제는 약속 시각이 한 시간이나 지나도록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의 인터뷰 요청을 쿨하게 수락한 그였다. 약속을 잊은 것인지, 귀찮아서 안 오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오지 않으면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다람살라에서도 눈에 띄게 화려한 복장을 한 도르제가 터덜터덜 카페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커다란 목걸이를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안녕? 늦어서 미안.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갑자기 불러서 말이야. 매주 노래를 부르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든. 히말라야라는 바에서 매주 토요일 밤에 랩을 해. 나 꽤 인기 있다고! 너도 한번 와.


그는 제법 유창한 영어로 사과를 했다.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인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한다. 티베트 난민학교에서도 영어를 배우거니와, 외국인들로 가득 한 다람살라에서는 영어가 공용어 수준이다.

도르제는 1992년생 25살(2016년 시점)이다. 시닝에서 태어나 2008년에 혼자 다람살라에 왔다고 하니 당시에는 미성년자였던 셈이다. 시닝에서 네팔과의 국경도시인 장무까지 버스를 타고 와 비교적 쉽게 망명을 했다고 했다. 대부분 망명자가 그렇듯 네팔의 난민 수용소에서 몇 개월을 지낸 후, 다람살라에 다다랐다고 한다.

도르제가 다람살라에 온 이유는 남달랐다.


나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다람살라에 왔어. 인도는 자유로운 나라니까 무언가를 배우기에 정말 좋은 것 같아. 그리고 솔직히 부모님과 같이 살기가 싫었어. 혼자 살아가면서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했거든. 가끔 부모님이 보고 싶기는 하지만, 인터넷이 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떠나기 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졌는데 여자친구가 사는 시닝에 더 있을 수가 없더라고.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아서.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다람살라에 왔어.


이건 망명이 아니라 가출로 보였다. 많은 망명자가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다람살라에 온다고 하니 거의 유학 수준이다.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심한 중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단다. 수십 년 전에는 중국의 탄압에 못 이겨 망명한 티베트인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티베트에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의 돌파구로 다람살라를 찾는 이들이 늘었다고 했다.

망명 당시 미성년자였던 도르제는 다람살라 망명정부의 시스템대로 TCV(Tibetan Children's Village)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1주일 만에 학교를 자퇴했다. 그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에서 현재 다람살라 티베트 망명 사회에 만연한 갈등과 차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르제는 티베트어를 할 줄 모른다. 부모님이 티베트인이기는 했지만, 맞벌이를 하셨던 탓에 함께 있는 시간이 적었고, 시닝은 티베트인보다 중국인들이 더 많은 대도시이다. 한족 사회를 중심으로 굴러가는 대도시에서 도르제는 티베트어를 배우지 못했다. TCV의 많은 학생이 그런 도르제를 ‘제 나라 말도 못 하는 가짜 티베트인’으로 간주하며 선생님조차 ‘중국인’이라며 차별했다고 한다.


다람살라에서 태어난 티베트인들은 자기들이 진짜 티베트인인 줄 알아. 그들에게 티베트어를 못 하는 나는 가짜인 거야. 자기들은 정작 영어나 힌두어를 섞어 말하면서 말이야. 사실 걔네들 티베트어 말할 줄 알아도 쓸 줄은 몰라. 그러면서 나에게는 중국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 정작 티베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티베트에서 살다 이곳으로 넘어온 사람들에게 티베트 역사나 티베트어를 가르친다니 좀 웃기지 않니?


2005년 이후에 망명한 이들에 초점을 맞추어 인터뷰를 진행하며 다람살라의 티베트인들에게 무시 당하는 망명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표준어인 라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혹은 중국어를 섞어서 사용한다는 이유로 티베트땅에서 살아온 이들이 ‘진짜’ 티베트인이 아니라며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인도에서 태어난 난민 2, 3세들에 의해서 말이다.

한 논문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저자가 티베트 암도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티베트 여성과 거리를 걷던 중, 전 TCV 난민 학교 교장이었던 남성을 만나서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남성 : (라싸어) 암도에서 왔어요? 미국에는 공부하러 왔어요?

여성 : (이해를 못 하여 대답하지 못함)

남성 : (라싸어) 유학으로 여기에 온 건지 묻고 있어요.

여성 : (암도어) 뭐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저자 : (암도어) 미국에는 공부하러 왔는지 묻고 있어요.

여성 : (암도어) 아뇨, 남자친구 만나러 왔어요.

남성 : (라싸어) 정말 안타깝네요. 티베트 사람이 티베트어를 못 하다니.

저자 : (라싸어) 이 분은 지금 티베트어로 말하고 있는데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자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동일 언어를 구사하는 존재를 공동체의 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소위 '단일민족국가'라고 일컬어지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그렇게 배우며 자란 우리에게는 크게 이질적이지 않은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같은 언어와 민족을 기반으로 한다는 생각은 허상이다.

티베트는 현재 공식적인 국가가 아니다. 하지만, 중국의 지배를 받아 오면서 전 세계 티베트인을 국민으로 하는 '티베트국'이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티베트 민족주의는 점점 심화하고 있으며, 많은 근대국가가 그랬듯 언어와 문화를 표준화하고 있다.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가 문화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티베트인은 '중국화 된 티베트인'이라며 손가락질을 하거나 티베트의 전통문화가 사라지고 있다며 한탄한다.

티베트는 중국에 의해 정치적인 자유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를 향유하고 스스로 변화시킬 자유 또한 박탈당했다. 티베트 문화의 중심이 인도의 다람살라가 되어가고 있는 지금, 최근에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인(New Comer)들은 티베트 난민사회에서 타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다람살라에는 평생을 다른 지역에서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모여있다. 모두가 '티베트인'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지만, 완전히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 간의 갈등은 예견된 것이었을 테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상황을 당연하게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람살라에는 1960년대에 망명을 한 난민 1세들과 더불어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난민 2, 3세, 그리고 여전히 망명해 오는 새로운 난민이 공존하고 있다. 평생 티베트 땅을 밟아 본 적 없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티베트와 바깥 세상을 연결해주는 이들이 바로 새로운 난민들인 셈이다. 그들이 존재함으로써 티베트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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