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Pleochroism과 Panorama #1

in stimcity •  2 months ago




Pleochroism과 Panorama

+ Barcelona, Spain


[pleochroism, 多色性]
: 편광이 광물 결정을 통과할 때, 빛의 진동 방향에 따라 색이 변하는 성질.

 
‘pleochroism’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야겠습니다. 포스트모던, 다원주의 시대에 이와 같은 개념들은 자주 혼용 및 오용되어 사람들을 혼돈스럽게 하고, 심지어 공동체를 파괴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사전적 의미는 위와 같이 하나의 보석에서 나타나는 다색성(多色性)입니다. 한스와 가우디가 의도한 그대로입니다. 이 정의를 따르자면 우리는 일단 하나여야 합니다. ‘우린 하나’가 아니라 ‘하나인 우리’입니다. 하나가 먼저입니다. 그러려면 조각난 개체들을 모아 붙여서 하나로 만들어야 합니다. 통일된 본체를 만들기 위해 조각난 개체들은 이리저리 깎이고 다듬어져서 하나의 보석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래서 종교적 공동체는 하나의 보석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규범이 필요하고 율법이 필요합니다. 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녹아들 수 있어야 합니다. 개체는 사라지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자기 부정과 나아가 자아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작업을 요구받습니다. 형태는 십일조, 헌금, 봉사 등과 같은 저(低) 차원적 강요부터 이웃사랑, 공동체에 대한 절대적 헌신, 나아가 신과의 합일을 위한 매순간의 자기 포기 등, 인간으로서 가능할까 싶은, 매우 고차원적 형태의 자아 부정의 단계까지 요구되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로 모아진 에너지는 중세에는 성전(聖戰)을 치르기 위한 십자군으로, 현대에는 세계선교를 위한 헌신으로 귀결되곤 합니다. ‘pleochroism’, 한스와 가우디가 꿈꾼 ‘성가족’은 그런 자기부정의 그리스도교적 공동체였을까요?

 


밴드의 첫 앨범 쟈켓 디자인에 그것이 잘 드러나져 있어. 보석이 하나뿐이고 거기서 다양한 빛이 드러나는 형태를 구현하고 있지. 그리고 앨범 한 귀퉁이에 분명하게 쓰여져 있어 ‘다른, 하나’라고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첫 콘서트 포스터에는 여러 가지 보석들이 전체 면을 균등하게 분할하며 어우러져 있는 디자인으로 되어있어. 포스터는 ‘pleochroism’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보석들이 각자의 빛을 뿜어내며 어우러지는 보석들의 ‘panorama’를 형상화하고 있는 거야.
 
한스에게 물었지 “이거 누가 디자인했니?”.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하더군. 그렇겠지. 이건 ‘pleochroism’이 아니잖아. 다른 멤버가 담당했다고 하는데, 멤버 중의 일부는 ‘pleochroism’을 보석들의 ‘panorama’로 이해하고 있었던 거야. ‘다른, 하나’는 방점이 ‘다른’에 있는가, ‘하나’에 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개념이 되지. 간극은 이미 드러나져 있었어.

 
‘pleochroism’을 구현하려면 강력한 카리스마가 필요합니다. 일단 하나의 보석으로 녹아드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를 위해 여러 가지 규율들이 등장합니다. 연습시간, 일정한 양육(세공)의 과정(하나의 세계관에 멤버들의 생각을 일치시켜가는, 일종의 종교적 세뇌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는), 통일된 생활양식을 위한 스케줄표, 뭐 때에 따라서는 공동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멤버들의 생각과 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적당한 보상입니다. 기본적으로 공간이 제공되거나 식사가 제공되어야 하죠. 페이까지 동반되면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돈의 위력은 세거든요. 그런데 이 밴드 거기까지 가진 못했나 봅니다. 깨진 걸 보니..

 


음악 작업은 기본적으로 ‘pleochroism’적이라고 볼 수도 있어. 창작자나 프로듀서의 의지가 표현되어야 하니까. 다른 세션들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하지. 그런데 음악 작업 중에서도 밴드의 작업은 여기서 좀 더 확장되는 거야. 계속 한 사람의 ‘pleochroism’만 구현할 수는 없잖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처럼 그 한 사람이 너무 어마무시한 거장이라면 나머지 멤버들도 계속 따라가고 맞춰줄 수 있겠지만, 자기 음악의 꿈은 내려놓아야 하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서태지가 멤버로 베이스를 칠 수 없듯이 말이야. 그 밴드는 그냥 조용필의 ‘pleochroism’을 구현하면 되는 거야. ‘창밖의 여자’부터 ‘Hello’까지 말이야. 그런데 비틀스는 어땠니? 부활의 김태원과 이승철은? 천재들의 공동체.. 그건 정말 어려운 거야.

 
한스의 밴드는 밖에서 보기에도, 안에서 보기에도 ‘pleochroism’이 아닌 ‘panorama’를 구현하려는 밴드로 보였습니다. 사실 모든 무명 밴드들이 ‘panorama’를 명분으로 결성됩니다. ‘pleochroism’을 내세웠다간 당장 ‘얼마 줄건대?’하고 나올 테니 말이죠. 아니면 ‘미쳤냐? 내가 니 딱가리 하게’하고 쳐다보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일단 구라를 치고 보는 겁니다. ‘우리의 음악’을 하자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뭐, 네 음악도 하고, 내 음악도 하고 돌아가면서 하자는 거지.’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그 ‘우리’의 첫 번째 성과물이 뜨는 순간, ‘우리’는 ‘내’가 되는 겁니다. 그 순간 공동체는 정지되는 겁니다. 밴드의 첫 번째 성과물이 최종 성과물이 되는 겁니다.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만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밴드들은 자신들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계속 아무것도 안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pleochroism’이 구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밴드에 남아있을 멤버는 많지 않습니다. 그들을 꼬시려면 ‘우리 밴드는 멤버 각각의 ‘pleochroism’이 드러나도록 돕고 나아가, 그러한 음악들의 ‘panorama’를 구현하려고 해.’라고 구라를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한스의 밴드에서는 구라가 맞습니다. 한스는 ‘panorama’인 듯 호도하며 ‘pleochroism’이라고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멤버들은 ‘pleochroism’이라 쓰고 ‘panorama’로 포스터를 구성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결별은 예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첫 앨범은 예언이라도 하듯이 이별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절대 끝날 것 같지 않던 우리
너무 쉽게 끝이 났어.
특별하다 했던 우리 사이는
평범하게 끝났어
놀랍지도 않던 이별 이유에
우습게도 화가 났어
이젠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면
헤어져야 하겠지
 
니가 가도 괜찮은 걸까
이대로 끝이면
너도 나를 잊고
이대로 나를 잊을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시간이 지나면
너도 잊혀질 거야 희미해질 거라
나를 달래 본다.
 
시간이 가도 너 마음에 남아
나는 너를 볼 수도
아무렇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시간이 지나면
내가 잊혀질까 봐
희미해질까 봐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Pleochroism과 Panorama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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