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천재가 꿈꾼 공동체 #2

in stimcity •  2 months ago




천재가 꿈꾼 공동체 #2

+ Barcelona, Spain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진보적이고 포스트모던하기까지 한 예술성을 지녔던 가우디는, 정치적 입장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이었어. 아마도 그의 신앙 때문에 입장이 미묘하게 변화했던 것 같아. 진보적인 입장이었던 피카소는 심지어 가우디는 지옥에나 갔으면 좋겠다고 폭언을 하기도 했지.

 
스페인이 이념 갈등 속으로 침잠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신앙에 깊이 귀의한 가우디는 가톨릭의 입장에 서서 시대상황을 인식하였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인정할 수 없는 가우디와 주류 가톨릭세력은, ‘성가족 성당’을 건설함으로써 당시 사회주의가 유행을 하고 있던 카탈루냐 지역이 회개하고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바르셀로나는 가톨릭 보수 세력과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젊은 예술가들은 ‘교권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었고 가톨릭 보수 세력은 ‘성육예술원’이라는 보수단체를 만들어 대항하였습니다. 이 ‘성육예술원’은 ‘수업시간에 옷 벗은 여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며 누드화를 반대했고, 심지어 자유를 내세우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습니다.

 

가우디는 가톨릭 보수주의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가우디는 더 이상 젊지도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가난한 건축가였던 젊은 시절 가우디가 반교회주의자로 기성 문화를 비판했듯이, 카탈루냐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가톨릭 전통은 스페인 사회를 병들게 하는 주범이었다. 비판적인 젊은이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원로 예술가들은 성육 예술원이라는 보수단체를 만들었다.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보수적인 사회규범을 세우고 지키는데 모든 정력을 낭비했다.
 
첫 번째 규칙으로 내놓은 것이 수업 시간에 옷 벗는 여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술 시간에 더 이상 누드를 그리지 못하게 금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퇴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더 이상 타협할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가우디는 보수 집단의 우두머리 정도로 치부되었다. 아웃사이더가 권력 집단에 들어가 출세하면 기존 권력 집단보다 더 권력에 집착한다는 로마의 키케로를 닮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젊은이들의 관점에서 가우디는 키케로의 화신이었다. 가난한 건축가였던 가우디가 유명세를 타고 부유한 건축가가 된 순간 반교권 운동을 헌신짝처럼 벗어 던지고, 누구보다도 더 보수적인 가톨릭 옹호자로 변절했다고 여겼다. 
 
구엘 궁전을 짓고 있는 가우디를 비난하는 데 제일 앞장선 이가 젊은 천재화가 피카소였다. 성가족 대성당을 지으면서 출세한 가우디는 이제 가난한 서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속물쯤으로 비쳤다. 피카소는 성육예술원에 반대한 젊은 예술가 집단의 기수가 되었다. 젊은 시절 구엘 궁전 맞은편에 살면서 가우디의 상상력에 영감을 받기도 했지만, 거리에 나뒹구는 가난한 자를 외면하고 부자의 궁전만 짓고 있는 가우디를 속물이라 비난했다.
 
“만약 화가 오피소를 보거든 가우디와 성가족 성당을 모두 지옥으로 보내 달라고 해.” _ 피카소
 
_ 김희곤 <스페인은 가우디다> 中

 
피카소도 가우디도 모두 이해가 갑니다. 입장은 때로 자신과 상대의 신념과 진정성을 훼손합니다. 입장은 범위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정치적 입장이란,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지 않고 단순화하여 이분법적으로 정리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입장과 신념, 진정성 그리고 상대의 입장과 신념, 진정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장이 그의 전부라고 매도해 버리려고 합니다. 그게 쉽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걸 싫어하는 이념대결의 현장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도그마에 빠져들게 되는 거야.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강화하려다 보니까 상대를 흑백논리로 몰아붙이게 되는 거지. 그건 쉬워. 그냥 매도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상대를 매도하기 위해서 자기 스펙트럼도 흑백으로 한정지어 버리게 되지. 그게 안타까운 거야.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비슷한 면이 많았을 텐데 말이야. 자연은 곡선이라며, 창조세계의 본질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했던 가우디가 누드화를 혐오했다는 게 이해가 돼? 가우디가 정치적 입장을 보수화했다고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속물로 매도하는 건 또 합리적인 걸까? 그냥 패싸움 하는 거지 다들. 입장이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거야. 편하니까, 쉬우니까 말이야.

 
저마다 각기 다른 개성과 의견을 가지고 그것들이 소통되는 현장은 복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천 명이 모여 천 개의 의견을 가지고 싸워대니, 우리는 누구든 힘센 놈 하나가 일어서서 ‘짜장면으로 통일!’을 외쳐주었으면 하는 겁니다. 그러면 천재성은 사라집니다. 소수의 목소리는 숨어들고 억압되며, 천 명의 기호는 ‘짜장파’와 ‘짬뽕파’로 양분되고 제한될 뿐입니다. 그러면 ‘짬짜면’, ‘탕짬면’ 같은 창조성은 드러낼 공간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더 불행은 그것이 자기검열에 의해, 자신 안에서 발현될 기회를 상실 당한 채, 잠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가능성의 문이 닫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우디와 피카소의 콜라보레이션을 볼 기회를 박탈당했는지도 모릅니다. 누드화 때문에 말이죠. 기회를 박탈당한 천재성은 상처 입은 채 사람들 눈치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전체주의로 회귀하던 시절이였으니 가우디와 피카소에게서 그러한 여유로움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아쉬울 뿐입니다.

 


가우디에게서 아쉬운 점은 그거야. 겸손한 신앙의 한계에 갇히지 말고, 독립되어 있으나 하나인 삼위일체의 신비에까지 나아갔으면 어땠을까? 하나의 건물에 하나의 기둥으로서가 아니라 한없이 넓은 신의 대지 위에 펼쳐진, 개성이 넘치지만 통일성을 잃지 않은 여러 개의 건물로 성가족이 표현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교황을 정점으로 한 일체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카톨릭의 정신으로서는 한계가 있겠지만 말이야.

 
멀린은 사실 한스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상을 후대에 까지 펼쳐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상이, 각자의 이상이 발현 되어지고 어우러지는 공동체의 모습 말입니다. 자연이 제각각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지만, 결국 거대한 숲을 이루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종교인은 이 지점에서 입장을 강력하게 내세우지. 나의 이상이 아니라 신의 이상이라고 말이야. 신의 이상이 무엇인지 어찌 알겠어? 쟌다르크처럼 계시를 받았다고 한들, 자신이 이해한 신의 이상일뿐이지.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노라’한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해, 교황을 신의 대리인으로, 그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강요했던 것처럼 말이야.

 
한스의 밴드는 그들의 첫 앨범에 이러한 이상을 담았습니다. [pleochroism, 多色性] 이것이 첫 앨범의 컨셉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의 보석에서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빛깔입니까? 여러 개의 다양한 보석에 쏟아져 나오는 빛이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루는 빛의 파노라마입니까? 이 해석의 차이가 밴드의 갈등을 만들었습니다. 한스는 다섯 달란트 가진 이라 스스로 다양한 빛깔을 뿜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우디처럼 다른 보석들이 자신이 세운 밴드에 들어와 접붙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혼자 다 건축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몇 개의 기둥만 세울 테니 나머지는 너희들이 세워보렴. 그러나 판은 이미 가우디가 다 짜놓았습니다. 후대의 건축가들은 그 한계 안에서만 창조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잘해야 본전인, 가우디의 아류를 넘어설 수 없는, 그래서 가우디의 명성에 기대어 프로필을 만들어가려는 이들에게나 매력적인 작업입니다. 그러나 피카소는 절대 참여하지 않을 그런 작업입니다. 이런 것에 신의 의지를 턱 내세우면 신앙인은 할 말이 없어집니다. 신의 뜻이니 순종해야 할 뿐입니다. 하지만 비신앙인들은 ‘조까구 있네.’ 비웃으며 ‘그런 건 너 혼자 잘 해보셔.’ 하고 떠나갈 뿐입니다.

하나의 가지에서 벗어나 분리 개별화를 시작한 인류의 의식은, 이제 하나의 보석에 여러 빛깔이 아닌, 여러 개의 보석이 저마다 빛을 내고, 그 빛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파노라마를 구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주의적 구세대의 공동체는 폐쇄성에 도태되고, 새로운 의식에 적합한 공동체를 찾아 본체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져 나온 개체들이, 아직 유리방황하고 있는 과도기에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하나의 보석이어야 해. 하나의 빛을 제대로 내는 하나의 보석 말이야.

 
자신의 빛, 그것부터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이루려면 하나의 빛이면 충분합니다. 다섯 개의 빛을 낼 줄 아는 보석은 나머지 네 개의 보석을 밀어낼 테니 말입니다. 하나의 빛으로 충분합니다. 홀로 독야청청할 게 아니라면, 공동체를 이루고 싶은 보석은 하나의 빛이면 충분합니다.

 


가우디와 피카소의 갈등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야. 이념과 신념의 스펙트럼을 인정하지 못하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흑백논리로 패싸움을 해대는 일이 21세기인 지금도 비일비재하지. 가족제도나 사회구조는 매우 빠르게 분리 개별화되고 있는데, 인간의 인식은 아직 전체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나는 그래서 한스의 밴드를 매우 흥미롭게 지켜봤어.
 
‘ [pleochroism ?] 아니 이 어려운 개념을 너희들이 구현하겠다는 거야? 이야 대단한 걸!’ 했지. 그런데 아니나 달라, 음반을 내자마자 저마다 입장을 내세우며, 이리저리 편을 먹더니 서로 난타전을 벌이기 시작하는 거야. 어제의 편이 내일의 적이 되고, 그 사이를 비집고 입장을 이리저리 바꾸며 유리한 국면을 차지하려는 작태들이 난무했지. 음반을 준비할 때는 몰랐지. 매우 이상적인 컨셉을 꿈꾸며 자신들의 관계도 이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착각했던 거야. 막상 현실로 진입하니 음반을 내기 전에 숨겨놓았던 저마다의 유리한 입장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 뭐 그 뒤로는 어느 단체, 어느 회사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패싸움과 분열..
 
그래서 난 한스와 가우디가 아쉬웠어. 가우디가 후대와 소통할 게 아니라 당대의 피카소와 소통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의지조차 없었더라면 하나의 고독한 천재로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가능한 자신의 생애 안에, 자신만의 천재성으로, 성당을 완성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거면 성가족이 컨셉이 되지 않았겠지. 유럽에 그 흔한 성모마리아 성당, 성 요셉 성당처럼 하나의 대상에 집중했을 거야. 그런데 꿈이 너무 컸던 걸까? 아니 그래서 꿈꿨는지도 모르지. 흔하지 않은 ‘성가족’의 성당, 공동체적 결과물 말이야. 그런데 공동체를 말하기에는 가우디는 너무 외골수적 천재였어. 그가 그 이상을 구현하려면 피카소와 함께 할 수 있었어야 하는 거야. 당대와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후대와 소통할 수 있겠어. 후대와 소통한들 그건 천재에 대한 경의이고 천재의 아성에 기대인 것이지, 하나의 개체로서 다른 개체들과 더불어 전체의 하모니를 이루는 공동체의 신비적 소통은 아닌 것이지. 그는 그냥 고독한 천재일뿐이었지. ‘성가족’의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 천재적이었어.

 
멀린은 한스와 가우디에게 계속 아쉽습니다. 분리 개별화 시대의 공동체는 전체주의적 리더관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배려한들, 아무리 친절한들, 아무리 수용한들.. 리더가 먼저 하나의 개체가 되기 전에는 개체들과의 소통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기만의 이상을 가진, 짜여진 판을 가진 리더에게는, 아직 분리 개별화가 두려운, 종속적 개체들만 붙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싶은 개체들은 ‘내가 왜 당신 꿈의 일부가 되어야 해?’라며 그들을 배척하고, 기대했다 실망한 개체들은 피카소처럼 비난하며 떠나갑니다. 매우 어렵고 난해한 ‘pleochroism’. 한스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그러나 사명처럼 여전히 한스에게 남아있는 이 개념을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천재가 꿈꾼 공동체 #2

이전글 | 글목록 | 다음글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ort Order:  

잘보고 갑니다!
되돌아보게 만드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