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깔짝대지 않기를 바랄 뿐

in stimcity •  2 months ago




깔짝대지 않기를 바랄 뿐

+ Montségur, Provence


“왜 진정성으로 세워진 공동체들은 자꾸 소멸되는 걸까?”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사랑?”
 
“네 공동체의 완성은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공동체에 사랑이 부족하면 오래갈 수 없는 거 아닌가요?”
 
“그럼 너희 밴드는 사랑이 부족해서 깨어진 거야?”
 
“네? 음.. 그러니까..”

 
멀린은 선의로 세워진 공동체, 진정성을 기반으로 설립된 공동체들이 자꾸 소멸되는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의 몽세귀르를 향해 가면서, 이 첩첩산중 고지에서 초대교회와 같은 진정성을 가지고 정결하게 살려고 했던 공동체가 어찌하여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말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성령의 감동에 의한 공동체들이 계속 새로 태어났어. 우리가 아는 카톨릭과 종교개혁을 통한 주류 교회의 흐름 이외에, 서로 어떤 연결점도 없이 오로지 성령의 감동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생겨난 교회의 역사가 2천 년에 걸쳐 지속되고 있거든. 그런데 매번 생겨나고 소멸되고 생겨나고 소멸되기를 반복하지. 왜 그럴까? 오히려 경직되고 진정성이 부족해 보이는 시스템 종교는 수 천 년을 이어오고 있는 데 말이야. 마가의 다락방에 내린 성령의 역사도 결국 디아스포라로 흩어지고, 초대교회는 박해를 받는 중에는 흥하다가 공인된 이후에는 생명력을 잃어갔지.”
 
“공동체에 사랑이 없으면 그 생명력은 계속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구성원들이 최선을 다해서 서로 사랑하면 그 공동체는 계속 생명력을 유지해 갈 수 있지 않겠어요?”
 
“너는 그런 경험이 있니?”
 
“음.. 저희 와이프와도 그런 시간을 겪어냈죠. 지금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 하구두요.”
 
“어떻게 사랑했는데?”
 
“저희도 치열하게 대립하고 싸웠죠. 하지만 결국에는 마음을 모을 수가 있었어요.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럼, 너희 밴드 멤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나 보구나.”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알려줘도 듣지 않더라구요.”
 
“그건 네가 이해한 하나님의 음성이지, 본인들이 직접 들은 건 아니잖아?”
 
“자기들도 납득했다니까요. 그런데 결국에는 그대로 하지 않더라구요.”

 
한스는 순종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결국 신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순종하게 되고 그 공동체는 영원할 거라는..

 

“그럼, 너의 공동체에 속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겠네?”
 
“그래야죠.”
 
“그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알려주어야지. 너는 어떻게 듣게 되었니?”
 
“음.. 그러니까 저는 저절로 깨닫게 된 것 같아요.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라. 학창시절에 어느 날 성경책을 읽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그러면서 엄청 눈물이 쏟아지고.. 암튼 교회도 다니지 않고 있었던 때였는데 말이죠.”
 
“넌 저절로 깨달았구나. 은혜가 컸네.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은혜가 주어지는 건 아니잖아. 어쨌든 멤버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겠네. 네 말대로면 그래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렇죠. 그런데 어떻게 가르쳐 주죠?”

 
한스는 특별한 체험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신의 음성 들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방법을 알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한스에게 있어 신의 음성을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공동체 구성원의 조건이야. 그러니까 결국 치열한 갈등이 생겨날 때 그 판결을 신에게 가져가고, 신의 판단에 따라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건 그냥 쉬운 방법이야. 신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니까. 하지만 개인의 정서와 실수의 권리는 원천 차단 되거나 박탈되는 거지. 그런데 신의 뜻이 갈릴 때는 어떻게 하지. 서로 다른 신의 음성을 듣게 되면 누가 들은 신의 음성을 기준으로 하지? 이 지점에서 치열한 교리 논쟁이 시작되지. 이미 지난한 교회의 역사 속에 이러한 갈등이 수많은 교파들을 만들어 냈지.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제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만을 강요한 건 아니에요. 저도 멤버들이 아직 신앙이 어리고 미성숙해서 쉽게 순종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잘 알아요. 그래서 기다리고 배려해 왔죠.”
 
“그런데 왜 떠났을까?”
 
“그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저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에요? 자기가 싫다고 떠나는 데 제가 억지로 붙들 수는 없잖아요. 그건 제 책임이 아니잖아요. 저는 하나님이 공동체를 하라고 했으니까 공동체를 하면 되는 거예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다 가면 되죠.”

 


그들은 무엇이 싫어 떠났을까? 신의 음성을 따르는 게 싫었을까? 자신은 신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싫었을까? 아니면 너를 통해 들은 신의 음성을 신뢰하지 못했을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신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을까?

 
한스의 공동체에서 멤버들은 다루어져야 합니다. 신의 음성을 따라, 한스가 따르는 절대성을 따라.. 신의 음성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신의 음성은 본인에게 유효한 것입니다. 프랑스를 구하고 왕을 세우라는 계시는 쟌다르크에게 유효한 것이고, 섬에 수도원을 세우라는 계시는 오베르 주교에게 유효한 것입니다. 공동체는 한스의 이상이자 한스가 받은 계시일 뿐, 그 계시와 꿈에 동참하는 멤버들은 동상이몽(同床異夢)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의도와 목표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본인조차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한스가 이해하는 신의 성품은 책임과 의무, 순종과 헌신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 사람들은 성향에 따라 저마다 신의 성격을 규정짓지. 한없이 따뜻하거나, 한없이 엄격하거나, 한없이 자애롭거나, 한없이 무정하기도 하지. 그건 모두 신의 한 면일 뿐인 거야. 그러나 내가 구성하고 있지 못한 신의 캐릭터는 부정하고 싶어지지. 당황스럽고 배척하고 싶어져. 그런데 중요한 건 신은 인격(人格)이 아니라는 거야. 신이 어떻게 인격일 수가 있겠어. 인격은 인간의 것이지. 신에게는 인격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무한히 넘어서는 신격(神格)이 있는 거지. 그래야 신이지.

 
언젠가 멀린은 한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지 말고, ‘직관’이라고 표현을 바꿔보면 어떻겠냐고 권고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해한 신의 뜻이 상대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닐 수 있으니, 겸손한 표현으로 ‘직관’이라고 바꿔 말해보는 것도 생각해 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직관’은 신의 음성을 넘어서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좀 더 개인적이거나 좀 더 우주적일 수 있습니다.

 


신을 인격화(人格化) 하면 개인이 가진 인간에 대한 이해에 갇히게 돼.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래야지’라는 인간의 도덕률, 윤리관에 신을 끼워 맞추게 되는 거야. 그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것도 ‘신의 뜻’일 수가 없지. 게다가 그걸,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도 적용하지. 대표적인 게 ‘예수천당, 불신지옥’ 아니겠어?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야. 신을 인격으로 섬기는 신도라면 그가 믿는 인격으로서의 신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한스가 이해한 신의 인격이 헌신과 순종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걸 요구해야 한다는 거야. 기독교인에게 신은 하나뿐이니까, 그 신이 내게 명한대로 다른 사람에게도 명해야 하는 거지. 순종하라고 말이야. 그것이 인격 신의 모습이지. 자신은 천국 가려고 충성과 헌신을 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은 선택하든지 말든지 하는 것은, 신의 뜻을 따르는 자의 태도가 아니지. 다른 사람도 신의 뜻을 따라야 천국에 갈 테니, 그들에게 선택권은 없는 거야.

 
음.. 무슨 소립니까 멀린? 그럼 줘 패서라도 떠나간 멤버들을 데려와서, 신의 뜻에 순종시켜야 한다는 말입니까?

 


잘 아네.. 당연한 거 아니야. 자신은 이미 천국행의 조건을 공동체에 대한 순종과 헌신으로 여기고 있으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동료들이 그냥 지옥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자기 선택이지..’할 수가 있어. 그건 한스가 믿는 신의 모습이 아니잖아. 그럴 거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무슨 소용이 있어. 그냥 다들 죄지은 만큼 형벌받고 지옥 가면 그만이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라면 그에게 맡겨진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처럼 목숨을 다하도록 책임질 수 있어야지. 친구를 위하여 목숨 버리면 이보다 큰 사랑이 없다고 한 예수의 말씀처럼 말이야. 그들을 떠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어야지. 지옥 갈 텐데 그냥 둔단 말이야? 신의 뜻을 따르지 않아 인생이 망가질 텐데, 그냥 쌤통이다 보고만 있겠단 말이야? 심지어 순종하지 않아 인생이 망가질 거라고 저주를 퍼붓고 있겠단 말이냐구. 당장 가서 머리채를 잡고서라도 데리고 와야지. 포기하지 말고 말이야. 그게 사랑 아니야? 기독교가 말하는 인격 신의 의지는 그런 게 아니냐구?

 
멀린은 종교의 독선과 폭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우디의 절대성, 기독교의 절대성은 ‘성가족’의 이상을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에는 무한의 책임이 동반됩니다. 목숨을 내어 주는 헌신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었고, 그런 헌신을 바탕으로 기독교가 확장되고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상은 오히려 종교의 폭력이 아니라 책임회피로 변질될 때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절대성과 다양성은 하나로 뭉뚱그려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절대성에는 책임이 따르고 다양성에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지. 그래서 절대성은 자유도가 떨어지고 다양성은 책임감이 약해지는 거야. 그것은 십자가의 가로축과 세로축처럼 오로지 한 지점에서만 만날 수 있어. 그 둘이 만날 때 기적이 일어나고 혁명이 이루어지지만, 외부의 충격과 내부의 갈등이 심해지면 가로축과 세로축 중 어느 한쪽은 반드시 부러지게 되는 거야. 그리고 역사는 한 축으로 흘러가다 다시 뒤집어지고, 또 뒤집어지고 하는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며 진화해 가는 거야. 하지만 그것을 관장하는 것은 신의 몫이고 우주의 몫이지. 우리는 그중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제 몫을 감당해 가면 되는 거야.
 
한스의 신은 절대성의 신이지. 그는 이미 절대성의 자리에 앉아서 ‘pleochroism’을 구현해 가려고 하고 있어. 그러려면 뭐가 필요할까? 자유가 아니라 책임이지. 철저한 책임이 선행되어야지. 멤버들의 필요에 대한 책임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전까지.. 자유를 제한하고 절대성 안에 구속시키려면 그것은 선행되어야 해. 책임져 주지 않는데 누가 자신의 자유를 제한당하면서까지 공동체에 구속되려고 하겠어. 그런데 절대성을 외치는 리더가 책임에 자신이 없을 때, 절대성의 공동체에 자유가 스며들지. 아니 그건 오히려 리더에 의해 선포되거나 방조 돼. ‘배려’라는 가면으로 포장된 채 말이야. 멤버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으려니 ‘그래 알바하느라 늦는 건 인정해 줄게’, 멤버들의 진로를 책임질 수 없으니 ‘뭐 필요하면 직장이랑 병행해도 돼.’하게 되는 거야. ‘힘들겠다 어쩌니..’ 걱정해주는 듯하지만, 그런 걸 원해서 이 공동체에 들어온 게 아니었잖아. 자신의 자유를 제한당하면서까지 절대성의 공동체에 들어온 건 책임져주기를 바라기 때문인 거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해서 결혼했는데 ‘너도 좀 너 먹을 건 벌지 그래?’ 하면 그 결혼이 유지가 되겠냐고. 그런데 오히려 리더들에 의해 절대성에 물타기가 자행되지. 그럼 썩는 거야. 절대성의 세로축이 썩어가는 거야. 그러다 멤버들의 자율 보장을 요구하는 가로축의 일격을 맞으면 ‘동강’하고 공동체가 부러지는 거야.

 
이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얘기라 멀린의 말이 구차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너무 당연한 일들이 너무 당연하게 매번 반복됩니다. 공동체의 비전과 방향성을 명확히 하지 않고 그때그때 유리한 국면을 따라 왔다갔다 하다 보면, 십자가는 자꾸 부러지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안타깝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시행착오로 허비하고 있는 것 같아 말입니다.

 


많은 팀과 공동체들이 이 절대성과 다양성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반복하고 있어. 나는 절대성과 다양성의 균형을 맞추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 균형은 일회적일 수밖에 없어. 인간은 차든지 덥든지 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러니 절대성의 공동체는 철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노조 따위 허락지 않겠다는 회사는 직원들이 찍소리 못할 만큼 보수를 주고 복지를 제공하면 되는 거야. 월급은 못 준다 각자 일한만큼 가져가라는 회사는 아무런 강제도 할 수 없는 거야. 출퇴근 시간을 강요할 수 없고 근무태도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수 없는 거지. 오직 실적으로만 얘기해야 하는 거야.
 
이런 조직들은 그 경계가 너무 분명한데 밴드는 경계가 제멋대로야. 절대성과 다양성이 각자의 상황에 따라 왔다갔다 하고 그래서 늘 언제나 해체의 위기에 놓여있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야, 조용필의 절대성에 따라 관리되고 또 그 수준에 맞는 명성과 보수로 보상을 받으면 그뿐이지만. 인디밴드는 절대성을 강조할 수가 없어. 누가 책임지는데? 그냥 서로 좋아서 만나, 좋은 만큼만 유지되다 또 해체되거나 재결성하거나를 반복하는 거지. 요즘은 다양성의 문화가 많이 정착이 되어서 ‘따로 또 같이’ 활동하기도 하더군. 밴드를 해체하지는 않지만 솔로 활동을 병행한다거나, 프로젝트 팀으로 한시적으로만 밴드활동을 하기도 하지.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직과 단체는 ‘생존’이라는 절대성을 기본적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연대는 제한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 주도권을 ‘생존’이라는 절대성이 좌지우지하지. 그런데 밴드가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이건 뭐 일단 절대성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해당 종교가 가진 윤리관, 가치관, 철학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더 어려운 조합이지.

 
멀린은 그래서 한스의 밴드는 천상 절대성을 추구하는 밴드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밴드에서 어설픈 다양성은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적 갈등을 (실은 성향적 갈등일 뿐인) 야기하고 말 테니까요. 그러려면 리더인 한스는 천재이거나 갑부여야 합니다. 또는 리더가 카리스마가 넘쳐서 리더의 말이 신의 음성처럼 들리지 않는 이상, 이런 배경의 밴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한스는 카리스마가 너무 없어. 아니 카리스마를 사용하는 법을 다 까먹은 것 같아. 노래할 때 보면 언뜻언뜻 보이는 데 말이야. 영 시원하게 터져 나오질 않아.

 
멀린은 안타깝습니다. 한스가 자신의 카리스마를 작렬시켜 절대성의 밴드를 완성시켜 가는 모습을 보고 싶건만, 그리고 기대컨대 한 발짝 더 나아가 비록 일회적이라도, 다양성의 가로축과 만나 빛의 ‘Panorama’를 무지개처럼 구현하는 모습을 보고 싶건만, 이대로라면 절대성과 다양성을 그때그때 유리한 대로 왔다 갔다 하다 결성과 해체를 반복하는, 흔한, 말만 그럴 듯한, 어설픈 인디밴드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기회가 있어. 한스는 이제 첫 시련을 겪었을 뿐이니까. 여기서 다시 방향성을 잘 회복할 수 있다면 빛의 ‘Panorama’까지는 아니어도 한스의 ‘pleochroism’은 기대해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려면 절대성에 더 집중해야 할 텐데 말이야. 가우디처럼 자신의 천재성을 더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할 텐데.. 사랑과 배려, 어쩌구저쩌구 핑계 대면서 뒤에서 깔짝대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적당히.. 음악 활동은 액서서리로다가.. 하는 척하면서.. 부족한 존재감은 교회 사역을 한다는 핑계로 채워가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시련’이라는 신의 은총이 없다면 버티기에 불과한 삶이지만, 어케 잘도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작자였다면 마법사의 눈에 대번에 들켰을 테고, 마법사는 가차 없이 그와의 연결을 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스에게는 절대성을 향한 열정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타닥타닥 곧 꺼져 갈 듯하긴 하지만, 훅훅 잘 불어대면 화르륵 타오를 열기를 멀린은 느끼고 있습니다.

 
다양성의 시대에 절대성은 가치를 잃은 듯 보이지만 우주의 균형감은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친 시소를 놓아두지 않습니다. 다양성, 상대성이 교리처럼 되어버린 이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곧 우주의 균형을 위한 절대성의 파도가 몰아칠 테고, 그것은 아마도 교회 공동체가 간절히 염원하던 새벽이슬 같은 젊은이들의 거대한 물결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일어난 절대성의 파도는 실은 다양성의 기초를 만들어 줍니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에서 단단한 줄기들이 뻗어나듯 말입니다. 본체로부터 뻗어 나오지 않은 다양성은 불꽃놀이처럼 화려하지만 곧 사그러 들고 맙니다. 그러나 절대성을 딛고 피어난 다양성은 생명력을 잃지 않고 펼쳐지고 뻗어나가 새로운 숲을 이룹니다. 르네상스가 종교의 절대성에 대한 반발로 피어났듯, 포스트모던(postmordern)이 모던(modern)으로부터 솟아났듯 말입니다. 어둠은 빛으로부터 나오고 천사가 없이는 악마가 존재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한스에게서 회복 되어져야 할 에너지, ‘절대성’을 쫓았던 순교 공동체 ‘카타리’ 파의 흔적을 찾아 멀린과 일행은 프랑스의 몽세귀르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스타게이트’의 그 지점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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