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스페인은 시에스타 중

in stimcity •  6 months ago




스페인은 시에스타 중

+ Madrid, Spain



정말 뜨거워. 아직 여름은 시작도 안 했는데, 햇볕이 뜨거워서 서 있기가 힘들 정도야. 그래도 습도는 높지 않아서 그늘에 있으면 시원하기는 하네. 이러니 시에스타를 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늘로 숨어들어가야지.

 
오후 2시에서 4시, 길게는 1시에서 5시까지, 스페인은 한밤중처럼 정적에 빠져듭니다.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사방천지가 환하게 밝은 데, 거리는 오히려 칠흑 같은 침묵에 빠져듭니다. 상점들도 대부분 문을 닫고 사라집니다. 대도시에는 관광객들만 드문드문 걸어 다니고, 중소도시는 유령도시처럼 인기척이 사라집니다.

 


어디로들 사라지는지 모르겠어. 정말 다들 집에 들어가서 자나? 보통 이 시간에 긴 점심 식사를 한다고 하던데.. 암튼 시에스타 때문에 하루를 이틀로 나눠 쓰는 느낌이야. 그렇다고 잃어버린 낮 시간을 보충하느라 늦은 밤까지 일과가 이어지는 것 같지도 않아. 인터넷에는 새벽까지 사람들이 활동한다고 하던데, 막상 현지에 와보니 오히려 한국보다도 야간 활동이 긴 것 같지 않더라구.

 
시에스타가 끝나면 스페인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여기저기서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저녁을 먹고 남은 활동을 하느라 도시가 활발해집니다. 그러나 이것도 자정 무렵이 되기 전에 대부분 끝이나고 다시 밤의 정적으로 사그러듭니다.

 


하루를 매우 압축적으로 사는 것 같아. 놀 때 놀고, 쉴 때 쉰다는 느낌이랄까? 남유럽하면 느긋하고 낙천적일것만 같은데, 오히려 효율적인 삶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해. 깨어있을 때는 바짝 열정적인데, 아쉬움을 남기지 않고 충분히 즐긴 듯 또 금방 휴식에 빠져들거든..

 
무언가 길어진다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꾸 미련이 남아 시간을 질질 끌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스페인의 시에스타는 하루의 중간을 뚝 잘라 버림으로써, 남은 시간을 압축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활동의 시간이 짧으니,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는 게 시간이어서 축축 늘어질 수는 없으니까요. 자연스럽게 순간순간의 집중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있을 때는 깨어 있는 대로, 잠을 잘 때는 자는 대로..

 


그에 비해, 우리 사회는 하루가 매우 길지. 새벽같이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한다고 하지만,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런 작업은 만족감이 없어. 화장실 갔다 그냥 나온 듯, 무언가 미진하단 말이야. 퇴근 이후 이어지는 회식도 그런 면이 있지. 뭐가 자꾸 아쉬우니까 2차, 3차 가는 거 아냐? 자꾸 아쉬워, 뭔가 미진해. 일도, 휴식도 말이야. 그런데 그게 습관이란 말이지. 축축 늘어지는 방식으로 시간을 사용하는 거 말이야. 습도가 높아서 그런가? 그게 습관이 들면 집중하는 법을 잃어버려. 약간 멍한 상태에서 정보가 스윽스윽 지나가는 거야. 제대로 캐치는 안되고, 어디선가 들은 듯한 설익은 정보와 이해들만 얕게 깔려 지나가는 거지. 음.. 뭐랄까? 유행을 타기에는 아주 좋은 컨디션이야. 대세 흘러가는 대로 쓸려 다니면 되니까. 하지만 주관을 가지기에는 매우 열악한 환경이지. 자신만의 집중된 결과물을 가지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어.

 
부유하듯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자신만의 푯대와 동력이 없이 부표에 매달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인생 말이죠. 선택과 결정의 스트레스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습관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결정 장애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주도적으로 선택과 결정을 하려면 일단 집중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태를 파악하고 나의 상황을 인식하여, 궁극적인 방향과 비교하며 스텝을 선택해 가야 하니까요. 그러나 부유하는 사람은, 사태를 파악할 필요도, 나의 상황을 인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은 넓고 뭐든 될 테니까 말이죠. 너무 넓어서 문제입니다. 시간이 남아돌아 문제입니다.

 


스페인의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두 배가 넘고, 인구는 남한만 하지. 그러니 인구밀도로 따지면 1/4 밖에 안 되는 데 말이야. 우리가 더 널널하게 사는 것 같아.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아니 긴장감이라고 표현하기보다 집중력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긴장도는 오히려 우리 사회가 더 높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유하는 인생은 말이죠. 어디로 떠밀려 갈지, 어디서 폭풍을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집중력은 약한데 긴장도는 높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전, 후 좌우의 인생들과 비교하여 좌표를 설정합니다. 둥둥 떠 있으니 방위도 진행 방향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 지수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산세가 험하고 평지가 적은 탓일까요?

 


그러게 국토의 문제일까? 스페인의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보자면 그럴 듯도 해. 어디로 가든 내가 가는 길이 길이 될 테니까. 하지만 험준 산맥으로 구성된 우리 국토의 구조에서는 눈앞의 이 산과 저 산, 이 강과 저 개울을 기준으로 자신의 위치와 방위를 설정할 수밖에 없지. 이렇게 대평원들을 조망하며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이가 있을 거야. 그런 면에서 보자면 스페인은 아직 자신들의 저력을 충분히 사용하고 있지 못한 것 같아. 아니 굳이 하고 있지 않은 듯도 보여. 마치 가나안 땅을 연상시키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국토를 가지고, 게다가 스페인어를 쓰는 인구가 얼마나 많아. 기독교, 이슬람의 전통이 함께 살아있고, 각 지역의 특색 또한 전혀 다른 나라들처럼 다채로우니 말이야.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엄청난 발전을 이루겠어.

 
마음만 먹으면 스페인..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700년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땅을 도로 찾아오기도 했고, 아메리카 땅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무적함대를 위시로 한 해상왕국,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세르반테스는 물론 피카소, 달리, 후안미로에, 가우디까지 엄청난 문화유산을 가진 나라이기도 하지요. 최근 세계 금융위기로 경제가 휘청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3%대 성장률을 유지하는 유럽의 5번째 강국입니다. 세계 14위의 경제규모를 가졌으며, 세계 2위의 관광대국이기도 합니다. 또한 스페인어는 세계 30개국, 5억 명이 사용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용 인구가 많은 언어이기도 합니다.

 


마치 곳간을 가득 채워 놓은 부자가 함부로 나서지 않고, 매우 효율적으로 인생을 유유자적하는 듯 보여. 스페인,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세계 초강대국으로 치고 올라오지 않을까.. 싶지만 ‘뭐 꼭 그래야 돼?’ 하는 것도 같아. ‘지금도 좋은 데 뭐.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조심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신중하다고 해야 할까요? 시에스타에 들어간 듯 보이는 스페인. 그런 스페인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면 스페인의 현대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국주의가 시작되던 시절, 스페인은 정말 잘 나갔습니다.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와 함께 레콩키스타(reconquista)를 마치고, 통일 스페인 왕국을 건설한 이사벨 여왕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콜럼버스의 모험을 전폭적으로 지원합니다. 그 결과는 인도 대신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거대한 식민지로 돌아왔고, 무적함대와 함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하게 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거친 혼란이 유럽 전역을 휩쓰는 와중에도, 스페인은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요한, 로욜라의 예수회 등 개혁가들의 노력으로 가톨릭교회 내부의 자정력을 발휘하여 종교전쟁의 혼란에서 비켜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가 근대화에 진입한 시점까지 길게 이어진 스페인의 전성시대는 도리어 변화의 동력을 잃어버리고 구태의연해졌습니다. 정치적 혼란 상태가 반복되고 결국 내전 상태에 돌입한 스페인은, 파시스트 프랑코에 의해 나라의 통치권을 빼앗기고, 40여 년 간의 장기 독재체제에 진입하게 됩니다.

 


스페인 내전은 우리의 6.25처럼 이념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어. 당시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5만 명이 넘는 공화주의자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이 반파시즘 연대인 ‘국제 여단’에 합류하여 파시스트들과 전쟁을 벌였지. 피카소, 조지오웰, 앙드레 말로, 헤밍웨이, 생떽쥐베리, 로버트 카파 등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 내전을 지켜보고, 이 ‘국제 여단’에 합류해 왔지. 프랑코는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어. 그러나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방세계는 이 국제 여단에 소련이 지원을 하는 것을 보고,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염려하여 지원을 하지 않았어. 결국 프랑코의 파시스트 세력에게 스페인이 점령당하고, 이에 힘을 입은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 파시스트 연대는 2차 세계대전이 일으키지. 서방세계의 뼈아픈 실수였어.

 
이 후 스페인에는 프랑코의 잔인한 독재통치가 펼쳐집니다. 프랑코는 특히 좌파 반체제 인사들에 대하여 히틀러식 우생학을 끌어다 탄압하였는데, ‘열등한 유전자로 인해 빨갱이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회에서 정화시킨다는 목적으로, 공화파 여성 포로들을 강간하고, 태어난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격리시키는 등의 만행을 자행했으며, 이에 동조한 기득권 가톨릭 세력들은 조직적으로 반체제 인사들의 자녀들을 납치하여, 고아원에 보내거나 입양시키면서 고아 장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암흑시대가 펼쳐진 거지. 스페인은 어쩌면 세계사의 리듬과는 반대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유럽 대륙이 중세 암흑시대를 거치는 동안, 오히려 스페인은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며 대대적인 문화교류가 일어났고, 종교개혁으로 인한 혼돈 속에서는 오히려 가톨릭을 강화하며 국론을 통합시켰지. 아울러 대항해시대를 열며 초강대국으로 등장했으나, 다른 나라들이 산업혁명을 거치며 근대화를 이루는 동안 뒤처져 있었고, 유럽에서 가장 빨리 좌파정권을 수립하는 듯했으나, 파시스트에게 제압당하여, 다른 서방세계가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정치 경제적 성장을 이루는 동안 암흑시대를 맞이해야 했어. 그리고 지금까지 그 파시즘 정권의 역사와 잔재가 청산되지 못하고 아직 잠들어 있는 거야.

 
그럼에도 이 정도까지 성장해 온 걸 보면 스페인의 숨은 저력이 대단하긴 한가 봅니다. 스페인은 아직 지난 파시즘 정권의 유산들이 정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정치체제 역시 시민들의 자발적인 혁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프랑코의 후계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개인적 의지에 의해 안정을 찾은 것입니다.

 


그래 숨돌리고 있는 거지. 세계사의 흐름과 반대로 움직여 왔으니 스페인, 어쩌면 세계가 위기에 빠졌을 때 돌연 비상하며 떠오를지도 모르지. 지금은 일단 휴식, 시에스타에 들어 간 거야. 잠에서 깨어나면 스페인, 매우 압축적으로 떠오를지도 몰라.

 
부유하는 자는, 눈앞의 유불리만 따지며 이리저리 왔다갔다 합니다. 그러나 높은 시선으로 멀리 보는 자는, 큰 위기와 오랜 시련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자신의 길을 나아갑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세계사 속에 굵직한 흐름을 스스로 만들어 왔던 스페인은, 적어도 의존적이거나 시류에 흔들리며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나라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700년에 걸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감행한 신대륙 발견, 인류 역사의 유례가 없는 전 세계인들로 구성된 자발적 군사 연대 ‘국제 여단’을 모은 힘, 하다못해 독재자까지 누구에 의해 축출되지 않고 스스로 권위를 이양하고, 이를 이양 받은 후계자는 독재를 이어가지 않고 나름의 민주주의를 확립해 간 역사. 이해가 갈 듯 가지 않을 듯 신비롭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의존되지 않은 스스로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국제사회는 앞으로 스페인을 주목해서 지켜봐야 할 거야. 이 잠든 거인이 언제 불현듯 일어나 돈키호테처럼 국제사회를 향해 진격할지 모르니 말이야. 다만 그것이 소설 속 돈키호테처럼 너무 늦어 웃음거리가 되거나, 독재자 프랑코처럼 일방적이고 폭력적이지 않기를 바라야지.

 
시에스타 중인 나라 스페인. 해가 지지 않던 나라 스페인은 다시 해가 떠오른 줄도 모르고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스페인은 시에스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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