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미쳐 살다 정신이 들어 죽기 전에

in stimcity •  2 months ago




미쳐 살다 정신이 들어 죽기 전에

+ Consuegra, Spain



톨레도에서 좀 더 아래로 내려가면 라만차의 대평원이 펼쳐지고, 평원 중앙에 풍차마을 ‘콘수에그라(Consuegra)’가 나옵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돈키호테가 거인인 줄 알고 돌격했던 그 풍차 말입니다. 언덕 위에 늘어선 11개의 풍차, 대 평원 멀리서 보면 거인 같아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가까이 다가서도 풍차인 줄 알았을 텐데, 돈키호테는 정말 미쳤던 걸까요?

 


미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쉰 살 남짓한 나이가 되도록, 별다른 모험도, 도전도 없이, 기사들의 무용담이 적힌 책들만 탐독하며 살아가다 마침내 폭발해 버린 거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하고 말이지. 그래서 그것이 환상이든, 가상현실이든 시작해야 했던 거지. 인생의 남은 분량의 모험 말이야.

 
누구나 일정 분량의 고통과 일정 분량의 행복, 일정 분량의 도전을 타고 태어나는 법입니다. 다만 그 크기는 사람마다 상대적일 수는 있으나, 사람은 모두 타고난 분량의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미리 끌어다 쓰기도 하고, 계속 사용하지 못한 채 미루어두었다, 다 늙어서 젊어서도 하지 않던 모험을 떠나기도 합니다. 라만차의 시골 귀족 ‘아론소 기하노(돈키호테)’ 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우스꽝스러워지는 거야. 풍차를 결투의 상대로 삼아야 하고, 양 떼들을 병사로, 멀쩡한 사람들을 적으로, 시골 처녀를 귀족 처녀로 삼으며 모험을 이어가야 하지. 매번 흠씬 두들겨 맞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며, 온갖 수난을 당하고 말지만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그래야 하는 거야. 그래야 자기 인생의 남은 모험의 에너지를 소진할 수 있거든. 아니 여태 사용하지 않던 에너지가 억압되고 억눌리다, 어느 날 매우 비현실적인 상황과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발현하게 되는 거지.

 
그런 예는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오던 사람이 갑자기 도박에 빠져든다던가, 성욕을 통제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이상한 짓을 한다던가, 다 늙어서 되도 않는 사업을 시작한다던가 하는.. 매우 착실하던 그들이 말입니다.

 


뭐 어쩌겠어. 본인은 그렇게라도 인생의 숙제를 마쳐야지. 젊어서 했으면 좋았잖아.

 

Soñar lo imposible soñar.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Vencer al invicto rival,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Sufrir el dolor insufrible,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Morir por un noble ideal.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Saber enmendar el error,
잘못을 고칠 줄 알며,
Amar con pureza y bondad.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Querer, en un sueño imposible,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Con fe, una estrella alcanzar.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_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中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설 <돈키호테>의 매우 멋진 표현입니다만, 젊어서 하면 어디 덧날까요? 인생의 말년에 갑작스레 시작한 도전은 ‘돈키호테’ 못지않게 황당하고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은 자기 인생의 숙제를 하느라 그런다지만 이를 지켜보는 이웃들, 특히 피해를 함께 감당해야 할 가족들은 아주 죽을 맛입니다.

 

이 착한 양반이 순진한 엉터리 소리를 해서 미친 것 같아 보이지만, 다른 일을 말하는 걸 보면 아주 기막히게 논리 정연하고, 무엇에든 온건하고 밝은 지혜를 가진 것 같거든요.
 
_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中

 
소설 속 신부의 말처럼 돈키호테는 미친 척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뒤늦게라도 자신의 남은 환상 에너지를 소진하려면 미친 척하지 않고서야 시작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자신이 슈퍼맨이라며 보자기 뒤집어쓰고 담장에서 뛰어내리는 쉰 살이 넘은 사내가, 어찌 멀쩡한 사람인 척 할 수 있겠습니까. 어려서 할 짓을 다 늙어 하려니 미친 척은 필수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 환경과 사람들의 시선에 묶여서 아무 도전도 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깨달음이 밀려오면 그때에는 멈출 수가 없게 돼. ‘아,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가..’ 그때에는 하지 않을 수가 없지. 현실에서 나와 환상 속으로 강제 편입되는 거야. 젊어서의 도전은 환상을 현실로 가져오는 일이지만, 뒤늦은 도전은 환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 정신을 잃게 되는 거야.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이렇게 부르지. ‘이런 노망난 늙은이 같으니라구.’ 요즘 치매환자들이 많아지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의 과정에서 사용되었어야 할 도전의 에너지, 환상의 뇌가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가 변형되어 버린 게 아닐까? 뒤늦게 환상 속으로 들어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누구세요?’하게 되는 게 아닐까?

 
치매가 사용되지 못한 도전의 에너지와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뤄 놓았던 기사로서의 삶을 뒤늦게 시작한 돈키호테의 모습은 현대의 치매 증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작가 세르반테스는 어쩌면 이런 점을 풍자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매우 도전적이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인생이야말로 매우 고단한 인생이자, 모험이 넘치는 인생이었어.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젊어서는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가 왼손에 총상을 입고는 평생 왼손을 사용하지 못했지. 그래서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어. 심지어 그러고도 5년이나 더 복무하면서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대. 그러다 28세 때인 1575년, 전역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향하는 전역선에 올라탔는데, 이 배가 출항 엿새 만에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졸지에 해적의 포로가 되어 버리게 되. 해적들이 요구한 몸값을 가난한 세르반테스의 가족들은 감당할 수 없었지. 세르반테스는 네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해. 그때마다 해적들의 혹독한 처벌이 가해졌지. 결국 한 수도회의 도움으로 간신히 마련한 몸값을 지불하고, 5년 만에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지만 조국으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대우도 받지 못했지.

 
세르반테스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후 37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결혼하게 된 세르반테스는 공직으로 진출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생계가 막막한 세르반테스는 시와 희곡, 소설 등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1585년에 발표한 첫 번째 소설 <라 갈라테아>가 호평을 받기는 했으나 큰 명성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말단 관리로 채용이 되어 10여 년 동안 물자 조달관, 세금 징수관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러 번 비리 혐의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의 명작 <돈키호테>는 감옥살이 중에 구상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의 고단한 인생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57세 때인 1605년, 드디어 <돈키호테>가 출간되어 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생활고로 출판업자에게 판권을 넘겨버린 탓에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세르반테스는 아내와 딸, 그리고 여동생 둘과 조카까지 다섯 명의 가족을 부양해야 했어. 늘 생활고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지. 결국 말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해서 아예 수도회에 들어갔어. 그리고 마침내 수도사로 정식 서원을 했을 즈음 지병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고 말았지.

 
1616년 4월 23일, 세르반테스는 69세를 일기로 사망합니다. <돈키호테>가 출간된 지 10년, 그리고 <돈키호테 2부>를 발간한지 겨우 1년 만에 고단한 인생의 종지부를 찍게 된 것입니다.

 

모든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 끊어진 실을 이으면서, 내가 여기서 쓰지 않은 것들, 그리고 잘 어울렸던 부분들을 언급할 시간이 올 겁니다. 안녕, 아름다움이여. 안녕, 재미있는 글들이여. 안녕, 기분 좋은 친구들이여. 만족스러워하는 그대들을 다른 세상에서 곧 만나길 바라면서 난 죽어가고 있다오!
 
_ 세르반테스 유작 <사랑의 모험> 中

 
최초의 근대소설이자 세계인의 고전 <돈키호테>. 스페인의 국민작가 세르반테스는 죽은 지 4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전 세계인들의 서재에 한 권쯤은 꽂혀 있는,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인쇄되고 읽힌 책의 저자로 여전히 살아남아 있습니다. 그의 삶은 소설 속 돈키호테의 환상이 아니라 리얼한 현실이었고, 그의 모험은 미루어진 숙제가 아니라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세르반테스 앞에서 시련과 고난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겠네. 사람들이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들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삶의 안정을 그렇게 원했건만, 번번이 운명은 그에게서 평탄한 삶을 거두어 가 버리지. 덕분에 그는 환상을 현실로 가져올 수 있었어. 우리는 도망 다니지. 할 수만 있다면 현실의 안정 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죽은 척하며 살아 가.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환상을 살아내야 했어. 어떤 이들의 삶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들이 연이어 그의 삶에 펼쳐졌지만, 죽기까지 세르반테스는 생생하게 환상을 살아냈던 거야.

 

산초, 나는 죽음을 살기 위해 태어났고, 그대는 먹다 죽기 위해 태어났네.
 
_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中

 
돈키호테의 묘비명은 ‘미쳐 살다가 정신 들어 죽었다’입니다. 후회로 점철된 인생을 사는 모든 이들의 묘비명입니다. 돈은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 먹고살아야 하는 게 아닙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 꿈을 이뤄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먹고살고, 돈을 벌기 위해 꿈을 이루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 돈하다 정작 돈은 벌지 못하고 먹기만 하다 죽습니다. 돈이 꿈인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쓰고, 돈을 벌기 위해 도전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돈을 얻습니다. 그러나 돈이 꿈이 아닌 사람이 돈을 좇으면 정작 돈 앞에서 매번 도망치게 됩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한 게 아니야', ‘이렇게 돈을 벌면 꿈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몰라’. 목적이 다른 곳에 있으니, 꿈을 이루는 데 요구되는 댓가를 지불하기가 주저해지는 것입니다.

 


돈이 꿈인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한 댓가를 치르는 데 주저함이 없어. 댓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몰염치, 비난, 불법적인 요소들, 이기적인 결정과 예상되는 사람들의 손가락질 등등, 착한 척하는 사람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장애물들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는 거야. 그러나 돈이 꿈인 사람들은 돈키호테처럼 그것들과 결투를 벌이지. 멀쩡한 강물을 뒤집어엎기도 하고, 주지도 않을 거면서 노후를 보장한다고 사기를 치기도 하지. 세금 몇 푼 더 내는 게 아까워, 감옥에 가기를 주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모, 형제를 감옥에, 정신병원에 처넣기도 하지. 그것도 젊어서 제때에 하면 보란 듯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꼭 버티다 나이 들어서 손을 대는 거야. 그리고 투기와 경마, 도박 같은 사업으로 한 방에 날려 버리지. 돈이 꿈이었으면 진작에 했어야지. 돈이 꿈이 아니면 이제 와 뭐 하는 짓이지?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돈키호테 같다 말하는 거야.

 
미쳐 살다가 정신이 들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묘비명을 그렇게 밖에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나마 소설 속 돈키호테는 생의 도전 에너지를 소진한 듯 보입니다. 뒤늦었지만 말입니다. 돈키호테처럼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니 돈키호테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때에 말입니다. 뒤늦게 후회하며 보자기를 뒤집어쓴다 한들 슈퍼맨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서 슈퍼맨을 꿈꾸는 이들이 비행기를 만들고, 로봇을 동경하던 이들이 인공지능 로봇을 만듭니다. 원탁의 기사를 꿈꾸던 아이가 마법사가 되고, 별을 꿈꾸던 아이들이 우주선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시골의 나이 든 귀족 아론소 기하노가 어려서 도전을 시작하였다면 ‘라만차의 기사단’을 설립했을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9명의 기사들이 꾸었던 무모한 꿈이, 지금까지도 그 비의가 거론되는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템플기사단으로 실현되었듯,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제때’에 도전을 시작했다면 미쳐 살다가 정신이 들어 죽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때’는 내일도, 모레도 아닌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돈키호테>를 읽히고, 나이 든 가족에게서는 <돈키호테>를 빼앗아야 해. 다 늙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 말이야. 다만 나 자신은 나이와 상관없이 <돈키호테>를 읽어야 해. 미쳐 살다가 정신이 들어 죽기 전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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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분량의 무언가에서 삶의 행복과 만족을 느껴야 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