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검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in stimcity •  2 months ago




검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 Toledo, Spain



알지 못했습니다. 멀린은.. 이번 여정이 그의 검을 찾기 위한 순례였는지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여러 번 검을 얻으려 했지만 번번이 검은 멀린에게서 떠나가곤 했기 때문입니다.

 


10년 전쯤 작은 아카데미 하나를 열면서 이름을 지었어. ‘검과 방패’라고 말이야.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직관이었던 것 같아. ‘검’은 자신이고 ‘방패’는 사람들, 즉 나와 함께 하는 공동체라고 생각했지. 그 뒤로 ‘검과 방패’라는 이름으로 작은 연구소도 만들었어. 그리고 기회가 날 때마다 어디선가 상징물로서의 검을 만나고 싶었어. 그것은 일부러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여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나지리라고 생각했지. 운명처럼 말이야.

 
멀린은 검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4년여 전, 일본 도쿄 인근의 섬에 방문했다가 레터 오프너(Letter opener)로 제작된 엑스칼리버를 발견한 것입니다.

 


원래 일정은 아니었는데 무언가에 이끌려 갑자기 가게 된 장소였어. 예술의 신을 모시는 사원 같은 곳을 지나가는 데, 성상들이 다 황금 검을 들고 있더라구. 심상치 않은 느낌을 가지고 둘러보다가 기념품 상점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엑스칼리버를 발견했지. 엑스칼리버.. 아더 왕의 검이지. 그땐 바로 이거라고 생각했어. 아더 왕의 검을 멀린이 가지고 있는 건 자연스럽잖아.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아더 왕의 검이지 마법사 멀린의 검은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가지고 있을 수 없었나..

 
세관 규정상 도검류는 국내에 들여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멀린은 반입이 가능한 레터 오프너 류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차 여행 때에는 검을 들고 있는 영화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 조각상과 디즈니 박물관에서 구입한 검과 방패를 들고 용과 싸우는 필립 왕자의 조각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괴생명체의 습격 때문에 모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어. 아무것도 지닐 수가 없었거든. 더 이상했던 건 여행을 마치고 짐을 풀었는데, 간달프 조각상의 검을 쥔 손목과 필립 왕자가 방패를 들고 있던 손목이 모두 부러져 있었던 거야. 왜 하필 다른 부분도 아니고 손목이 다 부러져 있었을까? 불길한 징조였어.

 
검도 방패도, 모두 멀린에게서 떠나가고.. 상실감에 젖은 멀린은 더 이상 상징물로서의 ‘검’에 마음을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정에서도 기념품을 사거나 쇼핑하는 일에 시큰둥 했습니다. 아끼던 것들이 남아있지 못하고 자꾸 떠나가니 말입니다. 당연히 그의 ‘검’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순례자>의 작가는 폰세바돈의 템플기사단의 성에서 치러진 의식을 통해, 자신의 검을 되돌려 받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검의 목적을 아직 깨닫지 못한 그는 검을 받지 못했습니다. 상심한 가운데 남은 순례길을 걷던 중 스스로 검의 목적을 깨닫게 되고, 어린 양의 인도를 따라 들어간 카미노 도상의 작은 예배당에서 결국 자신의 검을 되찾게 됩니다.

 

어린 양이 장의자 뒤로 숨어버렸다. 나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제단 앞에 내 마스터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어쩌면 안도한 표정인지도 몰랐다. 그의 손에는 내 검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가 다가오더니 나를 지나쳐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를 따라갔다. 예배당 앞에서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내게 칼자루를 함께 잡으라고 요구했다. 그는 검을 높이 치켜들고, 길을 떠나 승리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성스러운 시편을 낭송했다.
 
_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中

 


나의 검은 톨레도의 기념품 상가에 있었지. 작가는 검을 발견하는 장소로 순례 여정에 어울릴 만한 장소를 꿈꿨지만,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나의 검은 매우 평범한 장소, 전혀 신비롭지 않은 풍경 속에서,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말이야.

 
스페인의 옛 수도 톨레도, 이곳은 템플기사단의 도시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검’ 생산지였습니다. 로마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과 이슬람 지배 시절 전수된 강철 제련법, 그리고 인근에 매장된 품질 좋은 강철들로 톨레도는 전 세계적인 ‘검’ 제작 도시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사용된 검도 모두 톨레도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하더군요. 멀린과 일행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었습니다. 그저 한국의 경주처럼, 스페인의 옛 수도라고 하여 들른 톨레도였습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기념품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의 첫 번째 상점을 지나다, 검들이 진열된 쇼윈도우를 보고는 별생각 없이 상점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운명의 검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 여기 검이 있네?’ 했어. 유럽의 도시들을 다니며 검이 있을 만한 상점들에 여러 번 가봤지만, 좀처럼 검을 발견할 수가 없었어. 있어도 모형 형태의 조악한 검들뿐이었는데, 여기는 정말 제대로 된 검들이 수없이 진열되어 있더라구.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 ‘아, 그래 나도 검을 찾고 있었는데..’ 검에 대한 생각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어. 그렇게 진열된 검들을 만져보기도 하고 들어보기도 하면서, 너무 커서 가져갈 순 없겠다 싶어 아쉬운 마음에 다른 진열장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그 검이 눈에 확 들어왔지.

 
멀린이 발견한 검은, 가죽 칼집에 담긴 템플기사단의 단검이었습니다.

 


단검이어야 해. 나의 검은 말이야. 그것도 가죽 칼집에 담긴, 그것은 탕자의 검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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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언제가 만날 자신의 검을 상상하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란 그림을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은 탕자가 유일하게 끝까지 몸에 지니고 있던 가죽 칼집에 담긴 단검. 당시의 검은 신분을 말해주는 상징이었습니다. 탕자는 모든 것을 잃고 돼지우리에서 지내야 할 때조차도 검만은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 자신을 종으로 써달라고 간청할 때에도, 검만큼은 잊지 않고 지니고 있었습니다. 멀린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에 관한 해석을 읽으며 ‘아.. 나의 검은 단검이다. 가죽 칼집에 담긴 탕자의 검’이라고 직관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내 영적 여정의 상징과도 같아.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아버지의 품을 떠날지라도,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신분만큼은 잊지 않았던, 그리고 그 상징만큼은 무엇과도 바꾸지 않았던 탕자처럼 말이야. 나도 본질을 찾아 우주를 여행하고 있지만 돌아갈 집이 있다는걸, 모든 것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더라도, 언제든 다시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상징 말이야.

 
멀린은 마법사로서의 삶을 시작하며, 자신의 고향과도 같던 신앙과 신념 그리고 공동체를 떠나야 했습니다. 탕자의 형처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해했지만, 그것은 멀린에게 주어진 소명이자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순례를 떠나는 멀린에게는 약속이 필요했습니다. 언제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와야 할 때라면 언제든 아버지의 집에 돌아올 수 있기를.. 그때에 행색이 달라지고 알아볼 수 없게 되더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상징이 필요했습니다. 탕자의 단검 말입니다.

 


그 검이었어. 톨레도의 기념품 상점 진열장 한구석에 놓여있던 가죽 칼집에 담긴 단검. 나의 검이 오래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게다가 그 검은 템플기사단의 검이었지. 꿈의 순례를 떠나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떠나온 마법사일지언정, 언젠가 자신의 순명을 마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나의 행적과 어떠함에 상관없이, 그 ‘탕자의 단검’만으로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수 있게 된 거야.

 
검을 찾았습니다. 아니 검이 멀린을 찾아왔습니다. 드디어 검을 쥔 멀린은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온 시련의 순간들, 절망의 기억들, 상실의 감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참으로 고단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외롭고 답답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_ 누가복음 22장 35~37절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는 일. 검도 없이 순례를 시작한 멀린에게 주어졌던 수많은 순간들이고 앞으로도 겪게 될 일일 것입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수의 제자들과 달리 멀린에게는 좀처럼 검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으니 답답하고 불안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시작된 순례는 멈출 수가 없고, 보장되지 않는 신분에 늘 어려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법사 멀린, 그에게도 검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불안할 필요도, 답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법사 멀린은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나는 혹시나 하고 톨레도의 여러 다른 상점들에도 들어가 봤어. 내 검과 같은 검이 또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 보이는 곳마다 들어가 봤는데 내 검과 비슷한 검은 없더군. 그리고 마음에 끌려오는 검이 있어 검을 한 자루 더 샀지. 나중에 알게 되었어.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한 예수의 제자들에게 검이 두 자루였다는 걸 말이야.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_ 누가복음 22장 37절

 
검 둘이면 족하다 하셨으니, 멀린에게 다음 과제는 무사히 한국까지 검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세관에서 통과할 수 없다면 어쩌죠. 멀린?

 


내 몫은 한국까지 검을 운반하는 일이야. 겉옷을 팔아서라도 말이야. 그리고 가져갈 수 없다면 거기까지가 내 임무일 거야.

 
다행히 검은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넘어가는 유로스타에서 문제가 생겼지만,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별도 수하물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관문인 인천공항의 세관에서는 이리저리 살펴보던 세관원이 ‘다른 사람을 해칠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니 문제없다며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검, 검은 다른 사람을 해칠 목적으로 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법사 멀린의 검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검입니다. 작가로서, 화가로서 또 누군가는 가수로, 배우로, 정치인으로, 기업인으로, 모두가 자신만의 신분을 가지고 태어나고 우리는 그것들을 삶에서 드러내 증거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분은 각자의 꿈속에 씨앗으로 잠들어 있습니다. 그 씨앗이 발아되기까지, 우리는 저마다 무엇 때문에 세상에 내려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꿈을 꿔야 하고 그 씨앗을 발아시켜야 합니다. 발아한 씨앗이 자라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되어서야 우리는 ‘아, 너는 마법사였구나.’, ‘너는 배우였구나.’, ‘너는 가수였구나.’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자신은 그것 자체로 검입니다. 허리에 찬 단검으로 증명할 필요 없이, 누가 보아도 아버지의 아들, 탕자가 아닌 상속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야 해. 자신을 사야 한다는 거야. 가진 모든 것을 팔고, 상속받은 모든 것을 처분해서라도, 나 자신을 살아내야 하는 거야. 그러려고 세상에 온 거야. 아버지 눈치나 보며, 불만에 찬 고용인으로 인생을 마치려고 세상에 온 게 아니야. 우리는 모두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고, 그 검을 날카롭게, 아주 날카롭게 제련해야 해. 그러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지지. 저절로 드러나지지. 날카로운 것은 뚫고 나오게 마련이거든. 그렇게 검으로서의 자신을 찾은 이들이 함께 둘러서면, 그것으로 방패가 되는 거야. ‘검과 방패’ 말이야.

 

나는 마스터에게 그곳에 내가 언제 도착할지를 알았느냐고 물었다. 혹시 이미 한참 전부터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냐고.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신은 전날 아침에 도착했다고, 또 내가 오든 말든 다음날 그곳을 떠날 예정이었다고.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는 자신을 마드리드로 데려다줄 렌터카에 올라타면서 내게 산티아고 기사단을 상징하는 작은 배지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어린 양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이미 위대한 계시를 받은 것이라고. 그리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언젠가 나도 알 수 있을 거라고,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에 가야 할 순간을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제때 그곳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_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中

 
멀린에게는 템플기사단의 반지가 주어졌습니다. 멀린은 오른손 중지에 그 반지를 끼웠습니다. 이로써 멀린의 양 손위에서 ‘검과 방패’의 언약이 완성되었습니다. 멀린의 검이 톨레도의 그 상점에서 얼마나 멀린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멀린과 일행은 어쩌면 바쁜 일정에 톨레도를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였다면 그 기념품 상점에 가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말처럼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에 가야 할 순간을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제때 그곳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검이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시작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때에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멀린의 남은 삶의 순례 여정에도 그 ‘누군가’들이 마법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멀린은 결국 큰 시련을 겪고도 거스르지 못하고 떠나와야 했던 이 여정처럼, 결국 제때에 그곳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직 만나야 할 수많은 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한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까지 마법사의 순례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길의 순례와 산티아고 길의 순례는 이것으로 끝이 났지만, ‘검과 방패’를 위한 예루살렘 길의 순례는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_마태복음 10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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