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산티아고를 안아 주었어

in stimcity •  2 months ago




산티아고를 안아 주었어

+ Santiago de Compostela, Spain



마침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였습니다. 카미노의 여정이 끝나는 곳에 말입니다. ‘별들이 쏟아지는 들판’이라는 뜻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는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게다가 카미노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상징인 산티아고 대성당은 공사 중이어서,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습니다. 멀린은 좀 허탈한 듯합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네. 뭘 특별한 걸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힘든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을 위로해 주고 축하해 주는 감성 같은 게 별로 느껴지지 않더라구. 여느 유명 관광지와 다를 바 없는 떠들썩한 분위기, 하나를 더 팔지 못해 안달인 기념품 상가들.. 쩝,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

 
800km의 도보순례는 아니었지만, 8년간의 순례 여행의 상징적 종착점으로서, 멀린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기대를 했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곳도 역시 매일매일의 일상이 반복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였습니다.

 


순례의 삶이 다 그렇지 뭐. 봉우리를 넘어가면 또 봉우리가 나오고, 끝난 것 같지만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고.. 순례자들에게는 감격의 종착점이겠지만, 이 도시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울 게 없는 평범한 일상일 뿐이지. 거창하고 감동적인 세레모니가 있은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면 떠나왔던 일상이 다시 시작될 뿐이니까. 그건 누구라도 예외가 아니지.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 순례의 길로 되돌아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대만큼 충족되지 않는 성취감을, 순례의 고통으로 전환하여 아쉬움을 달래려 드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 찾아 해 볼 뿐입니다. 보물찾기 하듯 말이죠.

 


전설에 의하면, 이베리아반도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던 산티아고(사도 야고보)도 겨우 2명의 제자를 만들었을 뿐이었대. 실망감과 좌절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거야. 그때 성모마리아가 나타나, 이 상심한 사도를 위로했지.

 

‘나는 하늘의 뜻을 따라 아이 하나를 낳았지. 그리고 그 아이는 십자가에서 죽었단다.’

 
성모마리아가 상심한 산티아고에게 나타나 무엇이라고 위로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멀린은, 아이를 낳게 될 거라는 직관에 순종하고, 그 아이의 죽음의 순간까지 동행한 성모마리아가 산티아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엄청난 역사들 말이죠. 성모마리아는 상심한 산티아고를 위로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산티아고는 성모마리아의 말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곧 예수의 제자들 중 처음으로 순교를 당합니다.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_ 사도행전 12장 1~2절

 
7년 여간의 선교활동의 열매는 고작 2명의 제자뿐이었습니다. 상심한 마음으로 돌아간 예루살렘에서 그는 제자들 중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좌절되고 상심한 마음이었을지 모릅니다. 산티아고는.. 다른 제자들의 활발한 교회 활동과 선교사역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가장 먼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성서에서의 기록도 단 2줄에 불과합니다. 천국에 갔던들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스승 예수가 받았던 정식재판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열매 없는 도전과 결과 없는 수고는 생의 의지를 꺾어놓지.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생각하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굳은 마음으로 돌기둥이 되어가는 거야. 빈손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산티아고의 마음이 어땠을까? 이미 날로 부흥해 가고 있는 동료 제자들의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서던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산티아고가 무엇 때문에 이베리아반도의 선교활동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예수의 발자취를 가장 먼저 따라 간 제자인지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아닌, 직관에 순종하여 끝을 알 수 없는 발걸음을 옮기는 일 말입니다.

 


그의 수고가 헛된 것은 아니었어. 비록 그의 생전에 그 결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로 셀 수 없이 많은 순례자들이 그의 행적을 쫓아 순례를 이어오고 있으니까.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3대 순례지가 된 산티아고의 길을, 지금도 별같이 많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의 행적을 기억하며 걷고 있지.

 
산티아고의 유해는 신비로운 과정을 거쳐, 다시 그가 떠나왔던 이 이베리아반도의 끝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수백 년을 잠들어 있다 별들의 인도를 받은 양치기의 발견으로 다시 세상에 드러나졌습니다. 그의 삶이 참으로 대기만성입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행렬들이 그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산티아고.. 지금은 기뻐하고 있을까? 나는 대성당에 자리하고 있는 그의 동상을 뒤에서 꼭 안아 주며 말했어.
 
‘아직도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요.’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릅니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의 마지막 코스는, 산티아고 대성당의 금빛 찬란한 제대에 올려져 있는 산티아고의 좌상을 뒤에서 포옹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의 상심한 마음은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매년 50만 명 이상의 순례자들이 그를 기억하고, 그가 걸었던 길을 걸으며, 그 길의 끝에서 그를 안아 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별 성과가 없는 것 같았으나, 그가 7년여에 걸쳐 목숨을 걸고 걸어왔던 행적과, 성모마리아의 권고에 따라 돌아간 예루살렘에서의 순교가, 빛을 잃지 않고 수백 년을 잠들어 있다가, 별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별빛을 따라,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밭을 가는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일하고, 타작하는 사람이 자기 몫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바울 사도의 말처럼..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일하는 일꾼은 없어. 그러나 어떤 보상은 저렇게 시간을 초월해 주어지기도 하지. 그런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도 있어. 아니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어.

 
모든 사람들이 현실에서의 보상을 꿈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보상이 아니라면, 나 죽은 뒤에 받는 보상이 무슨 보상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그럴지라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그는 죽었으나 죽지 않은 존재로 사람들에게 현존합니다. 그들의 꿈은 수없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진행 중입니다. 그들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고 매일 밤 떠오르는 별빛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꿈속에 다시 살아납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런 꿈을 꾸었던 누군가의 별빛인지 모릅니다.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이 산티아고의 꿈에 동참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광장에서 한스와 잭은, 수고한 순례자들과 지루한 일상을 잠시 벗어나온 현지인, 관광객들을 노래로 위로합니다. 어느새 버스킹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거창하고 감동적인 세레모니는 없으나 어쨌든 산티아고의 순례길은 끝이 났습니다. 멀린과 한스, 잭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대륙의 끝 피스테라(Fisterra)로 향합니다. 피스테라는 이들처럼 카미노의 아쉬움을 가진 사람들이, 유럽 대륙의 서쪽 끝 피스테라까지 마지막 도보순례를 걷고, 그 해변에서 그동안 함께 해 온 신발과 양말을 태우는 의식을 행하는 곳입니다.

 


유럽의 옛 사람들은 여기가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지. 제로 포인트(0 point).. 공간의 제로 포인트에 도달했어. 산티아고는 여기서 성모마리아를 만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순교를 당했지. 다른 순례자들도 이곳을 끝으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 하지만 우리는 아직 여정이 남아있어. 아니 제로 포인트에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는 거야. 북쪽 아니 ‘플랫어스’의 주장대로라면, 지구의 중심인 그곳을 향해 남은 여정을 이어가야 해.

 
제로 포인트.. 소실점에 수렴했으니, 존재는 소멸되거나 다른 차원에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제로 포인트를 터닝포인트로 삼아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별들의 자취를 따라 나아갑니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이곳에서 예루살렘으로 공간이동을 한 후, 다른 차원으로 사라졌다가, 별빛과 함께 되돌아와 카미노에서 부활했습니다. 멀린은 아직 모릅니다. 이 제로 포인트가 멀린에게 다른 순례자들처럼 터닝포인트가 되어 줄지, 아니면 산티아고처럼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소실점에 접어든 것인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몽세귀르와 스톤헨지의 스타게이트가 기다리고 있고, ‘플랫어스’에서 말하는 지구 중심으로의 여정 또한 남아 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 엘리야처럼 병거 타고 하늘에 들려올라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면 순례길에서 죽음을 맞이한 다른 순례자들처럼 에너지를 소진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도 산티아고처럼, 성모마리아의 위로가 필요할 만큼 상실감에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상실의 종점에 다다른 것 같아. 피스테라의 그 제로 포인트에서, 나는 그냥 이대로 하나의 작은 점이 되어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리고 싶었어. 고단한 삶이었거든..

 
누가 그의 마음을 알까요? 산티아고의 성모마리아는 멀린은 잊었나 봅니다.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났던 ‘원죄없는 잉태’는 멀린에게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별빛이 반짝여야 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밤하늘은 종말의 날처럼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잠들지도 못하게 합니다.

 


수 천 년이 흘러 마법사 멀린의 카미노가 생겨난다 한들, 지금의 나는 상실감 속에 침잠할 뿐이야. 아픈 것은 아픈 대로, 상처는 상처 난 대로 고스란히 끌어안아야지.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일테니까..

 
쓸쓸한 피스테라의 해변가에서 한스와 잭은 일상처럼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직도 니가 보여..
아직도 니가 들려..
아팠던 기억도
묻어버릴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인지
이런 내가 낯설고 아파도
너를 간직하며 살까 봐 그래..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산티아고를 안아 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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