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죽음을 무릅쓰고

in stimcity •  2 months ago




죽음을 무릅쓰고

+ Foncebadon, Spain



카미노의 종점을 향해 다가가자 군데군데 비석이 눈에 띕니다. 카미노를 걷다 죽음을 맞이 한 순례자들의 비석과 무덤들입니다. 중세에는 카미노에서 죽는 순례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교통과 숙박시설, 안전장치들이 충분치 않았을 때이니 당시의 순례는 정말 목숨을 건 각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순례자들의 넉넉지 않은 여비를 노리는 도둑과 강도들, 사나운 들짐승과 맹수들.. 여정을 마치고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한 휴식의 시간조차,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힘든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들은 목숨까지 걸어가며 순례를 떠났던 걸까?

 
비석과 무덤들 중에는 비교적 최근의 것들도 많이 눈에 뜨입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현대에도 이렇게 순례 중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의아한 일입니다. 죽을 것 같으면 병원에 가든, 집에 돌아가든, 순례를 멈추고 치료를 받으면 될 일일 텐데.. 심장마비나 급성질환으로 갑자기 급사하는 경우가 이렇게 많지는 않을 텐데 말이죠. 그리고 체력의 한계를 느꼈으면 얼마든지 일정을 종료하고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멈추지 못할 때가 있어. 자석처럼 끌려서 시작되는 일들 말이야. 심지어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선택을 번복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 그런 걸 운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바꿀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받아들이고, 기왕이면 가치 있는 선택이 되도록 노력하고 싶어질 거야. 그런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그냥 고삐에 꾀여 끌려오듯, 그렇게 전개될 때가 더 많아. 삶이라는 게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면 일단 당황하게 되거든.

 
당황한 사람은 고삐를 놓쳐 버립니다. 그리고 이미 달려가기 시작한 운명의 흐름에 질질 끌려다니게 됩니다. 원하는 대로도 되지 않고, 그렇다고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돈에 빠집니다.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면 그냥 체념하고 포기할 텐데, 운명의 수레바퀴는 때론 그토록 원했던 지점에 매우 근접하게 접근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유혹에 빠지지. 아니 착각에 접어들지. ‘아 이러려고 운명이 나를 이끌어 왔구나. 고생한 보람이 있네.’ 하고 말이야. 그런데 근접한 듯 보였던 나의 바람에서, 운명은 또다시 국면을 180도로 전환시켜 그것에서 멀어지게 만들지. 아니면 성취된 듯 보였던 목표점이, 사실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트랩이었음을 발견하게 되기도 해. 그러나 그건 그냥 운명의 궤도일 뿐이야. 누굴 속이고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궤도를 전환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렇게 느끼는 건, 내가 아직 내 운명의 궤도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거야.

 
무언가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당신의 선택과 운명의 궤도는 매우 불일치하며 좌충우돌 해왔기 때문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를 간절히 염원하지 않는 이상, 그 결과는 나도, 운명도, 납득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지점에 데려다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해진 것이 운명이라 해도 궤도 또한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선택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고, 나라는 존재는 매우 엉뚱한 선택을 하기도 하니까요.

 


카미노는 길이 정해져 있어. 변경할 수 없는 궤도가 놓여져 있지. 순례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나아갈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뿐이야. 그래서 카미노는 단순하고 명쾌하지. 하지만 삶은 더 복잡해.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의 궤도가 교차하고 있고, 여차하면 내 인생도 아닌 다른 사람의 운명에 접어들어 엉뚱한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기도 해.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엉킨 실타래처럼 궤도가 꼬여있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게 되기도 하지. 그럴 때 카미노를 걷는 거야. 카미노는 길이 정해져 있으니까. 정해진 길을 일정 기간 걸으면서 삶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궤도들이 정리되는 거지. 생각도, 마음도, 관계들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내 삶의 본 궤도가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라도 감을 잡게 되는 거야.

 
그렇게 카미노를 활용할 수 있다면 복잡한 삶에 중요한 힌트가 되어 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카미노 자체가 혼란이 되기도 합니다. 카미노의 궤도를 억지로 삶에 끌어들이기엔 지나치게 삶이 폭주하고 있었다면 말이죠.

 


손댈 수가 없는 삶이었겠지. 뭐랄까? 간신히 이어가고 있는 복잡한 삶의 궤도에, 매우 경직된 체계 하나가 크게 자리를 잡아 버리면, 동력을 모두 빨아먹어 버리게 되거든. 그냥 겨우 생명을 이어가는 작은 기관들이 거대한 동력 기관과 연결되면서 모든 에너지를 빼앗겨 버리는 거지. 그런 사람들은 함부로 카미노를 걷지 말아야 해.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직관을 따라 사는 삶은 매우 경직되고 강력한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삶을 초월한 결과와 예기치 못한 기적을 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때로 매우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마치 온통 순백색인 독방에 가두어진 사람의 정신이 온전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질 수밖에 없어.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복잡한 궤도를 그리며 헤매는 사람과 일직선으로 달려온 사람의 위치가 매우 크게 달라지는 거지. 일생의 어느 순간에 카미노의 순례길에 동시에 접어들었다 한들 일어나는 작용은 정반대일 수 있는 거지.

 
무리한 시도를 감행했는지 모릅니다. 카미노의 도상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중 일부는 말이죠. 물론 삶의 마무리를 카미노에서 하는 것이 운명이었을 수 있습니다. 순례와 함께 생을 마감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면서도 순례를 멈출 수 없었다면, 아니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순례를 멈출 수 없었다면, 그는 왜 그 각오를 생에서 보여 줄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적어도 꿈꾸며 살아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존과 타협하지. 생존할 수 있다면 꿈쯤은 슬쩍 접어두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거야. 그러면 그들의 운명은 생존이었을까? 그 타협한 사람의 운명의 궤도는 원래 생존을 위해 놓아졌을까? 그럴 리가 없잖아? 하다못해 소풍을 가도 밥은 무얼 먹고, 어디서 쉬고, 무얼 하며 놀지 궤도를 그리지. 그리고 어쨌든 행복이든, 재미든, 성취든 목적이 있어. 그런데 생이란 운명의 궤도를 그리며, 단지 탄생의 목적을 ‘생존’에 두고 정했겠느냔 말이야. 그 궤도를 신이 그렸든, 내 영혼이 그렸든지 말이야. 단지 먹고, 자고, 숨 쉬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난관을 뚫고 태어나게끔 궤도가 설정되었겠느냔 말이야. 아주 불필요한 작용일 거야. 그리고 자연은 그런 불필요한 궤도를 남겨놓지 않아. 발견하는 족족 제거해버리지, 절대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끔 놓아두지 않아. 그러니 우리는 가만히 운명의 궤도를 따라가기만 해도, 꿈에 다다르게 되어 있지.
 
물론 한 생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어. 여러 생, 여러 사람의 생에 걸쳐 어떤 꿈들은 완성되기도 하지. 하지만 궤도는 일정하게 그 꿈을 향해 놓아져 있는 거야. 그러니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문제는 누군가는 자꾸 그 궤도를 이탈해서 엄한 남의 궤도에 올라타곤 한다는 거야. 그건 그냥 그 ‘엄친아’, ‘엄친딸’의 궤도일 뿐이야. 엄마가 뭐라 한들, 나는 그냥 나의 궤도를 돌면 되는 거야. 그런데 꼭 그렇게 남의 궤도를 타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 사회에 아주 많지. 궤도에서 이탈한 사람이 자신의 궤도로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목숨을 걸어야지. 죽음을 무릅쓰고 궤도를 건너 뛰어야지. 사방팔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이 폭주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잃어버린 나의 궤도를 찾으려면, 목숨을 걸고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해야 해. KTX, 신칸센, TGV.. 초고속 열차를 타고 자신의 궤도를 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딘가에 버려져 녹이 슬고 있는 자신의 궤도를 찾아가려면 죽음을 무릅쓸 수밖에 없는 거야.

 
그나마도 그걸 하지 못하는 용기 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궤도에 억지로 달라붙어 있습니다. 너무 멀리 와버려 자신의 궤도를 찾기 힘든 사람일수록, 다른 이의 궤도에 올라타 모기마냥 빨대를 꽂고 겨우 연명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궤도를 타는 꿈의 사람들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톰 크루즈보다 체력이 강해도 가속이 붙는 궤도에 언제까지나 매달려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들은 만만해 보이는 이 사람 저 사람, 이 회사 저 회사, 이 단체 저 단체의 저속 궤도를 전전하다 무중력 상태의 우주로 튀어져 나가 우주 미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길에서 죽음을 맞이 한 사람들은 그래도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야. 이 카미노의 궤도를 견뎌내지는 못했지만, 자기 삶의 본 궤도가 무엇이었는지 탐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테니 말이야. 불쌍한 사람들은, 카미노에, 자신의 궤도에, 근접할 엄두도 못 내는 사람들이야.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람들일수록 아주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여. 용기가 없어 목숨을 걸지도, 죽음을 무릅쓸 수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건 바쁜 척하는 것뿐이지. 이탈한 궤도 때문에 비어버린 공간들을, 쓸데없지만 바빠 보일만한 것들로 채워대지.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로 공간을 포장해서, 마치 자기가 아주 잘 살고 있는 듯 위장하는 거야. 그래야 견뎌 낼 수 있거든. 실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뿐이지만. 자신의 궤도를 돌고 있는 사람들은 대번에 알아보지. 이 사람이 위장을 하고 있는지 말이야. 속는 건 용기 없는 사람들뿐이야. 아니 속은 척해주는 거지 서로. 그래야 자신들한테도 속은 척해 줄 테니 말이야. 비어버린 공간 때문에, 찾지 못한 자신의 궤도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은 증폭되고, 그 두려움 때문에 자꾸 철벽을 쳐대서 고립은 심해지지. 사람들의 우주에서 자꾸 멀어진 채 우주 미아로 무중력상태를 둥둥 떠다니는 거야.

 
이 우주 미아들은 언제쯤 자신의 궤도를 만나게 될까요? 외력에 의존해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는 이 우주 미아들은 어떻게 해야 사람들과 조우할 수 있게 될까요?  

 
카미노 도상에는 철십자가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멀린은 그 철십자가가 마치 궤도를 이탈한 채 우주 미아가 되어,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가련한 영혼들과 교신하는 송신탑 같아 보입니다. 멀린은 그 철십자가를 붙들고 이리저리 부유하는 우주 미아들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두려워하여 떨던 것이 들이닥쳤고, 무서워하던 것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_ 욥기 3장 25절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죽음을 무릅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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