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강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야 #1

in stimcity •  3 months ago




강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야

+ Logrono, Spain



‘용감한 자들의 십자가’ 앞에 섰습니다. 전후좌우로 펼쳐진 밀밭이 그냥 눈으로 봐도 참으로 비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언덕도, 동산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곡식창고, 젖과 꿀이 흐른다던 가나안 땅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풍요의 땅에는,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승자는 모든 것을 독차지합니다. 대신 패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비옥한 그라뇽의 땅은 늘 다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세기 초반에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와 그라뇽이 두 마을 사이에 위치한, 데에사 밭을 두고 싸운 것이었습니다.

마을에서 대표로 한 명씩을 뽑아서, 목숨을 걸고 결투를 해서 이긴 쪽 마을이 땅을 차지하기로 정했습니다.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은 그라뇽의 마르틴 가르시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결투를 ‘용감한 자들의 십자가’(Cruz de los Valientes)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해 결투가 일어난 자리에 십자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라뇽에는 마르틴 가르시아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며 마을의 주일미사에서는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풍습이 남아있습니다.

 


보상이 있는 곳에 전쟁이 있어. 보상을 얻기 위한 목숨을 건 전투 말이야.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데 목숨을 거는 바보는 없지. 보상의 크기만큼 위험의 크기도 커지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보상을 두려워하지. 그만큼 위험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보상을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하려고 듭니다. 대신 청렴, 청빈, 가난과 결핍을 숭고한 것으로 섬기려 듭니다. 그러면 자신의 연약함을 감출 수 있을까 싶어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상을 추구하는 자는 용감해져야 합니다. 두려워 떠는 쫄보가 되어서는 보상을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목숨을 걸기만 하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용감한 자는 목숨을 걸고 보상을 추구하지만 그 용맹(勇猛) 속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한순간의 실수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용맹(勇盲)인 것입니다. 죽지도 다치지도 않을 전투라면 용맹이 필요 없겠죠. 그래서 쫄보들은 용기를 내기 보다 보상을 폄하함으로써 자신들의 두려움을 감추려 듭니다.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결투에 왜 십자가를 세웠을까? 기념할 만한 것은 많은 데 말이야. 집이나 사원을 지을 수도 있고 말이야. 아마도 목숨을 걸고 보상을 추구했던 가장 큰 사건이, 십자가에서 일어나서 일거야. 사람들의 관념 속에 목숨을 거는 일로 얻은 가장 큰 보상은 인류의 구원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렇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보상이 없는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교리를 따르자면 전 인류의 구원을 얻어 낸 가장 큰 보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의 달란트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낌없이 달란트를 사용하고, 그 보상으로 부활과 함께 전 인류의 구원을 얻어낸 것입니다. 예수가 쫄보였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보상을 부도덕한 일로 여겼으면 이룰 수 없었을 일입니다. 그러나 부도덕한 죄로, 함께 십자가에 매어 달린 강도에게조차 보상은 주어졌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순간, 전 인류에게 무차별적으로 주어질 보상의 카운트다운이었습니다. 부도덕한 죄로 십자가에 달린 강도조차 예외일 수 없는 보편성으로 말이죠.

 


사람들이 보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야.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두려운 거야.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할지라도 결투의 과정을 거치기 싫은 것이지. 그래서 시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거야. 그리고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안되면 어쩌려구 그래, 큰일나지..’ 등의 말로 용기 없음을 포장하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땅이 없는 것이 아니고, 보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결투를 하고 땅을 차지합니다. 또 누군가는 보상을 가져갑니다. 그러나 용기 없는 쫄보들은 속으로는 엄청 부러워하면서도, 겉으로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며 이죽대고 스스로를 안위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자는 들어갈 수 없는 천국에, 강도는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자들은 강도 짓을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려고 말이죠. 그러나 용기 없는 쫄보들은 ‘이 강도 새끼들..’ 욕을 하면서도 더 쫄아 붙어서, 자신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버립니다. 그리고 강도들도 들어간 낙원에서 쫓겨나,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 마태복음 25장 30절) 있는 것마저 빼앗기고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25장 29절)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들은 왜 자신들이 자꾸 빼앗기고 쫓겨나는지 알지 못한다는 거야. 단지 보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지.

 
그들은 모두 부자가 되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냐고? 보상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항변하지만, 말만 그럴 뿐, 생각은 언제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처럼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결과물을 대중에게 직접 어필하고 인정받으려 하기보다, 면접관 단 몇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의 재능과 상관없는 스펙을 쌓는데 모든 시간을 보내고, 성취를 위해 쪼개어 써도 모자랄 시간을 아껴 사용하기보다, 알량한 고정급 몇 푼에 하루 시간 대부분을 저당 잡혀 버립니다. 그마저도 스트레스 해소용 사내 뒷담화와 잦은 커피타임, SNS, 각종 쓰잘데기 없는 온라인 쇼핑 등으로 시간을 땅에 묻어버립니다. 그러면서 목숨을 건 결투의 현장을 매번 맞닦뜨리며 자신을 성장시켜 간, 꿈의 전사들의 보상을 폄하하고, 어떻게 훼손 시키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들이 정말 강도 짓이라도 했다면 당당하게 나서서 결투 신청을 할 것이지, 뒤에 숨어서 익명 속에 이죽대다, 고소라도 하겠다 으름장을 놓으면 불빛에 존재를 들킨 바퀴벌레들처럼 쏜살같이 숨어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

 

인간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럽고, 거짓말쟁이이고, 위선자이고, 위험을 멀리하고, 이익을 탐한다. 당신이 그들을 잘 대우할 때 그들은 당신의 사람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위험이 멀리 있으면, 그들은 당신을 위해 피를 흘리고 그들의 재산, 그들의 생명, 그들의 아들을 바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위험에 처하면, 그들은 등을 돌린다. 전적으로 그들의 약속에 의지해 다른 어떤 예방책도 취하지 않는 군주는 누구라도 그 자신의 파멸을 보장하는 셈이다.
 
_ 마키아벨리 <군주론> 中

 


위험을 멀리하면서 이익을 탐하는 자들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럽고, 거짓말쟁이에다, 위선자들인 거야. 또한 이런 자들은 위험이 멀리 있을 때는, 모든 것을 바칠 듯 아첨을 떨지만, 당신이 위험에 처하자마자 등을 돌려 버리지. 그러므로 그들의 입바른 약속에만 의지해 있다간, 파멸은 불보듯 뻔한 결과를 가져오게 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구?

 

인간은, 자기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드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받는 존재로 만드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덜 염려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감사의 끈으로 확보되는데, 인간은 비열해서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언제든지 이를 끊지만,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가 강화되니, 이는 항상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는 것이, 두렵게 여겨지는 것보다 더 나은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대답은 둘 다가 되기를 원해야 하지만, 이 둘을 결합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둘 다가 될 수 없다면, 두렵게 여겨지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_ 마키아벨리 <군주론> 中

 
주인은 일꾼들에게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일꾼은 이를 소홀히 여겼습니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주인이 일꾼들에게,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처벌하겠다고 두려움을 심어 주었다면, 한 달란트 받은 일꾼이 그렇게 땅에 묻어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쫄보들을 다스리는 군주는, 이러한 멤버들을 이끄는 리더는, 두려운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받는 존재로 남았다간,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자신의 파멸을 스스로 보장하는 셈이 되는 것일 테니까요.

 

사랑을 받느냐, 두렵게 여겨지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 나는,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에 따라 사랑하고, 군주의 마음에 따라 두려워하기 때문에, 현명한 군주라면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의지해야지, 그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고 결론짓겠다.
 
_ 마키아벨리 <군주론> 中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게 할 수는 없어. 하지만 나를 두려워하게 할 수는 있지. 두려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강해진다는 거야. 강하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야. 약한 것이 착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야.

 
강한 존재가 되는 것. 강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약한 자들은 강한 자가 자신들을 두려움으로 다스리기보다, 사랑으로 다스리기를 원합니다.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에 따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을 빌미로 강한 자를 통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두들 헷갈립니다.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고 관계를 좌지우지하려 드는 행위를 비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상대가 그 사랑을 빌미로 나를 통제하려 두어선 존중하는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약한 자의 무기는 ‘사랑’뿐입니다. 그래서 자꾸 ‘사랑’만 강조하고 상대의 연민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그 약한 자들은 관계가 위기에 빠져들면, 그 감사의 끈을 재빠르게 끊어버리고 등을 돌려 달아납니다. 그들은 약.한.자.이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의 무기는 ‘36계 줄행랑’뿐입니다. 약한 자를 뭐라고 할 게 아닙니다. 약한 자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할 수만 있다면 둘 다를 결합할 수 있어야겠지. 그러나 하나 위에 하나를 세우려면, 먼저 두려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두려운 자는 강한 자야. 약한 자를 두려워하지는 않으니까. 먼저 리더로서의 강함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해. 들판에서 목숨을 거는 결투를 벌일 수 있어야지. 모든 약한 자는, 그런 강한 자가 자신을 보호해 주고 사랑해 주기를 원해. 자신처럼 약한 자에게 자신을 의탁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관계는 사랑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강함이 무너져서 깨어지는 거야. 사랑은 없어도 강한 존재는 살아남지. 그러나 강함은 없으면서 사랑만 남은 관계는,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지고 말아. 그래서 욕을 욕을 하면서도, 강도 같은 회사와 단체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반면, 알콩달콩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거야.

 
이쯤에서 마키아벨리가 강한 군주의 모델로 강력하게 추천한 ‘체사레 보르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교황의 아들(?)로 태어나, 교황 군의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의 통일을 꿈꾸다, 서른한 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직접 옆에서 지켜보면서 새로운 군주의 모델을 발견하고 그를 모델로 ‘군주론’을 집필합니다. 그는 영웅적인 면과 악마적인 면을 동시에 소유한 냉혹한 천재로 불립니다. 그는 납치와 독살, 성직매매와 각종 스캔들, 살인, 강간, 근친상간, 약탈 등 온갖 ‘악의 본보기’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전 이탈리아를 두려움에 떨게 하며 등장한 이 냉혹한 악마는, 프랑스와 스페인 열강 사이에서 뛰어난 정치 감각을 발휘하며 젊은 나이에 화려한 성공을 이루었고, 이탈리아 최고의 무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헌신과 충성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증오하고 비난했으나, 그의 추종자들은 그와의 친분이 파멸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에서도 결코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교황령 국가들을 정복해 나갔고 이탈리아를 강화시킨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체사레 보르자는 잔인하다고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 잔인함은 로마냐를 개혁했고, 로마냐에 단결을 가져왔으며, 질서와 복종을 회복시켰다. 반추해 보면 피렌체인들 보다 체사레가 더 자비로웠다. 피렌체인들은 잔인하다고 불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피스토이아가 유린당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_ 마키아벨리 <군주론> 中

 


날카로운 검이 부드러울 수는 없는 법이야. 그런데 약한 자들은 자꾸 부드러워지길 요구하지. 그래야 자기가 쥐어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러나 검이 부드러워지는 순간, 날카로움을 잃고 버려지는 거야. 그러면 약한 자들이 가장 먼저 떠나지. 그들은 그 검을 어떻게 해야 다시 날카롭게 만드는지 알지 못하거든. 그래서 언제 그랬냐는 듯, 쏜살같이 다른 검으로 옮겨 가는 거야.

 
후회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 부드러워졌다, 아니 약해져서 버려진 검이 다시 자기 자리를 회복하는 길은 날카로워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검이 부드러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드러움은 깃털에게서 찾고, 검에게서는 날카로움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검은 부러질지언정, 부드러울 필요가 없습니다. 부드러워지기를 요구하는 약한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체사레 보르자는 서른하나의 나이에 적과 싸우다, 엄청난 폭우 속에서 스물다섯 군데의 상처를 입고 들판에서 전사합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이곳 카미노의 도상, 비아나의 산타마리아 성당에 묻혔습니다.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강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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