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순례자 #1

in stimcity •  3 months ago




순례자 #1

+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2006년이었어. 당시 어떤 재단과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 재단에 어느 후원자 분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남은 재정을 기부를 한 거야. 그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지. 그리고 우연인지, 같은 달에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라는 책이 발간되었어. 그 책은 작가의 ‘산티아고 길’ 순례기였어. 당시 도서 예약판매 사은품이 순례자의 모습이 그려진 여권커버였는데, 그 커버를 여권에 끼우면서 직관적으로 깨달았지. ‘언젠가 여기를 가게 되겠구나. 그런데 난 걸어서는 못 간다. 자동차를 타고 가야겠다.’

 
지금은 한국에도 많이 알려졌지만, 멀린이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접할 때에는 가톨릭 신자들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길이었다고 합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여 km를 걸어서 이동하는 순례길, 그러나 멀린은 걸어서 하는 순례에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글쎄, 뭐랄까? 걸어서 하는 순례는 나의 일상이라.. 기왕이면 어릴 때 꿈이었던 ‘자동차 타고 세계 일주’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가야겠다 생각한 거지. 그리고 마음의 고통과 혼란을, 육체적 고통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내 체질에 잘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의 고통은 마음의 방법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리고 그건 미루었다 한 번의 순례로 털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순례자들에게 순례 여행은 마치 묵었던 일기를 한 번에 써 내려 가거나, 밀렸던 방학숙제를 해치우듯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삶의 문제는 반복되고 늘 되살아 납니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대처해 가지 않으면, 순례 여행에서 어떤 은혜를 경험했다 하더라도, 한여름의 소나기가 잠깐 시원해지고, 다시 습도 때문에 더 더워지듯 갈증만 더할 뿐입니다.

 


그리고 3년 뒤에 난 결국 유럽여행을 떠나게 되었지. 당연히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코스도 그렇게 잡았어. 그런데 결국 스페인에는 가지 못했어. 대신 로마에 갔지.

 
파리를 시작으로 유럽 일주를 하게 되는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스페인과 이탈리아 중에 어느 곳을 갈지 고민하게 됩니다. 두 나라를 다 가기에는 일정이 마땅치 않고 코스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기독교의 순례길에는 산티아고의 순례길 말고 두 개의 길이 더 있습니다.

 

기독교 탄생 이후 천 년 동안 세 개의 신성한 순례길이 존재했다. 누구든 그곳 중 하나를 따라 걷는 사람에게는 많은 축복과 관용이 베풀어졌다. 첫 번째 길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상징은 십자가이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로마의 방랑자’라고 불렸다. 두 번째 길은 예루살렘의 예수의 성묘(聖墓)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수상가(手相家)’라고 불렀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그를 맞아준 이들이 흔들었다는 종려나무 가지가 그 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길은 이베리아반도에 묻힌 사도 야고보의 성 유골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곳은 어느 날 밤 양치기가 들판 위에서 빛나는 별을 봤다는 장소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후 성 야고보와 성모마리아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복음서의 말씀을 가지고 그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그곳에는 콤포스텔라(별들의 들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오래지 않아 모든 기독교도 국가의 여행객들이 몰려드는 도시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 신성한 세 번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에게는 ‘순례자’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그들은 가리비 껍데기를 상징으로 선택했다.
 
_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中

 


이상하지. 왜 그때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지 않았을까? 단순한 이유였던 것 같아. 늦여름에 시작된 여행이라,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내려가지 않고 네덜란드로 올라간 거야. 점점 추워질 테니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야겠다고 말이야. 덕분에 산티아고의 길이 아닌 로마의 순례길을 가게 되었던 거지. 자연의 순리를 따랐더니 또 다른 순례길을 걷게 되었어.

 

“산티아고 순례길은 네 개의 길 중 하나일 뿐입니다. 스페이드의 길이죠. 이 길은 형제님에게 힘을 불어넣어 줄 수는 있지만, 그걸로 충분하진 않습니다.”
 
“다른 세 개는 어떤 건가요?”
 
“아마 적어도 두 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트의 길이자 성배(聖杯)의 예루살렘의 길과 클로버의 로마의 길이지요. 예루살렘의 길은 형제님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줄 겁니다. 로마의 길은 다른 세계와 소통할 수 있게 해줄 것이고요.”
 
“그럼 카드의 네 가지 패를 완성하려면 다이아몬드의 길만 있으면 되겠군요.”
 
난 농담처럼 말했다.
호르디 신부도 웃었다.
 
“그렇습니다. 다이아몬드의 길은 비밀스런 길이며, 언젠가 형제님이 그것을 알게 되더라도 아무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얘기는 접어둡시다. 그런데 가리비 껍데기는 어디에 있나요?”
 
_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中

 
작가에 의하면 로마의 순례길은 '직관의 길'입니다. 다른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해 주지요. 그리고 그 소통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은 ‘카리스마’입니다.

 

“나도 놀랐어요. 그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행하는 의례가 아니거든요. 그건 로마 순례길에서 행하는 람의 의례들에 속하는 카리스마입니다.”
(그리스어로 카리스마(charisma)는 성령에 의해 주어진 예언, 기적 따위를 행하는 능력을 뜻한다.)
 
카리스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했지만 나는 그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달라고 청했다.
 
“카리스마는 성령(聖靈)이 선물로 준, 우리 각자가 타고나는 은사입니다. 치유의 은사, 기적을 행하는 은사, 예언의 은사 등이죠. 당신은 방언의 은사를 경험한 겁니다. 성령강림 대축일에 사도들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은사죠. 방언의 은사는 성령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힘 있는 연설을 할 때나 당신의 경우처럼 마귀를 쫓는 의식을 행하거나 지혜를 발휘할 때 사용됩니다. 순례길에서 보낸 시간과 람의 의례는 당신 앞에 개가 나타나 것과 같은 위험으로만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의 방언의 은사를 일깨워주기도 한 것이지요. 당신이 검을 되찾고, 로마의 순례길을 따라 걸을 결심을 하지 않는 한, 그 은사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_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中

 


피식~ 웃음이 나더군. 한국에서는 교회 좀 다녔다 하는 사람들, 기도원 좀 다녔다 하는 사람들이라면 개나 소나 다하는 게 방언인데 말이야. 그런데 이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가 싶었어. 꽤나 여러 차례 반복해서 보았는데, 이런 대목들이 처음 읽는 내용처럼 새롭게 다가오더라구. ‘아, 그러니까 지난 첫 번째 유럽여행은 로마의 길을 순례했던 거구나..’ 작가가 책에서 말하고 있는 카리스마와 그에 관련된 람의 의례들 말이야. 그건 마법사에게는 익숙한 것들이지.

 
치유와 기적, 방언과 예언.. 카리스마와 관련된 수많은 행위들과 의식들. 굳이 저 비밀스러워 보이는 람의 의례를 따르지 않더라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이 나라에서 카리스마를 경험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그러한 열정과 성령의 역사들이 많이 사그러 들었으나, 멀린은 그 어린 마법사의 시절, 이러한 카리스마적 열정에 휩싸여 자신의 전 생애를 신에게, 성령에게 의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카리스마적 경험과 또한 그만큼이나 파괴적인 기적의 이면을 거쳐 오며, 어린 마법사의 미숙함을 벗어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로 갔었던 거구나. 로마의 순례길을 마치려고 말이야. 이해가 되었어. 왜 지난 유럽여행 때 산티아고가 아닌 로마로 갔어야 했는지 말이야. 카리스마의 길이라면 충분히 걸었지. 나도 한때 작가가 말한 것처럼 ‘세상에는 비밀과 신비한 길들이 숨어 있고,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것들을 이해하고 주관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영적 탐색을 해 왔었거든. 그리고 그 길은 로마에서 종료되었고 다음은 산티아고의 길이었던 거야. 힘을 불어넣어 준다는 산티아고의 길은 작가의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길’이었지. 그리고 그 순례는 프랑스의 아를에서 시작되었어.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순례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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