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화해하기

in #stimcity3 years ago (edited)

어제는 아빠와 어렸을 때 자주 가던 식당에서 고기를 먹고, 아빠가 오래 가보고 싶었다는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물어볼 것이 있어 급하게 전주에 내려온 것인데, 내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빠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허망했지만, 그 덕분에 아빠와 둘이서 보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중1 때 음악을 하겠다고 선언한 후로 아빠와는 23살이 되어 다시 대학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는(어쩌면 졸업하고 한참 후까지도) 기묘한 냉전이 이어졌다. 학창 시절은 서로 싸우느라 바빴고, 성인이 된 후로는 아빠를 포기하고 피하게 됐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빠와 2~3년 정도 말을 섞지 않은 적도 있는데, 그때는 엄마-나-아빠-동생 네 가족이 모여도 어딘가 고장 난듯한, 불편한 기색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2018년 즈음부터 아빠와 친해지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아빠를 이해할 수는 없으나 우리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아빠와 허물없이 지내는 동생만큼 아빠를 친근하게 느낄 순 없었고, 그 어색함 때문에 아빠와 나 사이에는 엄마나 동생이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아빠와 단둘이 식사를 하는 경험은 내게는 특별하면서도 두려운 일이었다. 해본 적이 없어서 가늠도 되지 않는...


아빠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즐거웠다. 나는 수많은 질문을 했고, 아빠는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질문으로부터 파생되는 말들을 여럿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나의 뿌리인 아빠의 모습을 좇으며 어떤 아빠의 성질이 나에게로 왔는지를 계속 확인했고,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제서야 아빠를 이해하게 될 것만 같았다.


저번 추석 엄마와 화해하면서 막연히 아빠와도 화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아빠는 내게 너무 멀게만 느껴져 아빠에게 과거의 상처에 대해 말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그리고 그 얘기를 하면 아빠가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 언제 할 수 있을지 늘 고민이었다.

그런데 아빠와 술집에서 대화를 하는 중에, 대뜸 그 이야기가 나왔다. 고민이 무색할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말이 나와 나도 깜짝 놀랐다. 아빠 그때 나에게 그랬던 것 기억나? 아빠는 역시나 기억하지 못했다. 자기가 그랬냐며 몇 번을 되물었고, 나는 그랬어. 그랬으니까 빨리 사과해라고 말했다. 아빠는 두 개의 사건에 대해 둘 다 미안하다고 말했고, 나는 그것만으로 아주 오랜 숙제가 풀린 기분이 들었다.


아빠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나에게 상처였던 일, 그것은 나에겐 상처였지만 돌아보니 그것이 아빠가 삶을 살아온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미워서가 아니고, 아빠 자신이 스스로를 그렇게 대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빠와 어릴적 살던 집 근처를 걸으면서, 실은 나 중3 때 독서실 간다고 하고 맨날 버스 타고 돌아다니면서 음악 들었어. 그 시간이 너무 좋았어.라고 털어놓았다. 아빠는 억울하다며 웃었다. 아빠와 술자리를 마치면서는 아주아주 당연하지만, 그래서 꼭 대답을 듣고 싶었던 질문을 용기 내 할 수 있었다.

아빠, 내가 태어날 때 기뻤어?
당연히 기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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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머니나.. (읽어도 되는 글일까나요..)

ㅎㅎ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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