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4 꿈과 음악 사이 어딘가]'랏소베어를 안고 자는 남자'를 읽고 떠오르는 지난 기억들(2)

in kr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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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속된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게. 그녀와 함께하는 미래를 중심으로 계획된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후,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지나치는 눈 앞의 열차를 타고 어디로든 갈 수 있었지만 동시에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야속하게도 내 이런 상황에는 아랑곳없이 오가는 열차를 하염없이 그저 바라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살아내야만 했기에 누군가를 위한, 무언가를 위한 삶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렇게 역 앞에서 서성이기를 한참, 약효를 보기 시작하던 어느 날 작은 용기를 내게 되었다. 어차피 목적지를 잃었으니 어디로 향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싶었다. 어느날은 열차 색깔이 마음에 들어 열차에 올랐고, 어느날은 열차 내 자판기를 이용하려고 올랐고, 어느날은 열차 좌석 기울기가 한숨자기 안성맞춤이라 올랐다. 종착역이 어디든 내리고 싶을 때 내렸고 또 다시 다른 열차에 올랐다. 열차 곳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기타도 치고 우스꽝스러운 춤도 추고 술도 진탕 마셨다. 하루종일 책상머리에 앉아 논문을 쓰던 이전의 나를 알던 누군가가 보았다면 놀랄만큼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내 모습을 발견해가는 일이 마냥 나쁘진 않았다.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뻥 뚫려 메워지지 않는 가슴 속 구멍에는 다른 수가 없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 아주 느리게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행복해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공연 당일, 나는 리허설에서도 예고되지 않았던 지독한 몸치 본능을 뽐내며 단숨에 그 날의 최대 화제거리로 떠올랐다. 공연이 끝나고 여러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도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어 두 손으로 가린 손가락 사이로 마치 흐물거리는 오징어 다리와 같은 몸짓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이 모든게 춤을 눈과 머리로만 배운 탓이었다. 공연 끝 순서, 그렇게 마지막 팀을 기대하고 있던 관객 모두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어찌됐든 2달 여 간 준비한 공연을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에 뒷풀이에서 연거푸 잔을 들이켰다. 술만 취하면 없어지는 눈을 치켜 뜨고 찢어지는 입을 고쳐 다물기를 몇번, 어느 순간 뒷풀이는 3차에 다다라 있었다. 이미 쓰레기가 되어버린 몸에게 부어지는 액체는 술이든 물이든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의식이 들면 잔을 들이키고 의식을 잃으면 또 얼마간 엎드려 있었다. 그렇게 3차까지 오는 동안 먼저 자리를 뜬 사람들을 제하고 남은 인원 중에 내 앞자리에 앉았던 지금의 아내가 있었다. 후에 아내에게 그 당시 뭐가 좋았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엎드려 있을만큼 있었던지 눈을 반쯤 감고 술잔을 찾았다. 시선이 닿는 곳에 1, 2차에서 보지 못한 얼굴이 있었다. 같이 공연을 준비한 다른 팀의 누나 친구였다. 와이프의 기억에 뜬건지 감은 건지 모를 눈으로 원인모를 베시시 웃음을 짓고는 꼬부라질대로 꼬부라진 혀로 이름을 묻는데, 압권은 조개탕에 손 한쪽을 담그고 있었단다. 그 모습이 착해 보였다는데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다. 굳이 이유를 찾으려면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만남과 헤어짐 모두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마음의 영역이다.

'사람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는 하림의 유명한 노래가 있다.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었다. 여전히 하림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인지도. 누군가를 잊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만난 적도 없지만 내심 드라마틱한 마음의 회복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온 마음을 다 잃어버린 탓에 누군가에게 건네줄 마음의 여유가 내겐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2년 넘게 만나는 동안, 아내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는 술기운을 빌려 매번 똑같은 레파토리의 얘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날 만나는 거야?"

차마 맨정신에는 자존심이 상해 말하지 못하고 대체 사귀는 남자친구라는 작자가 자신에게 관심은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무심하니 이래저래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잔뜩 웅크린 마음인지라 다툼이라도 일어날 때면 여자친구를 감싸주기 보다는 모나고 자기방어적인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으니, 참 많은 눈물을 보이게 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조개탕에 손을 담그고 있는 만취한 남자가 맘에 들었다는 얘기 못지 않게 더 신기한 일은 그 긴 시간동안 잦은 내 열병에도 곁을 지켜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내를 시험하려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이 사람은 나를 떠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함께하는 일이 너무나 익숙할만큼 자연스러워 졌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게.

그로부터 좌충우돌 부딪혀 가며 결혼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떠올리기 전까지는 또 3년이라는 긴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지금의 아내는 그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어두운 터널 속에 나를 홀로 두고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곧 우리가 늘 신기해 하는 결혼이라는 걸 한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다. 여전히 함께 웃고 여전히 때로는 서로 다툰다. 그 날 이후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와 같은 해피 엔딩이란 건 없다. 그저 잠자리에 들기 전, 이제 막 태어나 100일을 향해가는 아이와 육아에 지쳐 쓰러진 아내의 자는 얼굴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 순간의 행복에 감사할 뿐이다. 앞으로 우리 가족의 삶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삶은 우리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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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하시는 분인가요? 글도 너무 잘 쓰시네요!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가 (일시적으로) 될수 있지 않을까 해요. 다만 그런것처럼 보인다는게 문제지만요. 언젠가는 상처도 추억이 되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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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업으로 삼고 있진 않습니다.^^ 저같은 경우 일시적 효과도 없더라구요.ㅎㅎ 상처라 할건 이제 없구요. 그저 이제는 굳어질대로 굳어진 흉터를 한번씩 메만져보곤 하는 거죠. 댓글 감사합니다.^^

짱짱맨 출석부 호출로 왔습니다.

크흐 너무 멋진 이야기네요-
역시 사람의 마음을 여는 건 아낌없이 주는 사랑인 듯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을 지키는 건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가능한 거겠죠!! 이런 사랑을 경험한 건 세상 사는 데 정말 큰 어드밴티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