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17 꿈과 음악 사이 어딘가] 잊고 지낸 꿈, 제주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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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언제 비가 올지 모르니 비닐을 씌운 통기타를 둘러메고 오토바이를 렌트해 제주 곳곳을 누볐다. 모두가 알만한 관광지는 이미 이전에 둘러본 적이 있었고 관광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좀 더 다른 목적이 필요했다. 뻥 뚫려버린 가슴을 무엇으로든 틀어 막아버리고만 싶었다. 그게 무엇이든. 모르겠다. 왜 그런 컨셉을 잡았는지.

'제주의 오름을 보고 오자.'

바다도 산도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뭔가 제주의 오름은 신비로운 곳으로 느껴졌다. 마치 그곳에서는 무슨 죄라도 고백한다면 다 사함받을 수 있을 것같은 성지처럼. 방법은 간단했다. 적당히 봉우리가 보이는 곳이면 일단 가고 보는 것이다. 땡기면 오토바이를 세우고 아님 그냥 지나치는 것으로. 그저 마음이 동하는대로. 한 이름이 적힌 오름을 지나쳤다 무언가를 놓친 듯 다시 되돌아갔다. 방역 문제로 출입이 통제된 팻말이 적힌 오름이었다. 주변에 인가가 없는 외진 길이었지만 금기라도 깨기 전인듯 좌우를 살피고는 빈틈을 찾아 들어갔다. 오름을 오르는 동안에도 아래를 내려다 보며 지나치는 경찰차는 없는지, 오토바이는 무사한지를 살폈다. 저기 봉우리 넘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정 거리까지만 시야를 허락하는 안개의 자욱함이 나를 홀려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게 했다. 봉우리에 올라 제일 먼저 한 일은 이어폰을 빼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속에서 들리지 않지만 들을 수 있는 것에까지 귀 기울여 모든 감각을 열어두고 싶었다. 무엇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은 그 곳은 흔히 우리가 자연이라 부르던 그 자연이 아니었다.

"역시 맑은 공기를 마시려면 산에 와야지, 바다를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이는게 더 바랄게 없구나.'

그 날 알게 되었다. 진짜 자연은 이런 얘기들이 필요없다는걸. 그 순간 나는 풀밭을 거닐며 풀을 뜯는 한마리의 말이었고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들꽃 한송이었고 말발자국이었고 배설물이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그런 자연과 일체감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어떤 말도, 들꽃도, 풀도, 우주선이라도 봉우리 중심으로 떨어진듯 아슬아슬한 높이 아래 동그랗게 모여자란 나무들도 내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나도 그들과 같은 자연의 일부였다. 주변의 말들처럼 얼마간 걷다, 얼마간 멈춰섰다 반복하기를 몇번, 신비체험이라도 한 것처럼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다놓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떤 돌떵이라도 틀어 막아버리려던 가슴 속 구멍에 스케치가 그려져 있었다. 그 후 제주는 내게 또 다른 고향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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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때처럼 일은 뒷전이고 회사 동료와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그 동안 내 자유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은 동료는 영어 원서 얘기를 듣자마자 생각난 지인이 있다며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지인은 제주도로 내려가 학원강의를 겸하면서 민박집을 운영한단다. 그 지인이 연락만 닿으면 늘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가 있다는데, 실제로 지인과 만난 자리에서 몰라보게 살이 찐 지인과의 대화가 압권!

"언니, 나 제주도 내려와서 너무 행복해요."

"야, 근데 너 살이 왜 이렇게 많이 쪘어?"

"언니, 행복하니깐 술이 너무 맛있어요. ㅎㅎ"

맙소사, 제주도라니! 제주가 내게 어떤 곳인데, 어떤 의미인데. 나는 제주를 잊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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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10년 여름이었다. 인간극장 5부작에서 제주도에서 삶의 터전을 새롭게 마련한 부부의 모습을 비춰줬었다. 캠퍼스 커플로 만나 졸업 후 광고회사에서 4년을 일한 유광국씨는 당시 여자친구였던 염정은씨에게 결혼을 해서 함께 제주도로 가든지 아니면 헤어지던지 하자 선언한다. 함께 제주에 내려온 두 사람은 이제 갓 돌이 넘은 딸과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익숙한 일상에서 내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삶을 이미 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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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보지 않았지만 유광국이라는 사람은 내가 하나되었던 자연을 그도 체험한 사람같았다. 눈을 뜨면 출근하기 바쁜 도시인들과 다르게 모든 걸 자연스러움에 맡기는 그는 잠에서 깨면 옥상에 올라가 몸이 깨어날 때까지 한참을 앉아 있고 배꼽시계가 울릴때까지 음식을 찾지 않는다. 출판사 책표지 디자이너인 그는 프리랜서로 온라인상에서 모든 일처리가 가능하기에 업무 시간도 자유로워 오토바이를 타고 가까운 물가로 가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기타도 치고 장보러 나갔다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 지나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무엇보다 아내와 딸과의 산책을 즐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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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잊고 지낸 내 꿈이 하나 다시 되살아났다. 8년전에는 제주도에 살고 싶어도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소길댁 이효리가 방송을 통해 제주를 널리 알리고 있을 때에도 아무 감흥이 없었는데 문득 예고없던 수다에서 다시 찾은 나의 꿈. 이렇듯 삶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와이프에게 급 카톡을 넣어본다.

"여보, 지금 당장은 아니구. 조금 있다가 제주도에 가서 사는 거 어떻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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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짱맨 출석부 호출로 왔습니다.

아.... 저도 이 방송 봤어요
이 방송보고 저도 제주도 가서 살고 싶단 생각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네요ㅠㅠ

저도 지금 당장은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마음의 준비라도 미리 해두려구요. 그 언젠가 제주에서 꼭 뵜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또 제 마음을 흔들어 놓으시는군요~ ㅎㅎ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참아야 합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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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제주도 좋아합니다.
비오는 제주도 좋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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