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의 뻘쭘한 순간들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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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에 뽑혀 극장에서 상영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피하고 싶은 뻘쭘한 순간들도 있다. 장편과 달리 단편영화는 보통 3~5편이 한 섹션으로 구성된다. 상영이 끝나면 무대에서 GV(guest talk: 관객과의 대화)가 이어진다. 진행자가 단편 감독들에게 던지는 첫 질문, "어떻게 이 영화를 만들게 되셨나요?" 를 줄줄이 답하고 나면 이제 어색한 시간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럼 마이크를 관객에게 돌려보겠습니다. 질문 있으신 분?".. 극장에 정적이 흐른다. 감독들은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어디에도 눈을 두지 못한다. 거듭된 진행자의 요구에 이윽고 관객들이 손을 들기 시작한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첫 관객의 질문은 내 영화에 관한 것이 아니다. 두 번째 관객의 질문도 내 영화에 관한 것이 아니다. 기대했던 세 번째 관객의 질문조차 내 것이 아니다. 최소 한 차례의 질문으로 구원받은 감독들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바뀌고 나는 버려진 비닐봉지처럼 앉아 있다. 이를 알아챈 진행자가 나를 위한답시고 치는 멘트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 "오쟁 감독에게 질문하실 분은 없나요?" 또 정적이 흐른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이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 지나가길 간절히 바란다. 아무 질문이나 해줘. 제발. 내게 시선이 쏠린 이 상황을 모면할 수만 있다면 지금 입고 있는 팬티 색깔에 대해서도 성심성의껏 답할 수 있다고 제발! 끝내 구원자가 등장하지 않으면 진행자가 대신 질문을 하기도 하지만 기적처럼 누군가가 손을 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주셨던 어떤 분의 질문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마 <덩어리> 상영 후였을 것이다. "오쟁 감독님은 원래..음 .. 그러니까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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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개 혼자 북치고 장구쳐서 영화를 만든다. 남들처럼 조연출, 프로듀서, 촬영감독 등 제작진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규모의 작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내 영화에는 <봄날> 정도를 제외하면 전문 배우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독립 영화제든 행사 기간을 포함해서 전후로 <사전 감독의 밤>, <영화인의 밤> 같은 네트워킹 파티를 인근 술집에서 진행한다. 제작진, 배우 등 대동할 사람이 전혀 없고, 전공이 아니라 영화판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나같은 감독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그 행사에 참여한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도 있겠지? 라는 예상은 매번 무너진다. 나만 빼고 서로 다들 아는 사이인 것만 같다. 어느 테이블에 앉아도 소외당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몰려온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극영화 감독들이 부러운 순간이다. 물론 나같은 외톨이를 조우하거나 혹은 테이블 케미가 잘 맞아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군중 속의 고독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체험한다. 스마트폰을 켰다가 껐다가 켰다가 껐다가 켰다가 껐다가 켰다가 끄고 잠시 고개를 올려 주위를 살피고 다시 스마트폰을 켰다가 껐다가 켰다가 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뻘쭘함. 어제도 한 영화제의 공식 뒷풀이에 홀로 참석했다. 이 날 역시 나는 쭈삣쭈삣거리다가 어색한 리액션을 남발하다가 깊은 침묵이 흐르자 그 정적을 참지 못하고 옆에 앉아있던 한 남성감독을 향해 정말 아무말을 뱉어버렸다. "머릿결이 참 곱네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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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진짜 뻘쭘할 것 같아요;;

네 막 생각만해도 막 어쩔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좀 질문에 인색하죠. 저도 그렇긴 하지만.ㅎㅎ;;

그래서 저는 관객이 될 때는 일부러 소외된 감독에게 질문해줍니다 ㅎㅎ

으~~~ 침묵의 무거움 ㅠㅠ

침묵을 서로 공유하다가 못참고 서로 말을 건네는 타이밍이 부딪힐 때의 그 어색함 !

ㅋㅋ 막줄에서 뿜었네요

역시 남자는 머릿결이 고와야.

음..... 옆 머릿결 고운 감독의 표정을 상상해 봐야겠어요.
의외로 흐뭇해 했을 수도......

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다며 좋아하시더라구요. ㅎㅎ

요즘들어 인싸 아싸라는 말이 와닿네요ㅎㅎㅎ

그것도 핵인싸 핵아싸로 나뉘더라구요...ㅎㅎㅎㅎㅎ

공감하면서 읽다가 마지막 줄에 뿜었어요. ㅋㅋㅋ

ㅎㅎㅎ 글 소재가 될 수 있다면 뻘쭘함 따위야.. 감내할만하네요 ㅎㅎ

오감독님 다음 GV는 장안의 화제가 될 것입니다. 팬클럽이 움직일 테니까요. 후후.

오홋......!!! 부지런히 작업해서 상영소식 또 만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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