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내가 한국에서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in #kr7 years ago (edited)

지인이 추천한 '효리네민박' 이라는 프로그램을 뒤늦게 보고 있다. 제주도의 노을과 바다는 아름다웠고, 잔잔히 깔리는 음악과 출연자들의 대화도 차분한 위로가 되었다. 속도와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을 느끼고 있으니 마음이 편했다. 내가 지금 이 곳에서 누리는 일상과 닮아 있었다.

손님 하나가 이효리에게 30대 여성을 위한 조언을 구했더니 제주에서도 마음이 지옥인 사람이 있다고, 어디에 있든 만족하며 살면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치 제주도에 살면, 지금 있는 곳을 떠나기만 하면, 모든 게 다 행복해질 것만 같은 사람들에게 나도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한때 유행했던 '헬조선'이라는 말이 너무 싫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며 불행을 자처하고 남을 탓하기만 하는 이들의 모습에 이상하게 화가 났다. 한국의 사회구조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처음부터 날 위해 만들어진 낙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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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더 보잘 것 없고 나약해 환경의 영향을 받고야 만다. 바퀴벌레가 득실대고 녹물이 나오고 매일같이 하수구가 막히고 온종일 캄캄한 오래된 집에 살다가 햇볕이 들고 환기가 되고 수압도 좋은 깨끗한 새집에 오니 일상이 완전히 바뀐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인생이 바뀌어 가는 것처럼.

우선 해가 드니 아침에 일어나게 되었다. 빨래가 잘마르니 세탁기도 돌리고 환기가 잘되니 청소도 자주한다. 하수구가 막히지 않으니 설거지나 샤워도 순조롭고 바퀴벌레가 없으니 마음놓고 요리한다. 햇살이 내리쬐는 거실 식탁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바닥에 요가매트를 깔고 스트레칭도 한다. 그날그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요즘은 아주 오랜만에 피아노를 치고 있다. 전에는 집이 싫어 밖으로 도느라 지출이 잦았지만 이젠 하루종일 집에 있어도 참 편안하고 좋다. 잠들기 전에는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책을 읽는다. 사놓고 몇년동안 펼쳐보지도 못했던 책들이다. 사실 한국집에 비하면 불편하고 부족한 것이 셀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나은 걸 안다고 해서 이 행복이 가치없는 것이 아니다. 이게 2017년 하반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나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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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한국에서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작년 봄, 처음으로 타지생활에 지쳐서 잠시라도 정착해보자는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갔는데 처음 두달 너무나 괴로웠다. 관심인지 습관인지 모를 사람들의 질문과 참견, 온갖 걱정을 폭우처럼 맞고 있노라니 점점 오한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들처럼 살지 않는다는 불안과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 거다. 한국인으로서, 30대 여성으로서, 요리사로서, 자식으로서 내 역할을 다하지 않는 나는 틀려먹은 사람이었다. 마치 정신병원에 있는 것처럼,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모두 나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처럼 살아야 하는 건지, 어느 누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 그들과 나를 분리하면서부터다.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30대 여성, 동종업계,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속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외국에 있을 때처럼 잠시 머무는 관찰자가 되어 그곳만이 주는 풍경과 에너지에 집중하니 오히려 그 어디보다 한국이 편하고 좋았다. 아마도 얼마남지 않았을, 부모님과 부대끼며 보내는 하루하루가 감사했고, 익숙한 사람들, 언어, 음식, 풍경 하나하나가 귀하디 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폭우 속에 떨고 있던 내게 큰 우산이 되어주었던 건, 불안하고 무겁고 죄송스런 마음을 겨우겨우 숨긴 채 제가 어떻게 살면 좋으시겠어요? 라고 여쭤보았을 때 뭘 그런 걸 묻냐는듯 니 마음대로 살아라? 라고 하셨던 아빠의 한마디였다. 대수롭지 않은 척 알았다며 방에 들어와서는 밀려드는 안도감과 고마움에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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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학습의 부족으로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거나 아주 교만하지 않고서야 남에게 본인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누가 아무리 요란하게 오지랖을 부려대도 정작 나를 가장 걱정하는 것도, 가장 사랑하는 것도 나 자신이며 나는 나대로 살아도 되는 존재라고... 우리는 소란한 가운데,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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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란한 가운데,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한다.

글을너무 잘쓰셔요...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읽고 내려왔습니다.
아버지의 한마디가 너무 좋네요..
니마음대로 살아라....
좋은 아버지를 두신거 같아요. ^^
앞으로 자주 찾아 뵐게요 ~~

@lovehm1223 님 안녕하세요 :-) 댓글만으로도 너무 반가웠는데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시고 좋은 말씀까지 해주시니 제가 어떻게 해야할지.. 정말 고맙습니다. 아직 칭찬이 낯설어서 사실 몸둘바를 잘 모르겠어요. 게다가.. 제가 평소와 다른 보상액에 놀라 살펴보니 제 글을 @leesunmoo 님께 추천해주셨더라고요. lovehm1223님 덕분에 선물도 받고.. 제가 이를 어찌 갚죠? ㅜㅜ

아버님의 말씀에 어쩐지 저도 마음이 메꿔진 기분을 받습니다.
보팅&팔로우 합니다.
자주 소통하는 이웃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goodcontent4u 님 안녕하세요 :-) 저 스스로를 위로하느라 쓴 글이었는데, 굿컨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더 고맙습니다. 저도 팔로우했습니다. 앞으로 자주 뵙기를 기대해요 :-)

이렇게 좋은 글을 만나기 위해 저는 스티밋을 하는 것 같습니다 ^^

조언과 참견의 경계는 아주 모호해서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삶이란 참 어렵고, 아이러니하게도 어려워서 가치있는 것 같기도하고.. 참 모를 녀석이니 앞으로도 알아가야겠습니다. ^^

아침부터 좋은 글을 보며 출근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yanhkr 님, 저의 넋두리를 이렇게 좋게 봐주시니 제가 어찌해야 하나요!ㅜㅜ 우리 모두가 삶이 처음이고, 본인의 삶 밖에 경험하지 못했다보니 평생 시행착오를 겪나 봅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메뉴얼만 읽다가 끝나는 게 인생이라고.. ryanhkr님의 과찬 덕분에 쬐끔 울적했던 마음에 무지개가 떴습니다 :D 감사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과정중에 살고 있으니깐요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사는 것 같습니다.

제가 springfield님께 무지개를 띄우는 사람이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

@ryanhkr 님 ㅜㅜ 그저 고맙습니다!

My Feed 에 제 글이 떠 놀라서 보니 @ryanhkr 님 리스팀까지 해주고 가셨네요 ㅜㅜ 이런 적은 처음이라 지금 혼자 너무 감격하고 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

제가 처음이었나요?
그럼 저에게도 의미가 생겨버렸네요 ^^

감사합니다.

'헬조선'인 이유는 남들과 비교하는 가운데 정답이 존재하는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겠죠. 말씀처럼 우리 자신을 믿고 살아도 될텐데.. 참 피곤한 세상입니다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군요^^

@coldbeec 님 안녕하세요 :-) 오늘 한국에서 놀러온 초등교사친구와 얘기하면서도 coldbeec 님이 말씀하신 그 '정답' 얘기가 나왔더랬어요. 아이들이 틀리는 것이 무섭고 부끄러워, 스스로 생각하기 전에 정답부터 맞추려고 한다고요. 정답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게.. 오늘따라 슬프게 들리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헬조선이라 하시는 분들도 언젠가 때가 되면 그 헬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던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

@noah326 님 :-) 동감합니다. 저 역시 그 중에 하나일 지 모르고요. 헬조선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한국의 단점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외국에 나와서 보면 강점으로 보일 때도 있고요. 낯선 것이 받아들여지는 그 시간 속에서 아무쪼록 모두 덜 상처받고 덜 외로웠으면 좋겠습니다.

공감되는 좋은글입니다..니마음대로살아라..갑자기 숨이확 놓이게되죠
헬조선이란 말은 저도 진짜싫습니다!왜 그런 말을 내뱉는지 이해도 안가고요
아침에 공감가는 글을 읽으니 왠지 하루가 좋을거같아요~행복하게 보내세요~♡

@happy4u 님 :-) happy4u 님의 아이디를 보며 저도 조금 더 행복해졌습니다. 네 마음대로 살라는 말이 저리 숨통 트이고 고마운 말인 줄 몰랐어요. 해외에 있으며 비교하지 않고 느긋하게 살다가 한국에 갔더니 제가 잘 적응을 못했던 모양이예요. happy4u 님의 댓글에 힘과 위로를 받습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

감사히 보았습니다.

@leesunmoo 님, 운수가 좋은 것 같으니 당분간 설렁탕은 피해야겠습니다. 들려주시고 선물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팀잇을 하다보니 이런 일도 있군요 ^^

소울메이트가 여기있을까요..^^?
제 부모님께서도 늘 "너 알아서해" "너 마음대로 해"라고 말씀해주셔요.
그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말이지만 훗날 제가 자식을 낳더라도 제 자식들에게 꼭 그렇게 말할 것 같아요. 본인의 선택에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을 그 어떤 말이나 상황보다 가슴깊이 깨닿게 하더라구요..^^
저도 지금 그렇게.. 한국에 살아보고 있네요- 제 자리를 그리워하면서 말이에요.ㅎㅎ 아직은 이렇다-라고 결정하기가 쉽지 않아요.

@homechelin 님, 소름이 쫙 ㅎㅎㅎ 제 마음속을 비추는 글을 써주셨어요. 우리를 믿어주시는 부모님을 만났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저에게 그런 짐(?)을 지우시는 아빠가 살짝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복에 겨운 소리죠, 뭐. 제가 아직 스팀잇을 한 시간이 오래지 않아 홈슐랭님을 충분히 알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작은 도움을 드릴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듭니다 :-)

아아.. 작년에 친구가 해준 말이 생각나네요.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보다 외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게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스프링필드님대로 살아도 된다는 결론 멋지십니다.

@saloon1st 님, saloon1st 님은 늘 저를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댓글을 달아주시네요. 잊었던 것도, 몰랐던 것도.. 그러고보면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동성친구들이 저도 적지 않네요. 외국에서도 여러가지 차별은 존재하지만.. 같은 한국인에게 받는 상처, 내 나라에게 받는 아픔보다는 아무래도 덜한것 같아요.

소란한 가운데,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한다.

정말 공감되고 위로되는 말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danihwang 다니님! 저는 다니님의 방문만으로도 위로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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