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무경

in #kr6 years ago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물질적 또는 관념적 현상세계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변현한 '가'의 현상이다. 결국 식을 떠난 독립된 실체로서의 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식무경'은, 경으로 전변하는 그 심층의 아뢰야식의 활동을 자각함으로써 '현상초월적 주체의식' 또는 '개체 안의 개체초월적인 보편적 일심'을 얻고자하는 노력, 즉 견성하여 성불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말할 수 있다.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한자경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개체적 물질이나 사유를 통해 경험하는 보편적 관념은 어쩌면 감각과 사유를 통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므로 감각과 사유와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실재한다기보다 그렇게 보도록 만든 마음의 산물인데 마음을 따져보면, 근원은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집단 무의식의 원형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 원형을 바라보는 태도를 관조함으로써, 즉 내적 인격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의식화함으로써 전체정신의 중심인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려 노력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개성화 즉, individuation을 이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보면 한선생님의 글은 정확하게 융의 이야기와 들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융이 일원론적인 관점에서 물질이나 관념의 실재를 부정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그래도 신은 여기에 있다'고 한 것만을 보고 종교와 같은 외적 초월주의를 주장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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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글을 보니 인간이 세계에 대해 반응하는 시간이 0.25초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즉 감각으로 안식하는 대상은 이미 과거의 대상이란 의미입니다.

0.25초였군요. 감사합니다.

EP(evoked potential, 유발 전위)로 어떤 자극이 감각 기관에 도달한 순간, 감각기관에서 보여지는 전위부터 감각중추에 도달한 순간까지의 전위를 관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수학적 과정을 거쳐 사인웨이브로 그려집니다. 그것을 통해 그 시간을 측정하죠.

이런 생각도 듭니다. 단지 '과거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지금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도 일리 있지만 그렇다면 '최소한 0.25초 전에는 실재했던 것인가,'에 대한 답은? 그러니까 비록 이 순간 내가 감각했던 대상은 존재하지 않지만 0.25초 후에 내게 감각될 대상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유식학을 잘 모르지만 그때 이미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에 많이 놀랐었습니다. 잘은 몰라도 제가 알고 있는 심리나 인지 관련 지식은 그 분들께 진 빚이 많음을 압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네 저도 역시 유식학이 대단한 거 같습니다. 0.25초 전에는 실재하였는가, 아니면 오직 마음일 뿐(유식)인가. 아니면 실재와 마음이 같이 만들어 가는 것인가. 형이상학적인 질문입니다. ^~^

잘 읽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有識無境에 대한 입장에서도 불교안에서 여러 논쟁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자립논증학파는 그야말로 식만 있고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중관유식학파는 식과 대상이 둘다 존재하는데 찰나생 찰나멸하면서 존재한다(무상). 따라서 실체가 없다(무아)고 결론내리는 것 같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직접 확인된다네요. 저는 아무리 수행해도 번뇌가 많은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생각만 있지요. 확인할 길이 없어 머리로 그냥 이해하고 믿을 뿐입니다. 그리고 유식을 사실 yogacara 요가수행자의 증지(證智)라고 하더라고요. 즉 실천수행을 통해 확인했다는 것이지요. 지금 사람들이 이해하듯이 사변철학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수행의 주체은 제육의식(표층의식)이라는 것이지요.

이제사 선생님의 글이 조금 들어옵니다. 사실 어젯 밤, 두어권 일전에 봤던 책을 살짝 본 덕입니다.

주장의 주고받음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저 역시 머리로만 이해하려는 오랜 습관은 게으름때문입니다. 수행이 되지않으면 참 공허해지는데요. 수행이 되면 굳이 발설하지 않아도 될 듯 하구요.

6식이 주체란 말씀은 심리학에서의 의식은 자체가 자율성을 갖는 것은 아니고 자율성의 주체로 ego를 따로 설정한 탓이고 6식은 심리학의 의식과 유사해도 그 자체가 생명력이랄까 자율성이랄까를 갖는 것으로 본 때문은 아닌지요.

선생님 말씀을 통해서 저는배우고 있지 주장을 주고받는 것은 아닌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이해한바를 정리하는 것일뿐이구요. 저도 잘못이해하고 있을 확률이 많지요. 그런데 제 이전 습이 이과계열의 연구직이어서 그런지 직설적인 표현들이 많이 있지요. 너그럽게 용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ego와 의식을 따로보는 것인가요? ego가 자기(self)-아니마/아니무스-그림자-페르소나-자아(ego)/의식에서 ego와 의식을 따로본다면 그 의식의 역할이 혹시 감각식을 말하는 것인지요?

ps. 유식의 마음구조는 표층의식: 감각(5具意識/색성향미촉)+ 意識, 심층의식(말나식+아뢰야식), 이렇게 나누는데, 표층의식의식이 수행의 주체라는 의미였습니다. 즉 念(sati/알아차림/마음챙김)를 실행할수 있는 주체이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말나식과 아뢰야식까지 접근할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행이 깊어지면 제일 먼저 의식전변이 이루어지는데 먼저 1)의식이 묘관찰지로 2)말나식이 평등성지로 3)아뢰야식이 대원경지로 4)감각식이 성소작지로 바뀐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수행의 차제(次第)가 있다는 것이고요. (번뇌가 소멸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유식에서는 사람이 죽을때 가장 나중에 남는 것이 아뢰야식이고 태어날때 이 아뢰야식에서부터 생명이 시작된다고 하지요. 대승기신론에서는 아뢰야식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라고 하여 윤회의 주체(번뇌에 물들어져 있기때문)로 보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실체가 있는 주체는 아니지요. 계속 변하는 상속식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남방불교(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을 세가지 기능적인 면에서 분류만 합니다. 심(citta/), 의(mano), 식(vinnana)로요. 그리고 바왕가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생명지속심(life-continumm)이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인식할때는 바왕가-인식-바왕가-인식-바왕가....., 이렇게 바왕가는 계속 상속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바왕가가 사람이 죽을때는 마지막 바왕가, 태어날때기 바로 직전은 재생연결식이라고 따로 부르지요. 중문으로는 이를 명근(命根)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은데 이 개념이 후대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에서 아뢰야식으로 발전된 것 같습니다. 제가 논문을 보고 이해한 것은 아니고요. 단지 관련 불교 논서를 보다가 그렇게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설은 아닙니다.

용서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도 혹 그래서인가 궁금해서 여쭤본 것이구요. 언짢으셨던 점이 있으셨다면 오히려 제가 용서를 구합니다.

심리학에서 의식은 상태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의식화하는 것은 나, 그러니까 자아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같습니다.

6식을 심리학의 의식에 대응시키는 것같아 의식화를 하는 주체일 것이란 생각은 미쳐 못 했습니다. 해서 혹 6식은 단지 관념을 사유하는 상태뿐 아니라 의식화를 하는 주체로서의 자아 같은 개념까지를 포함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여쭤본 것입니다.

'자기(self)-아니마/아니무스-그림자-페르소나' 까지가 인격의 구조이고, 의식과 무의식은 마음의 구조인데 마음에는 다양한 인격요소가 들어있고 그 중 자기부터 페르소나의 일부까지는 무의식에 속하고 페르소나의 나머지는 의식에 속할 것 같습니다.

이고는 의식의 중심에서 이 모든 것들을 관장하는 '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미숙한 상태에선 감각만 하다가 어느 순간, 감각을 표상하고 점차 관념을 사유하는데까지 나아갈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무의식이나 페르소나의 존재를 모르겠지만 점차 성숙해지며 페르소나를 구분하고 의식을 넘어 무의식의 인격들을 의식화해 가는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전오식인 안이비설신(색성향미촉은 그 대상이고)은 감각이고 6식은 관념을 사유하는 의식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말씀하신대로 무의식에 가깝구요. 그러니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8식을 행하는 주체가 있을텐데, 즉 사띠를 행할 주체가 있을 텐데, 따로 그것이 없이 6식이 그 주체라면 6식은 의식이면서 자아인가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서 유식에선 의식과 자아라는 복잡한 개념을 따로 만들지 않고 6식 자체가 상태를 넘어서 자율성을 가진 어떤 것인가 보다 했던 것입니다.

그 이하는 제가 더 공부해보겠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저도 다시 정리를 해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다만 심리학에 대한 이해도 일천한데 껍질도 핧아보지 못 한 유식을 말씀드리는 것이 어불성설입니다. 넓게 용서와 이해를 구합니다.

추신)
주장의 주고받음이라 쓴 것은 불교의 변화혹은 발전 과정에서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부파간의 논쟁이나 또 대승, 소승 등의 논쟁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어차피 주체의 대상 인식은 대상이 주체의 감관으로 들어오는 일방적인(one-way) 작용은 아니라고 봅니다. 대상을 받아들일 주체의 체계가 항상 능동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쌍방향(two-way)라고 봅니다. 그러니 0.25초 전이든 후든 그 물리적 측정을 인식의 무슨 잣대로 삼는 건 의미없다고 봅니다. 그걸 따져서 뭘 깨달았을까요?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있는 hsalbert님께서 이리 방문해주시니 놀랍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말씀 듣고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역시 꽤 오래된 논란이기도 합니다. '유물인가, 관념인가, 이원인가, 아니면 다원인가'하고 말이죠. 뭐가 맞는지 혹은 뭐가 옳은지 사실 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관심을 갖고 있고 또 적고싶었던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0.25초란 숫자를 언급한 것은 대상의 인지가 그렇게 찰나적 순간에 이뤄진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이상적이거나 보편적인 인지라고 믿고 있는 것도 사실 따지고보면 경험의 틀을 벗어나기 어려운 습관적인 인지일 경우가 많죠.

따라서 그 순간에 더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혹은 더 주의를 기울일 때 제가 갖고 있던 그 습관의 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과거경험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와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보다 더 넓고 다양한 반응 가능성들 가운데 어느 것을 제가 선택할 수 있다 머 이런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타임라인과 대역폭의 한계가 허용하는 한은 선생님 글을 간간이 읽고 있습니다. 애초에 본문에 잡으신 주제, 크게 보아 존재는 마음의 산물이다, 라는 방향의 물음 추구는 0.25초 이전이니 이후이니 하는 물리적 측정에 구애될 필요가 없는 더 큰 틀의 생각이라 여겨서 적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셨군요. 님의 말씀 이해했습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다시 한번 제 글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님글을 열심히 읽어는 보는데 아무래도 제가 문외한인지라 전부 이해는 잘 못 하는 일인입니다. 무엇보다 최근 올려주고 계신 홀로체인은 공부 좀 해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아직 한국 소비자에게 다가오려면 한 3년은 기다려야 할 홀로체인을 굳이 지금 억지로 알아볼 필요야 없겠습니다만, '탈중심', '탈중심' '블록체인', '블록체인'이라고 노래들을 하면서 정작 탈중심을 실행하는 서비스 구축과 그에 필요한 설계적 지식의 확장은 추구하지 않고 거의 오로지 암호통화에 대한 투자와 투기에만 쏠려 있는 한국의 문화가 답답합니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아까운 청춘 자원들이 헛물을 켜느라 시간을 허비할 것으로 보입니다. 2000년 즈음 인터넷 벤처 업계에 잠시 있으면서 그 무수한 청춘 자원의 낭비를 보기도 했고요. 누구라도 홀로체인을 소개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어받을 것 같아서 알아보고 있습니다. 저 이외의 메신저들이 어느 정도 나타나면 저는 발을 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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