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아내와 나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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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할 때 선배가 써 준 사내 게시용 결혼신문 기사는 '그리 큰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기자들 끼리의 연애사는 늘 그렇듯 경찰서에서 시작되곤 한다' 정도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기자이면서 기자와 결혼했다. 기자끼리의 연애담, 결혼생활 이야기를 포스팅하자면 내용은 수십 편짜리 연재를 할 만큼이 되지만, 아직 아내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오늘은 그냥 개별 기자로서 두 사람의 성향과 일하는 방식의 차이를 적어보려고 한다.

나는 특별히 기획기사가 있지 않는 한 내일 준비는 내일 하는 편이다. 물론 내일 일정이 뭐가 있고 어떤 기사를 발제해야 할지를 대강 생각은 하고 있지만 오늘 미리 노트북 앞에 앉아서 미리 일정을 정리한다거나 발제문을 적어 놓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내는 내일 준비가 안 돼 있으면 퇴근하지 않는다. 회사 특성 상 일정은 전날 보고해야 하지만 성향부터가 그렇다.

나의 경우 장점은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는 점일 것이다.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닥쳐서 고민하고 시작해도 대체로 마감은 되니까. 미리 고민하고 걱정한 것들이 열개였는데 나중에 실제로 다가오는 건 다섯개 밖에 안 될 때도 많다. 그럼 쓸 데 없이 걱정한 게 아깝지 않나.
그래서 아내는 나보다 스트레스를 더 받는 것 같다. 쉴 때 제대로 쉬지 못한다. 내일 출근해서 일할 것들이 마음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전망'류 기사를 잘 못 쓰고 한 사안이 터졌을 때 판을 벌이는 걸 잘 못한다. 스트레이트 외에 박스기사들을 여러 꼭지 발제하는 기획안 짜는 능력이 부족하다. 아내는 잘 한다. 더군다나 요즘 인사가 꼬여서 팀장 없이 혼자 하니까 연습이 돼서 더 잘하는 것 같다.

기사를 쓸 때도 나는 취재만 다 되면 한 번에 확 써버리고 치운다. 군대에서 맞으면서 독수리타법을 면한 느린 손으로도 30~40분 만에 원고지 8~10매를 호로록 써버리기도 한다. 아내는 문장, 토씨 하나하나 신중하게 선택한다. 손은 엄청나게 빠르지만 빨리 쓰지 않는다. 빨리 써야 하는 회사에서는 단점일 수 있다.

나는 기사를 쓰고 전화를 많이 받는다. 자잘하게 틀리는 것도 있고, 미묘한 뉘앙스가 누군가에게 거슬리는 경우도 많다. 기사를 잘 못 쓰는거다. 아내에게는 그런 전화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원자료가 틀리지 않은 이상 자잘한 오류도 본 적이 없다.

기사가 나가고 난 뒤 미련을 안 갖는 건 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고쳐야 할 것은 고치지만 기왕 물을 엎어 버린 거 후회하지 않는다. 좀 더 잘 썼을 수도 있었겠지만 '상황이 그랬던 거 할 수 없지 머' 하고 넘어간다. 합리적인 핑계 뒤에 숨는 거다. 하지만 건강에 좋다.

아내는 반대다. 이미 나간 기사 갖고도 계속 곱씹으면서 아쉬워하고 후회한다. 아이템을 캐치해서 취재를 하다가 안돼서 접을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은데 나처럼 잊어버리지 못한다. 건강에 안 좋다. 이 짓 오래 하려면 나 같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기사에 댓글을 안 본다. 원체 많이 달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직접 해명 답글을 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악플 단 놈에게 현피를 신청할 수도 없다. 그냥 때리면 때리는대로 맞고만 있어야 하는데 굳이 보고 속상할 필요가 있겠나 생각한다.

아내는 종종 댓글을 다 읽는다. 아내 기사엔, 아내 회사 기사엔 댓글이 많이 달린다. 그만큼 욕도 많고 선비질 하는 인간도, 앞 뒤 사정도 모른 채 무작정 악플 달고 기레기 어쩌구 하는 뭐하는 인간인지 궁금한 부류도 많다. 아내는 그런 걸 굳이 보고 상처 받고 얼마간을 우울해 하기도 한다. 나는 아내 기사에 달린 악플을 신고한 적이 있다.

비슷한 점도 있긴 하다. 우선 소셜미디어에 자기 기사 거는 일을 잘 하지 않는다. 민망하기도 하고 기사를 자랑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자랑할 만한 기사에 관한 기준이 상당히 까다롭다. 비슷한 이유에서 기사만 썼다 하면 페북에 올리고 그러는 기자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특종보다는 한 사람을 울리는 기사를 쓰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도 그런 것 같은데 확인은 안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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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기자라니 뭔가 멋지기도 하고 엄청 힘들것 같기도 하고 ㅎㅎ 존경스럽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전직 기자셨는데 뉴스의 특성상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긴 하지만 어렸을 적 아버지와 시간을 보낸 기억이 별로 없네요.

하지만 나이가 좀 드니 기자라는 직업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이해가 되면서 아쉬움이 조금은 가셨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던 기자의 자부심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네요.

부부께서 같은 업에 있으면 피곤하기도 하지만 또 직장 얘기도 서로 많이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을듯 합니다. 두분 서로 잘 다독여 가시며 행복한 직장생활 그리고 더 중요한 가정생활 이어가시길 바랄게요.

오오 선배님의 자제분이시군요! 반갑네요. 고맙습니다.

은근슬쩍 럽스팀인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원래 시호님같았는데 지금은 아내분 같아졌어요. 확실히 시호님같았을 때가 발등에 불은 떨어져도 뒤끝 없이 속은 편했는데 말이죠. 지금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벽하고 싶어서 애를 좀 쓰는 것 같습니다. 시호님같았을 때의 결과물은 지금봐도 가끔 자뻑할 정도로 멋진데, 아내분 같을 때의 결과물에 훨씬 애정이 갑니다 ㅎㅎㅎ :)

오호 저는 지금도 눈만 높아서 제 기사는 참 못 썼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죠. ㅋㅋ

같은 일을 하면 나도 상대방도 더 잘 보일 것 같아요.
저와 남편 오빠도 같은 직업이다 보니 예전엔 별 것도 아닌 것 같고 투닥거리기도 했었어요. 지금은 집에서 일 얘기 금물이죠~

앗 같은 직업이시군요! 저희는 일 얘기 많이 해요. 기술적으로 상의할 것도 많고, 회사 욕도...

하하하~~~~ 괜찮네요..

같은일을 하지만 다른성향을 가지셨군요 ㅎㅎ
저도 와이프님이랑은 다른성향으로 부정적인면과 고민을 많이 하는편인데
옆에 와이프님이 생기고 나서는 그런부분을 고치고 있습니다 ㅎㅎ
시호님 편안한 저녁시간보내세요^^

넵 편안한 야근 하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두분 운명이셨네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분들이 어쩌면 딱 좋을거란 생각을 ....!

머 비슷한 점도 많고 그럽니다. ㅋㅋㅋ

같은 직업 다른 방식 다른 성격^^
저도 아내분 같은 스타일이라 shihoo님 같은 성격이 부러워요^^
아이 임신 했을때 성격은 아빠 닮아서 편하게 살라고 기도한 적이 있네요 ^^

아내도 나중에 나올 아이 성격이 예민할까봐 걱정을 한답니다. ㅋㅋ 역시 미리 걱정.

다 비슷하군요 ㅎㅎㅎ 저희도 성향이 반대 입맛도 반대... 근데 또 생각해보면 비슷한 것 같기도하고 아니 닮아가는 건가 싶기도 하구요 ㅋㅋㅋ

아 저희도 입맛도 많이 다르네요 그러고보니 ㅋㅋㅋㅋ

저도 내일 준비는 내일 하는 편이지만 그렇게 속 편히 있지는 못해요..ㅎ 확실한 카드를 손에 쥐지 못한 상태면 늘 마음이 거기 가 있죠. 몸은 쉬고 있는데 마음만 바빠서 힘든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도 지금 개인적으로 일을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루고 있는데 점점 시한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가 시호님 기사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두분의 기사를 한번 읽어보고싶습니다. 성향이 다른 기자님들의 글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네요.

제 기사 읽어보지 마셔요 ㅋㅋㅋ 창피합니다.

재미있네요.
기자로써 많이 다른 두 분이 만나 한가정을 이루게됨 버라이어티한 이야기 궁금합니다

언젠가 허락을 받을 수 있겠죠. 갠적으론 아내님이 출입하는 나와바리마다 역대급 사건이 터져 업계에서 출입처 파괴신으로 통한 사연을 쓰고 싶은데 단칼에 거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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