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인 척]불만분자 연대기-(2)첫번째 사건

in #kr7 years ago

korea-929495_960_720.jpg

많은 직장인들이 그렇듯, 내게도 '사춘기'는 찾아왔다. 입사한 뒤 1년여, 회사와의 허니문 기간이 지나갔다. 회사 돌아가는 상황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성향을 불문하고 정부 여당을 비판하지 못하는, 비판하고 조진다고 누가 머라 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알아서 기어 주는 분위기가 참기 힘들었다. 항상 기사는 남들이 다 쓰는 만큼만 쓰면서, 특정 사안에 관해서는 남들이 써도 안 쓰는. 결과적으로 흐리멍텅하기 이를 데 없는 신문이 날마다 만들어지는 걸 보며, 불만은 하루하루 쌓여 갔다.

때는 2011년, 나는 당시 입사 만 2년이 안 된 3년차, 편집부 초짜기자였다. 종판 신문까지 편집해 찍혀 나오는 것까지 보고 퇴근하는 야근조 막내였다. 그때는 박원순이란 사람이 서울시장을 하겠다고 나와서 여당 의원이었던 나경원이란 사람과 경쟁하고 있었다.

앞서 야근을 하면서 '이거 왜 이러나' 싶은 일이 몇 번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중 하나는 (구체적으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후보 단일화로 박원순에게 양보한 뒤 한동안 조용했던 안철수 씨가 밤중에 박원순의 선거를 적극 돕겠다고 선언하던 날이었다. 밤중에 일어난 일이고 그 동안의 선거 구도에 영향을 미칠만한 사건이라 당연히 크게 다룰 줄 알았다. 그런데 당시 야간국장을 받은 한 부장이 "머 별거 아니네"라는 투로 말하고 대충 정치면 중간에 끼워넣었던 것 같다.

타사 모든 면을 다 보는 편집기자는 다음날 우리 회사가 기사 밸류 판단에 성공했는지, 틀렸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날 타사에서 안철수의 지지 선언을 어떻게 다뤘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우리가 엄청 틀렸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참 지면이 모호하게 이상할 때 들이받기가 곤란하다. 당시 야간국장의 정치적인 성향으로 보면 충분히 일부러 뭉갰다는 의심이 가능한데, 꼭 이럴 때는 '판단미스'라면서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다. 하지만 그렇게 자존감을 희생해가면서까지 기사를 뭉개 놓고 얻는 게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날은 그냥 넘어갔는데 다음 사건은 '본의아니게'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전날은 야근 뒤 비번인 날이라 출근을 안 했는데 다음날 출근해서 보니까 당연히 나와야 할 제목이라고 생각한 게 없었다. 전날 나경원 의원이 봉사활동을 한답시고 카메라를 대동하고선 남성 장애우를 발가벗겨 목욕을 시켰다. 당연히 인권침해 논란이 일었다. 쉬는 동안 하루종일 시끄러웠던 사건이었으며, 지금까지 나 의원을 따라다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당연히 온갖 보수지들도 비중있게 다뤘다. 그런데 우리 신문은 제목 한 줄 달지 않았다. 기사에도 안 넣었나 찾아봤더니 구석에 '한편 이날 나 후보는 ~해서 논란이 됐다'고 한 줄 들어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걸 참으며 혼잣말로 '어? 이게 왜 안 들어있지? 제목이 한 줄 없네'라는 식으로 얘길 했다. 맞은편에 앉은 선배가 "아 그거 내가 제목 달았는데 나중에 편집국장이 뺐어"라고 말했다. 뚜껑이 열렸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XX"이라고 중얼거리며 신문을 구겨서 바닥에 던졌다.

그런데 하필 그 옆을 편집국장이 지나가고 있었다. 구겨서 집어던진 신문이 그의 발등에 떨어졌다. 편집국 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속으로 "아, 큰일났다" 싶었지만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국장은 "왜 아침부터 열을 내고 있느냐"고 물었고 난 "당연히 제목이 들어가야 할 부분이 안 들어가서 화가 났다"고 말했다. 국장은 신문을 들여다보더니 콩알만하게 기사로 한 줄 들어간 부분을 찝으며 "이거?"라고 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후배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만은 일품이었던 당시 국장은 '다음부턴 주의하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럴 걸 알았기에,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제일 친한 편집부 후배와 옆자리 선배가 무슨 일이냐 물었다. 그날 점심 때 이 둘과 소주를 각 2병 마시고 들어갔다. "XX 건들기만 해봐라"하고 들어갔지만 아무도 건드려주지 않았다.

취한 채로 조용히 내가 맡은 면을 짰다. 무슨 면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잘 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날 이후로 편집부 안에서 '취화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DQmf2c2sFExMsefvWd79UY2CvA2br5PTwQNtcpcmkG6D2bS_1680x8400.png

Sort:  

Cheer Up!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ㅎㅎㅎㅎ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구겨서 던진 신문이 편집국장 발등에
떨어지다니. 암만 봐도 드라마 각인데요. :)

나경원 사건 꽤 유명(?)했는데 그게 잘 안 다뤄졌었군요. 더군다나 그때 고무장갑까지 끼고 있지 않았나요? 그런 기사를 확~ 축소해버렸군요. 갑자기 드는 생각: 그게 편집국장의 고유권한인지 회사의 기조와도 일치하는 건지 궁금해지네요.

취화선, 멋진 별명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명필이던 한석봉, 소주 2병에도 편집을 잘 짜는 취화선. :)

언론사의 기조에 따라 국장이 알아서 맞춰 가는 것 같습니다. 자기 모가지 날아갈까봐... 소주2병 덕에 편집을 잘하는 취화선 ㅋㅋㅋ 담에 취한 채로 짰다가 상 탄 편집 함 선뵈겠습니다.

ㅎㅎㅎㅎ 기대됩니다. :)

모두에게 세상을 향해 외치고픈 이야기들이 있지요

십팔원어치 씨발라먹을 그런 상황들..
아직 시호님의 생각이 젊고
세상을 향해 외치고픈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

ㅋㅋ 벌써 그게 6년 전이니... 저도 그 동안 많이 무디어지고 둔해진 것 같아요. 늙은 걸까요...

헤헤 약간은요~
하지만 그만큼 노련해지고
더욱 더 핵심파악에 빨라지셨을듯 한데요 ^^

아무리 본인의 정치적 성향에 반한다지만 분명 다른 언론사와 경쟁인 상황에서 그런 결정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에고..저는 요즘 회사와 허니문이 끝난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권태기네요ㅠㅠ

회사 선배들은 정부 기관지였던 자신들 젊은 시절엔 큰 경쟁이 없었으니... 그렇게 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멋지시네요.. 이런게 기자정신인가요?ㅎㅎ

그냥 어린놈 치기였던 것 같습니다. ㅜㅜ

아무리 정치 성향이라도 다른 보수지들도 심각하게 다루던 사안을 뭉갠다는 건 회사에도 피해를 끼치는 행위가 아닌가요. 회사의 보수 진보 성향을 떠나 공사 구분의 문제인 것 같은데..
저같아도 빡이 쳤을 듯 싶네요

그냥 정부 지분이 높다는 이유로 정권이 보수냐 진보냐에 상관없이 비판을 못하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참 직장생활 다룬 것들을 보면 "여기가 니 자아실현 하는 곳이야? 여긴 돈 벌러 나오는 곳이야!!!" 이러던데 어우 뭔가 마음 속이 불편해지는 것이.... 저도 빨리 취업을 해 봐야 현실을 느낄 텐데요..

르캉님 오랜만이예요. 제가 취업 선배로서 말씀드리자면, 돈 많이 주는 곳으로 가시면 이런 고민이 들 때 한달에 한 번은 돈뽕을 맞을 수 있습니다. 저는 박봉이기도 해서 자아실현이라도 안 되면 문제가 심각하죠.

'공범자들'의 신문 버전인가요? ㅎ
정치 편향적인 내용도 문제이지만 요즘은 기사 구성의 질 자체가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종이로도 발간하는 신문들은 그나마 나은데 인터넷으로만 배포되는 신문의 기사들은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비문 투성이에요. 로봇이 쓴다는 스포츠 기사보다 못합니다.

아무래도 인터넷들은 양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래요. 스티밋에서 보상 적더라도 마구잡이로 포스팅 뿌려대는 경우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루비님처럼 글 쓰시는 분들이 신문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생각하면 기사를 못 쓰겠어요.

저도 겪었던 직장사춘기네요
근데요즘은 회사가 사춘기 같네요ㅜ

흠흠 회사가 사춘기면... 어떤 상황일까요 ㅋ

정말 회사 생활하면서도 맘같이되지 않는것들이 많은데.. 소주한잔하면서 삯이곤하는데..
기자님들은.. 정말많네요. ㅠㅠ
취화선이라는 별명이 너무 잘어울리세요.ㅎㅎㅎㅎ
시호님. ㅎㅎ

ㅋㅋㅋㅋ 와이프에게 당시 별명을 공개하면 한소리 먹겠죠... "으이그 자랑이다"

Coin Marketplace

STEEM 0.20
TRX 0.13
JST 0.030
BTC 65762.16
ETH 3485.95
USDT 1.00
SBD 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