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신을 만나는 방법 1

in #kr7 years ago

“이따 저녁에 맥주 마실 사람들은 미리 말해줘.”

대낮부터 이미 반쯤 눈이 풀려있는 이 사내는 파키스탄 라호르의 리갈 인터넷인 리셉션 직원이다. 파키스탄에서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주류 판매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만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 고픈 배낭여행자들을 위해 이 사내가 매일 저녁 발품을 팔아주고 있었다. 그가 어디서 맥주를 구해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중간에서 약간의 수수료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그는 언제나 청바지에 티셔츠를 멋스럽게 차려입고, 유창한 영어로 사람들을 맞았다. 금요일이면 순백의 이슬람 드레스로 갈아입고는 새삼 알라의 가르침에 순종하려는 듯 보였지만, 아침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늘 하시시에 취해있는 그는 내가 생각한 무슬림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리갈 인터넷인에 머물고 있는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독특했다. 이곳의 투숙객들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숙소 안에서 보냈는데, 딱히 관광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세끼 식사도 숙소 안에서 해결하는 듯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들의 일과에 대해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숙소 옥상에는 골방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 종일 숙소에 처박혀 뭘 하는 것일까 궁금했던 사람들은 바로 이 방에 모여 주구장창 하시시를 피워대고 있었다. 리셉션맨이 이 아편굴의 대장이었다. 늘 대장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그의 여자친구 카탈리나는 이 아편굴의 안주인으로 라호르에 장기체류 중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을 풀어헤치고 있어서 늘 제정신이 아닌 여자처럼 보였다.

우리가 파자마맨이라고 부르던 미국 사내는 낮이나 밤이나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그는 정전이 될 때마다 촛불을 들고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놀래키곤 했다. 그 모습이 꼭 몽유병에 걸린 공포영화 주인공 같았다. 나를 마주칠 때마다 특유의 가는 목소리로

"헤이. 지혜. 저 아프가니스타니 정말 아름답게 생기지 않았니?"

라며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파자마맨은 정말 아편굴 대장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와 친구는 공식적(?)으로 아편굴의 멤버는 아니었고, 가끔씩 올라가서 그들의 헛소리를 들어주는 구경꾼이었다. 뉴욕에서 유학 중인 대만 청년 개리 역시 우리와 같은 구경꾼이었는데, 그의 첫인상은 전형적인 샌님이었다.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제로도 살면서 공부 이외에는 해본 게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공붓벌레의 일탈 치고 파키스탄은 꽤나 터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터프한 샌님'은 그에 대한 과소평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숙소 옥상에서 열리는 수피 뮤직 공연이 있었던 날이었다. 우리는 숙소 옥상에 모두 모여 수피 뮤직의 반복되는 리듬에 조금씩 취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발을 구르거나 손뼉을 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모두들 조금씩 몸을 흔들고 있는 와중에도 가만히 이를 지켜보고만 있던 개리가 갑자기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빠르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개리의 모습에 놀란 우리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모두가 그를 둘러싸고 원을 그리고 서서 그의 이름을 연달아 외쳤다.

“개리! 개리! 개리! 개리!”

폭발한 개리의 흥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무아지경의 그는 신을 받아들인 박수무당 같아 보였다. 그의 도리도리 댄스는 점차 격렬해졌다. 무게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그를 지켜보던 우리들은 하나 둘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박수를 칠 수도, 그의 이름을 외칠 수도 없었다. 가만히 서서 입을 떡 벌린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누군가 좀 말려봐.’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언의 메시지가 오갔다. 용기를 낸 프랑스 빡빡머리가 그를 뒤에서 껴안아 제압했지만 개리의 에너지를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엔 두 남자가 바닥에 넘어져 나뒹굴며 상황은 종결되었다. 개리는 샌님이 아니었다.

가장 미스터리했던 그녀가 등장한 것은 숙소 옥상에 널브러져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 몸에 촥 달라붙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육감적인 그녀는 브루나이 사람이었는데 나와 친구가 한국 사람임을 확인하고는 엄마가 송승헌을 좋아해서 한국 드라마는 빠짐없이 챙겨본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말투 하며 손짓하며 여간 요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했다. 어쩐지 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기골이 장대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덩치가 컸고, 얼굴도 어딘가 모르게 중성적인 느낌을 주었다. 여자다 남자다 우리들끼리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다. 그날 저녁 그녀가 남자 도미토리로 들어와 티셔츠에 트렁크 팬티만 입고 잤다는 제보로 논쟁은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그것으로 그녀의 성별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여자 도미토리가 꽉 찬 경우 더러 이런 일이 있기도 했고, 그녀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잘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논쟁은 체크인을 할 때 확인한 그녀의 여권 사진이 남자였다는 리셉션맨의 증언과 함께 종결되었다. 어쨌든 그녀는 여자로 보이길 원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언니처럼 대했다.

라호르_1.jpeg
Lahore, Pakistan, 2007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라호르에 이틀 정도 머무르고 일찌감치 꿈에 그리던 훈자에서 신선놀음 중이어야 했지만, 우리는 ‘하루만 더, 하루만 더’하며 떠날 날을 미뤄오고 있었다.

라호르의 여름은 끔찍하게 더웠다. 한낮의 기온은 40도를 훨씬 웃돌았다. 밖에 나가면 그늘에 있어도 뜨거운 공기에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하루에 몇 번씩 샤워를 해도 금세 온몸이 땀으로 젖어버렸다. 샤워를 하고 난 후 몸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지 않은 채로 방 천장에 붙은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으면 잠시나마 시원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정전이 되었기 때문에 선풍기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덜그럭 거리며 돌아가던 선풍기마저도 멈춰버리면 천장이 내뿜는 열기로 방 안은 그야말로 불지옥으로 변했다.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욕이 터져 나오고, 몇 분간 간절한 마음으로 전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좀비처럼 밖으로 나가곤 했다.

목적지는 숙소 건너편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였는데, 우리는 이곳을 '천국'이라고 불렀다. 이 천국에서 보통의 과일 맛보다 훨씬 진한 맛의 아이스크림과 신선한 생과일주스 따위를 맛볼 수 있었다. 그 불구덩이 속에서는 고무 맛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맛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선풍기가 만들어내는 미지근한 바람 말고 피부에 차갑게 와 닿는 ‘에어컨’ 바람이 있었다. 온몸으로 찬 바람을 맞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이곳은 불지옥 라호르에서의 유일한 구원이었다.

이 천국에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주문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홀을 가득히 채운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도 온통 남자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가게 안은 어린아이부터 허연 수염이 덥수룩한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남자들로 늘 북적였다.

“파키스탄 남자들 아이스크림 진짜 좋아하나 봐.”
“아이스크림을 남자만 좋아하겠어?”
“그럼 여자들은 어디서 먹고 있는 걸까? 집에서?”
“여자들이 가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따로 있을 수도 있어.”

라호르_2.jpeg
Lahore, Pakistan, 2007

한 저돌적인 사내가 자신이 먹던 아이스크림 컵을 내밀며 윙크를 날린 적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여자가 신기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외국인들이 신기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이곳을 드나들고 나서야 일제히 우리를 향하던 그들의 까만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곳에는 여자를 포함한 가족 손님을 위한 공간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아이스크림조차 남녀가 따로 앉아 먹는 것을 보면 여느 이슬람 사회처럼 엄격하고 보수적이지만 대학교 캠퍼스는 여지없이 특유의 자유로움과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가끔씩 펀잡 대학교 캠퍼스를 어슬렁거리다가 카페테리아에 들러 트로피코 사과 주스를 사 먹고 돌아오곤 했다. 라호르 어디에나 파는 주스를 사 먹기 위해 굳이 대학교 캠퍼스까지 갔던 것은 아니고. 파자마맨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고져스한’ 파키스탄 여대생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했던 무슬림 여성들과는 다르게 펀잡 대학교의 여대생들은 아주 적극적이고 사교적이었다. 부르카나 차도르는커녕 히잡조차 두르지 않은 여자들도 많았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그녀들은 헬로 하며 먼저 다가와 척척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곤 했다.

라호르_3.jpeg
Lahore, Pakistan, 2007

해질 무렵의 바드샤히 모스크에서 흘러나오는 아잔을 듣고 있는 것이 좋았고, 동네 곳곳을 뒤지며 하루하루 소소한 일상들을 쌓아가는 재미도 있었지만, 찜통 속에서 불더위와 씨름하면서도 라호르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게 벌써 11년 전의 여행이라니...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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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너무 재밌네요~!! ㅎㅎㅎㅎㅎ
얼마전에 보내주신 스팀달러 잘 받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girina79 님! 저야말로 @woo7739 님께서 보내주신 스팀달러로 소중한 경험을 했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젊은 날에 외국에서 살아보고 외국인들을 삶에서 겪어보는 것, 언제나 정답인 것 같습니다. 글 잘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kyslmate 님! 네, 삶에서 겪어보는 것! 그러다가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다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그 여행이 더 재밌어지더라고요. :-)

당장이라도 떠나고싶은 뽐뿌를 불러일으키는 여행기네요 !!
글솜씨가 너무부러워영 라운디님..

으아니. 꼬부기님! 오늘 새벽 꼬부기님 블로그에서 서울은 흐림 열 번도 넘게 계속해서 들었어요. 어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내 마음 딱 읽는 음악 우연히 들으면 막 소름 돋고 그러잖아요. 오늘 새벽에 그랬어요. :-) 한 번 더 듣자, 한 번 더 듣자 하다가 댓글도 못 남기고 왔네요. 그리고는 영감을 주었던 음악들을 소개하는 글을 써보고 싶어졌어요. 이 아이디어에 대한 영감은 꼬부기님이 주셨습니다. :-)

저같은녀석이 영감을 드렸다니
영광입미다 ㅜㅠ(라임 ㅇㅈ하시나요)

ㅇㅈ. 아주 입에 쫙쫙 붙는 라임입니다.

온 세상사람들을 다 만나고 오실 겁니까? 얼마나 걸릴까요? ^^ 잘 읽었습니다. 휘리릭~

안녕하세요. 멀린님. :-) 맞습니다! 사람 구경하는 맛에 여행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우와~ 정말 특별한 여행기네요~^^ 이렇게 꼼꼼하게 이야기하든 남기는 여행기는 오랜만입니다! 팔로우&보팅하고 또 이야기 들으러 올게요^^

안녕하세요! 기록도 잘 하지 않고, 사진도 잘 찍지 않아서 에피소드들이 소설처럼 머리에 남나봅니다! :-)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또 찾아주세요!

저는 특별한 여행기보다는 여행지에서의 일상을 엿보는게 즐겁더군요. 본문에 담긴 일상은, 마냥 평범하지만은 않았지만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일상의 장면들을 좋아해요. :-) 그러고 보니 라호르에서는 유난히 별스러운 일들이 많았어요. 아직 2편을 올리지 않았지만 라호르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정말 손에 꼽는 장면 중 하나랍니다...... 곧 올릴테니 들러서 읽어주세요, 김리님!

캬 글이 챡챡 감기면서 나도 모르게 낄낄 웃으면서 읽게되는군요. 특히 터프한 샌님 개리에 대한 묘사가 압권입니다. 와우!

안녕하세요. 린님! 개리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거든요. 후후.

여행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셨군요. 용기도 있으시고요. 부럽기도하고 존경심마져 드네요. 수피춤도 체험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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