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다 + 그리고

in #kr8 years ago (edited)

약 몇 년전에 적었던 일기를 들추어보았다.

이 당시의 나는, 사랑을 한다는 것은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외연이라고 생각했었다. 당신은 이러한 장점과 단점이 있고, 이러한 단점은 결국 나를 어렵게 만들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러한 단점까지 끌어야 한다는 당위로 스스로를 설득했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혈기가 왕성했던,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어 누군가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쏟아부어 타오르다 마음의 재를 남겼던 시간이었다.

이제는 삶의 경험들이 나이테처럼 조금은 켜켜이 쌓여서인지, 아니면 기력이 쇠해서(?) 인지, 누군가를 내 옆에 둔다는 것은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나 "그래서" 라기 보다는 "그리고"의 영역이 아닌가 한다. 내가 상대방의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면 그만이다. 각자의 걸음이 있고 시간이 있고 삶이 있다. 지금, 여기, 같이 머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사람을 놓아둔다는 것이 항상 방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것은 상대방의 삶에 대한 존중의 한 표현이자, 사랑의 한 방식일 수 있다.

2005.11. Voigtlander R3A + Nokton 40mm F1.4 Fuji superia 200
( 낙엽이 흐드러지던 어느 가을이었다.)

머물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의지이든, 아니면 상황이 그렇게 만들든 언제라도 안녕을 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면서부터, 정적인 성향을 기대하는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사람 사이의 관계란 지독히도 역동적일 수 있음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에 기대어, 관계에 영향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 예측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무언가를 할지라도, 예상 외의 상황이 언제든지 생길 수 있음을, 그래서 내가 바라보는 관계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님을 알게되기까지 미련하리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언제나 나의 사람, 나의 것 이란 말을 즐겨 써왔고, 그 안에는 언제라도 나의 의지로 하여금 이 관계들에게 종말을 고하거나 새로움을 더할 수 있다는 다소 오만한 생각이 섞여 있던 것 같다. 내가 맺는 관계라는 것은 확장된 나의 외연으로서 존재할 뿐이었고, 다시 말하면 나의 것이었며, 나였다.

많은 것을 가지려하면 할수록 힘이 들었다. '나'는 상대방의 과거와 기억까지 먹어치우려 했고, 거대하게 불어나버린 채 무거워졌다. 나는 내가 관계하는 모든 존재들에 대해 나의 것이란 딱지를 붙이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의 세계를 사는 게 아니라, 나의 세계가 나를 산다. 내가 관계에 대해 내 이름을 붙이는 만큼, 나는 관계에 규정되고 나아가서 관계 속에 내가 함몰되어버린다. 도무지 내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나와 관계를 맺는 존재를 나로 만들고 싶어했지, 그 자리에 제자리에 놓아두질 못했다. 적절히 거리감을 두었더라면, 더 온전한 모습으로서 바라볼 수 있었던 관계들이 아쉽다. 나의 욕심으로 인해 왜곡시켜버렸던 것만 같다.

이제 나는 머물고 싶다. 나와 당신이 다르다는 걸 알기에 내가 당신이 되고 당신이 내가 될 수는 없겠지만 나는 나로서, 당신은 당신으로서 서로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시간은 흐르고 존재는 변하듯이 언제까지라도 함께일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알게 되었지만, 시간이 허락하는 한 서로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머문다는 것은 헤어짐을 전제로 하기에 근원적으로 슬프지만, 만나서 다행이라 여길만큼 후회없이 행복할 만큼 서로의 곁에서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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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잘 보고 갑니다. 햇살 좋은 날에 찍으셨네요.

흐드러지게 꽃이 피는 경우는 잘 보이는데, 의외로 낙엽이 흐드러지게 늘어지는 경우는 잘 보이지 않더랍니다. 좋은 역광과 맑은 하늘과 운이 좋았던 날이었습니다.

우와 십 년도 더 된 사진이네요 아련하네요. 잘 보고 갑니다.

지금은 왠만하면 디지털로 사진을 보고 저장하고 지우는 시대이지요. 사실 저 때에도 디지털 카메라와 필름 카메라가 어느 정도 공존하고 있었습니다만... 집에 있는 필름스캐너는 아직도 쌩쌩하지만, 인화의 번거로움과 기다리는 설렘 중에서 이제는 전자가 더 앞서가고 있나봅니다.

와 필름 스캐너라니^^ 추억의 물건이네요. 저도 당시 필름카메라 한참 들고다녔던지라... 당시의 느낌이 많이 기억 납니다. 에세이도 너무 잘 어울려요.

리스팀 되었습니다. 이벤트 초반 홍보를 위해 리스팀 한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리스팀 드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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