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인생의 계단

in #kr6 years ago (edited)
0. 인생의 계단

오늘은 예비군 훈련을 받는 날이다. 예비군 훈련 장소로 가는 길엔 몹시 가파른 계단이 하나 있다. 시멘트나 돌을 다져놓은 계단도 아니라서 군화발로 밟으면 계단 전체에 진동이 느껴진다. 스릴도 이런 스릴이 없는데 높기도 높다. 그래서 한참을 오르다보면 ‘꼭 이 길로 가야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이런저런 길을 찾아봐도 이 계단을 지나는 것보다 빠른 길은 없었다.

어쨌든, 가파르고 높은 계단을 오른다는 건 힘든 일이다. 육체적인 피곤함도 뒤따르기 마련이지만, 중간쯤 올랐을 때 뒤를 돌아보면 떨어질 것 같아서 겁도 난다. 그럴 때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앞만 보고 갈 때는 그저 힘들기만 하나, 뒤를 돌아보면 힘든데다가 겁까지 난다. 만에 하나라도 굴러 떨어지면 최소한 중상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노라면 문득 이 가파른 계단이 나란 놈의 인생을 닮은 것도 같아 소름이 돋는다.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뒤를 돌아보면 겁나는 높이와 가파름. 하지만 앞으로 가야할 계단은 많은 그런 상태.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힘은 더 많이 들고, 지치기도 많이 지치는 그런 상태.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가파른 계단의 중간은 반드시 오게 돼있다.

돌아갈까? 아니면 계속 올라갈까? 어느 쪽이든 방법은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훈련장에 제때 입소해야하는 예비군이다. 내려가면 절대로 도착할 수 없다. 기껏 군복까지 꺼내 입었는데 여기서 내려가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비군 훈련’이라는 목표를 생각한다면, 그건 단지 몇 분 늦어서 하루를 날리게 되는 게 아니다. 적어도 다음 훈련을 배정받을 때까지, 예비군 훈련은 내 의지로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게 된다. 즉, 계단을 내려가는 건 지각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다음 훈련까지 그것에 관한 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은, 그 시간에 비한다면 지극히 짧은 순간에 결판이 나게 돼있다. 그러니 결국은 조금 쉬어갈지언정 올라가야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전에도 비슷한 글을 써두었던 걸로 보아 나는 아직 계단을 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육체적 수고를 감내하고 끝끝내 계단을 오르면, 표표히 휘돌아가는 강의 허리와 이를 둘러싼 근방 대공원의 절경이 펼쳐진다. 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이 패턴은. 3류 인생역전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진부한 결론이지만 높은 곳에 올라 탁 트인 시야를 얻어야 절경을 볼 수 있는 건 역시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일단 앞을 보며 걷기로 한다. 돌아보면 두렵지만 오늘이 아니면 할 수 없으니까.

아무도 원하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듯, 눈에 띄는 군복을 입고 섬처럼, 표표히 사람들의 물살을 가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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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계단을 오르면 펼쳐지는 새로운 고단함을 향하여 :)
노을과 함께 쏟아지는 달콤한 맥주를 위하여 :)

예비군을 떠올리게 하는 글입니다.
끝까지 가야합니다 !!

앗 두두님! 오랜만입니다! 잘지내셨나요?

군복입고 마시는 치맥이 꿀맛이죠 ㅎㅎ
끝을 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앞에 펼쳐진 계단은 계속 올라보겠습니다

오랜만이라 참 반갑습니다 :)
가끔씩 들어와 경민님 글 보고가곤 합니다 ㅎㅎ
항상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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