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룸 19. <마녀>, 번잡하게 뭉뚱그렸다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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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room.19(film)


<마녀>, 번잡하게 뭉뚱그렸다


본 글은 작품의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관람 예정인 분은 관람 후에 리뷰를 볼 것을 권합니다.


1. <마녀> 속에 풍기는 다양한 작품들


<마녀> 속엔 여러 작품이 겹쳐 보인다. 전체적인 서사는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2013)를 닮았고, 액션과 분위기는 <킬빌>(2003)을 지향하는 것 같다. 그리고 주인공 자윤과 영화의 세계관은 <루시>(2014)와 심지어 일본 애니메이션 <건담 시드>(2002)와 <건담 더블오>(2009)까지 떠오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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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는 친부모의 정체를 깨닫고, 부모를 죽인 킬러들을 죽인다. *사진 : 다음 영화,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2013)


먼저 <화이>는, <마녀>와는 반대로 전개된다. <화이> 속 주인공 ‘화이’는 어려서 킬러 조직에게 납치돼 그들 밑에서 자란다. 그는 자라면서 킬러들의 수법들을 배워 뛰어난 킬러의 경지에 오르지만, 이내 어릴 적 비밀을 알게 되면서 자신을 키운 조직원들을 소탕한다. 여기서 <마녀>의 자윤(김다미)은 화이와는 다르게 킬러로 길러져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는데, 결과적으로 자신을 킬러로 만든 조직을 소탕하는 것은 같다.

이건 사실 <킬빌>도 유사하긴 하다. 다만 ‘키도’는 조직의 일원이었고 성인이라는 점에서 화이나 자윤과는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다. 어쨌거나 이 부분만큼은, 유사하기는 해도 크게 나무랄 것이 못된다. 킬러 영화에 등장하는 내용이란 대개 비슷한 부분을 조금씩은 공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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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신체 능력과 지적 능력, 염력까지. 뇌 능력을 극대화 할수록 루시는 더 많은 능력을 사용하게 된다. *사진 : 다음 영화, <루시>(2014)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컨셉이다. 이 영화의 설정은 영화 <루시>와 일본 애니메이션인 <건담 시드>, 그리고 <건담 더블오>를 닮았다. <건담 시드>는 유전자 조작으로 뛰어난 신체를 얻은 ‘코디네이터’들과 그 반대인 ‘내츄럴’들의 갈등을 그리고, 특히 주인공 '키라 야마토'는 ‘코디네이터 중의 코디네이터’로서 인류 역사상(애니메인션 설정상)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 그려진다. 유전자 조작으로 뇌기능을 조작하고, 또 그 중에서도 가장 빼어나다는 설정은 <마녀>의 자윤과 흡사하다.

그러나 <건담 시드>는 강화된 인간의 능력이 뇌능력에 집중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마녀> 속 ‘뇌 한계영역 돌파’라는 기준은 차라리 <루시>를 닮았다. 약물로 뇌의 능력을 완전히 개방한다는 점이나 지적인 능력 묘사, 염력의 발생도 자윤과 일치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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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렐루야는 초인병 연구소를 폭파하라는 미션을 받고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미사일을 난사한다. *사진 : <건담 더블오>, ep.11 : 알렐루야 中


그래도 여기까지는 조금 차이를 둘 수 있겠으나, <건담 더블오>부터는 캐릭터 간의 겹침이 더 두드러진다. 자윤과 그 어린 시절의 묘사는 <건담 더블오>에서 인체 조작을 통해 ‘초인병’이 된 ‘알렐루야’를 보는 것 같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초인병 연구소’에서 또래 아이들과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 경쟁과 인체 강화를 거쳐 폭력성이 짙은 자아인 ‘할렐루야’를 얻게 된다. 이후 알렐루야는 연구소의 처분 소식을 듣고 동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 탈출하지만, 식량이 떨어진 우주선에서 폭력적 자아인 ‘할렐루야’를 꺼내 동료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혼자 살아남는다.

이것만 해도 자윤이 어린 시절 대탈출을 감행한 이야기와 거의 완벽히 일치한다. 또 알렐루야가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은 자윤도 똑같다.(여중생 자윤과 킬러 자윤) 게다가 알렐루야는 훗날 건담 마이스터가 된 후 자신이 탄생한 연구소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수행하는데, 그는 괴로워하면서도 동료들을 미사일 폭격으로 말살시켜버린다. 그건 자윤도 마찬가지.

그뿐 아니라 알렐루야는 ‘뇌양자파’라는 일종의 텔레파시 능력 때문에 동류를 만나면 심각한 두통을 일으키곤 하는데, 좀 심한 것은 자윤도 같은 증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텔레파시까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는 같은 설정을 지나치게 따라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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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2세대 킬러들'(위)과 <킬빌>의 오-렌 이시이를 호위하는 정예 킬러들. *사진 : 다음 영화, <마녀>(2018), <킬빌>(2003)


설정뿐만 아니라 <마녀>는 액션이나 분위기도 다른 작품의 것을 많이 쫓아갔다. 이 영화에서 <킬빌>의 냄새가 가장 지독하게 풍기는 건 ‘2세대 아이들’의 살해 장면과 액션 신에서다. 특히 뇌쇄적인 눈빛으로 살인을 즐기는 소녀 킬러(다은)는 <킬빌>에 등장하는 ‘오-렌 이시’와 그녀가 후에 엄호로 두었던 여고생 킬러 ‘고고 유바리’를 닮았다. 아니, 사실상 닮은 정도가 아니라 캐릭터를 거의 복제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물론 이것은 죽음의 무차별성을 다루는 박훈정 감독의 오마주라고도 볼 순 있겠다. 죽음은 개인에겐 거대하지만 또 한편으론 장난처럼 이뤄진다. 예상치 못한 신체의 파괴, 그리고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에게 쏟아지는 무자비한 폭력 묘사는 <킬빌>의 묘미이기도 하지만 박훈정 감독이 지난 작품들을 통해서도 보여준 일관된 철학이기도 하다.

죽음이 휘몰아치는 현장에서 상대가 교복을 입고 있든, 정장을 입고 있든, 우하하든 비천하든 중요하지 않다. 죽음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확실히 <마녀>에서도 이는 잘 표현되고 있다. 죽음은 장난스럽고, 또한 무자비하게 표현된다. 특히 사신(死神)을 자처하는 자윤은 여중생에 불과하다. 여중생의 손에 쏟아지는 죽음들과 냉혹함은 우리가 기존에 인식하고 있던 죽음에 대한 생각들에 비해 낯설게 느껴진다. 또 앳된 얼굴로 투사처럼 죽음에 뛰어드는 2세대 킬러들도 우리에게 이질감을 준다. 확실히 일반 관객들에게 이 같은 모습들은 제법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킬빌>을 봤던 사람들이라면 이는 선명도가 좀 떨어진다.

다만 굳이 ‘나는 킬빌을 보여주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면, 박훈정 감독이 주문하는 것은 <킬빌>에 대한 오마주를 넘어선 다른 점에 주목해달라는 주문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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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킬러물'과는 달리 자윤은 킬러로서 본격적인 각성을 위해 선의를 뒤집어 쓴듯 묘사된다. *사진 : 다음 영화, <마녀>(2018)


<마녀>속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다양한 영화들의 공통점은, 결국 주인공이 안정을 향한다는 것이다. '화이'나 '키도', 심지어 '알렐루야'마저 모든 상황이 끝난 뒤에 더 이상 킬러의 삶을 이어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자윤은 각성 이후에 킬러의 삶을 놓기는커녕 더 끔찍한 미래로 나아가는 듯한 뉘앙스로 마무리 짓는다. 오히려 킬러의 삶을 잊고 살 수 있었음에도 자윤은 한 번 피 맛을 봤기 때문인지, 내재된 폭력성에 완전히 잠식당한 것처럼 보인다. 집안을 돕기 위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는 착한 여중생에서, 부하까지 둔 채 킬러 조직의 수장을 협박하는 자윤의 변화는 일반적인 킬러들의 ‘회개성 스토리’를 따르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더 나아가보면, 일반적인 킬러 영화들이 혹독한 수련을 통해 비범한 능력을 얻는데 반해, 유전자 조작으로 얻은 능력은 ‘복제’ 가능하다는 점에서 <마녀>는 더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1세대 인간병기인 ‘미스터 최(박희순)’는 부분적으로 실패했지만, 2세대 킬러 아이들은 신체적으로 완전한 형태를 보여준다. 다만 유전적 특성 때문에 뇌에 치명적인 질환을 가진 것이 이들의 유일한 단점인데, 자윤은 이조차 극복하며 결말부에 ‘3세대 킬러’를 육성하는 것처럼 보인다.(그런데 이 부분도 생각해보면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정말이지 까면 깔수록 온갖 작품이 튀어나온다) 3부작이니 만큼 '괴수를 처치하니 알이 남아있었다' 같은 설정이기는 하지만 그리 나쁜 시도는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명단축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약물을 얻었음에도 ‘더 근원적인 것에 집착’하는 자윤의 모습은 이미 ‘돌아가겠다’ 다짐했던 그 모습이 아니다. 이는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 <데스 노트>에서 ‘야가미 라이토’가 순수한 정의감으로 데스 노트를 쓰려다 점점 타락해가는 모습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이것만큼은 '킬러 영화'들 속에서 <마녀>가 자신만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봐도 중요한 핵심 틀을 여기저기서 끌어온 듯한 모양새는 여전히 보기에 좋지 않다. 이건 휴대폰으로 치면 마치, ‘아이 갤럭시 패드 G 10+ Pro’라는 제품을 보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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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 경찰에서 조직의 보스로 완전히 탈피하는 '이자성' *사진 : 다음 영화, <신세계>(2013)


2. 박훈정 감독 만의 ‘캐릭터 스위칭’


박훈정 감독의 대표작하면 떠오르는 것은 역시 <신세계>(2013)다. 신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처음과는 달리 점점 본질과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이자성 역시 조직에 들어가 위장 수사를 하다 오히려 조직폭력배의 길로 돌아서게 되고, 이자성을 잠복 시켰던 강 과장 역시 갈수록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사악한 술수를 주저 않게 된다(비록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캐릭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본래 가지고 있던 신념과 태도가 정반대로 치닫도록 유도하는 기술은 분명 박훈정 감독이 일관되게 끌고 오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그가 각본을 맡은 <악마를 보았다>(2010) 역시 아내를 무참히 살해한 연쇄살인마 장경철에게 복수하는 수현의 이야기를 그리지만, 정작 수현은 장경철을 만나 ‘악마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악마로 분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캐릭터는 영화의 철학을 대변한다. 감독은 주연 배우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투영한 캐릭터를 연기하게 만들고,(그런 점에서 배우에게 원하는 연기를 뽑아낼 수 있는 감독일수록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 할 수 있다) 우리는 스크린에 드러나는 이들의 변화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게 된다. 박훈정 감독은 그런 점에서 늘 캐릭터를 반전시켜 관념을 깨는데 특화된 전술을 구사한다. 이런 그의 스타일은 <마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결국 본성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럼에도 ‘소녀 자윤’으로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인가. 우리는 자윤의 두 가지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의 자윤이 결말부의 자윤인지는 알지 못한다. 생존을 위해 선의조차도 가식으로 써버린 ‘궁극의 인간병기’인지, 끝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직을 뿌리 뽑기 위한 선의의 계략인지,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윤은 광기에 휩쓸린 모습으로 스크린을 빠져나간다.

그것은 모종의 경고 같은 느낌도 든다. 자윤은 과학의 광기, 그리고 탐욕이 낳은 결과물이다. 그 결과물이 아무리 훌륭한 선의로 포장되어있어도 그 끝이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자윤이 ‘마녀’라는 사실을 본다면, 자윤을 탄생시킨 이들이 ‘마녀사냥’에 실패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끝까지 자윤을 인간병기로 여기고 그녀를 살해하려고 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역으로 사냥 당한다. 반면 양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자란 자윤은 착한 여중생 딸에 불과하다. 그러니 어떤 획기적인 결과물은, 대하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우리라고 다를까? 당장 AI와 같은 과학기술의 진보를 보라. 군사적으로 악용하자면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같은 결과물을 악의로 이용할 생각만 한다면, 결국 자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파멸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은 그런 메시지까지 염두에 둔 것 같진 않다. 다만 자윤이 '캐릭터 스위칭'된 채로 퇴장한 점이 흥미로울 따름이고, 이렇게 변화한 자윤의 끝을 짐작할 수 없게 하는 연출 방식이 그나마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따름이다.


*지나간 '필룸' (최근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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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룸. 17 <그래비티>, 우주를 체험하는 또 하나의 감각, 완벽한 감각
필룸. 16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날은 '지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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