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출구는 Sortie

in kr •  3 months ago




출구는 Sortie

+ Paris, France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합니다. 드디어 45일간의 유럽 버스킹 투어가 시작되었습니다. 여행의 시작점을 파리로 잡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일단 별다른 입국심사가 없고 캠핑장비를 구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럽의 타 공항들보다 비행편이 많은 편이고, 그렇기 때문에 항공료가 조금이나마 저렴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의 아픈 추억이 있는 멀린으로서, 입국심사가 까다롭지 않은 파리 샤를드골공항을 통한 입국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새벽같이 도착한 공항에서 먼저 렌터카를 찾으러 갑니다. 영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 달여 간의 기간 동안 버스킹 팀의 발이 되어 줄 자동차는, 이번 여행에 가장 중요한 장비 중 하나입니다. 사고가 난다던가, 고장이 잦으면 빠듯한 비용과 일정에 차질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미 한국에서 예약을 하고 오기는 했지만, 현지 사정상 원하는 모델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에이전시의 말에, 멀린은 조금 신경이 쓰이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신청한 모델과 다른 차가 나왔습니다. 비용과 텐트 치는 수고를 줄이기 위해, 일행 중 두 사람만 텐트에서 자고 멀린은 차에서 자기로 했었는데, 그러려면 차량 선택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미리 신청한 차만큼은 아니어도 트렁크 크기가 나름 크게 나온 모델이어서, 아쉬운 대로 그냥 사용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용 기간 동안 신용카드로 렌터카 디파짓(보증금)을 잡아야 하는데 결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한국에서 떠나오기 전, 여러 번 체크하고 신경 써서 준비한 사항이었는데 문제가 생기니 모두들 당황스러워졌습니다. 여행의 시작에 걸림돌이 생기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인데 말입니다. 카드 사용한도와 잔액 등, 여러 번 확인하고 준비하였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한스의 명의로 예약이 되어 있어, 한스가 한국의 해당 카드사 고객센터에 전화도 해보고, 집에도 연락해서 도움을 청해보고, 이렇게 저렇게 확인하고 애를 써봅니다. 한국은 한밤중이라 카드 도난 신고를 하고 나서야 상담원 연결이 가능해졌습니다. 결국 여러 번의 통화 끝에 신청하지도 않은 카드 해외 사용한도가 걸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신청과는 별개로, 새로 발급된 카드의 해외 부정사용 방지를 위해, 카드사가 임의로 일정 기간, 일정 금액 이상의 한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걸어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카드사의 오지랖 때문에 신청하지도 않은 제도로 타국에서 곤란을 겪었던 것입니다. 각종 카드 사고가 많아지고 있으니 나쁜 제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해당 고객에게는 미리 공지를 했어야 합니다. 게다가 여러 차례 해외 사용한도에 대해서 확인을 했던 터였는데, 한 번도 이에 대한 공지가 없었던 것은 카드사의 무성의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대는 모르는 안전장치를 두는 것. 그것은 사실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야. 그러나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만의 안전장치를 걸어두지. 일방적으로 잠수를 탄다던가, 연락을 두절한다던가.. 뭐 그런 것들은 그 나름 스트레스 관리의 방법이라고 봐 줄 수도 있어. 그런데 제일 나쁜 것은 혼자만 손해를 면하기 위해 빠져나갈 구멍을 확보해 두는 거야. 상대는 모르게 말이야. 그러고서는 모든 것이 서로에게 투명한 척하는 거지.

 
지금은 제도가 나아져서 일정 금액까지는, 도난, 분실로 인해 부정 사용된 금액에 대해 카드사가 보상을 해주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모두 카드 소지자의 책임이었습니다. 보안과 관리 소홀에 관한 카드사의 책임소재에 대해 항의가 끊이지 않자 새로운 법규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랬더니 카드사들이 신청하지도 않은 한도 제한을 걸고, 정작 소지자에게는 통보도 해주지 않는 어설픈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전에도 할 수 있었던 일일 것입니다. 소비자와 카드사의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통의 안전장치를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피해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피해가 늘어날 것 같자 부랴부랴, 그것도 상대의 사정은 헤아려 보지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만 용이한 안전장치를 만드는 것은, 설사 그 장치로 인해 상대가 보호받는 면이 있다 해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속 보이는 일입니다.

 


카드사 입장에서야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였다고 하겠지. 신청하지도 않은 제도를 지들 맘대로 걸어 놓고선 말이야. 게다가 상담 시간이 지났다고 고객 문의전화는 받지도 않고, 분실, 도난 신고는 해야 겨우 통화가 가능하게 해놓고선, 고객을 위한 정책이라고 하면 안 되지. 고객 동의 없이 해외 한도에 제한을 걸 거였으면 최소한 해외 고객 문의 창구는 별도로 만들어 놔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안전장치를 거는 사람들은 상대의 안전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한 거라고 하면서도, 막상 열어보면 자신만 빠져나갈 수 있는 매우 작은 통로를 몰래 열어 두었을 뿐입니다. 그런 관계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도난 신고를 해버려야지. 관계가 도난당했다고, 네가 미리 염려했던 것처럼 관계가 도난당했다고 선언을 해버리는 거야. 그러면 그제서야 본색을 드러내는 거야. 혼자 빠져나갈 구멍을 쓰윽 들이밀면서, 저 한 몸 지키느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모두에게 드러내는 거야. 실은 도난당한 게 아닌 데, 달라진 게 없는 데.. 네놈의 안전장치 때문에 일이 혼란에 빠져들었을 뿐, 모두가 그대로인데 말이야.

 
그러면 그 사람은 매우 쪽팔리겠습니다. 면목이 없겠습니다.

 


뭐 어쩌겠어. 안전장치에 콕 박혀 지내야지. 말 그대로 신용카드잖아. 신용으로 맺은 관계에서, 상대에게 사전 통보 없이, 제 마음대로 저만 빠져나갈 수 있는 안전장치를 그렇게 건다는 건, 이미 신용의 관계를 파기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신용이 좋은 사람일수록 그러겠지. ‘이놈의 카드 못 쓰겠네. 다른 카드사를 알아봐야겠어.’ 그러고 떠나가는 거야. 그러면 그럴수록 우량한 관계는 떠나가고 그것마저 아쉬운 불량 관계들만 남지. 관계의 파산에 접어드는 건 순식간이라구.

 
안전장치를 갖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게 안전장치는 필수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면 두들겨 볼 수 없는 관계는 쉽게 시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어느 한도 이상 두들겨 보지 않기로 하고 신용으로 맺은 관계에서, 자신은 여차하면 빠져나갈 요량으로 상대가 잠든 사이 몰래 돌다리를 두들겨 왔다면.. 멀린의 말처럼, 뭐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살아야지.. 다만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걸랑, 확 도난 신고를 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신용의 관계망 속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말입니다.

 


‘se ménager une porte de sortie’
 
불어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둔다는 말이야. 내가 8년 전에 파리에 처음 왔을 때, 장을 보러 카르푸에 갔었는데 말이야. 장보기를 마치고 건물을 나가야 되는 데 도대체 출구가 없는 거야. 지하주차장이었는데 아무리 위층으로 올라가도 출구는 안 나오고 도로 내려오고 도로 내려오게 되는 거야. 얼마나 황당하던지.. 폐장 시간이 다 되어서 차들도 거의 없는데, 야.. 이거 이러다 건물에 갇히겠다 싶더라구. 결국 한참을 헤매다가 마침 출차하는 차 한대를 쫓아서 뒤를 따라갔어. 그랬는데 이 차가 계속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맨 아래층에 가서야 출구가 나오는 거야. 세상에 이게 말이 되냐구. 지하주차장이면 위층으로 올라가야 출구가 나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런데 이 나라는 그게 거꾸로 되어 있는 거야. 그런데 그게 지상주차장도 그렇더만. 지상주차장은 아래로 내려가야 출구가 나와야 되는데,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야 출구가 나오는 거야. 도대체 이놈의 나라의 의식구조는 어떻게 된 모냥이냐구. 무지하게 황당했지. 아마도 오래된 건물이 많아서 왕복으로 입출차 통로를 내지 못하고 일방향으로 내다보니 그렇게 된지도 모르겠어. 그러면 새로 지은 건물은 왜 그렇게 되어 있냐구? 습관 때문이지.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게 익숙한 거야. 그런데 그게 무엇이든, 중요한 건 불어로 출구는 Sortie라는 거야. 그걸 몰랐으니 더 헤맸지.
 
빠져나갈 구멍을 몰래 만들어 놓고서는, Exit라고 알려주지 않고 Sortie라고.. 상대는 모르는 불어로 적어 놓구서는, 위기에 처하면 저만 빠져나갈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 도난 신고를 해버리는 거야.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으로, 비상식적인 상황으로 내려가는 거야. 역방향으로 말이야. 정방향으로 고객상담전화에 아무리 콜을 해봐야 ‘지금은 업무시간이 아니오니, 어쩌구저쩌구..’ 멘트만 주구장창 나오는 거야. 그럴 땐 도난 신고를 해야지. 그러면 그제서야 이 인간들이 안전장치를 드러내게 되지. 저 혼자 손해 보지 않으려고 알려주지 않았던 Sortie를 드러내게 되는 거지. 그러니 명심해야 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출구는 Sortie야.

 
도난 신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 버스킹 팀은 시작부터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캠핑투어를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카드사의 숨겨놓은 안전장치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제멋대로 틀어지게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분실신고.. 분실, 도난에 따른 부정사용.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그 선언을 통해서 도리어 그들의 숨겨 놓은 안전장치가 드러났습니다. 고객의 입장에서 카드사는 너무 거대한 상대라 거래처를 바꾸는 이상의 패널티를 줄 수가 없지만, 일대 일의 관계 속에서, 작은 공동체의 일원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Sortie를 만들어 두는 것은 공동체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입니다.

물론 그것은 오래된 건물이 많은 파리처럼, 관계 속에서 오래된 상처가 많은 개인의 불안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관계 속에 안전장치를 두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불안이 오히려 혼란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한다면, 작정하고 뒤통수를 칠 요량이 아니라면, 어쨌든 이 공동체, 이 관계 속에서 성장할 목적이라면, 자신만의 Sortie는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제안이 와도 정직하게 아직은 내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관계에 대한 욕심으로 덥석 상대 손을 잡고서는, 뒤로는 스리슬쩍 빠져나갈 장치를 만드는 것. 그것은 상대의 신뢰를 도둑질 하는 일입니다. 내게 맡겨 놓은 상대의 신뢰를 슬쩍 도둑질해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손해 보는 것은 정작 본인입니다. 자꾸 관계들이 떨어져 나가게 되고, 매번 두려워하던 일이 기어이 일어나고 말 테니까요. 그놈의 숨겨 놓은 안전장치 Sortie 때문에 말입니다.

반면 리더는 공동체가 혼란에 빠졌을 때, 과감하게 도난 신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공동체 전체를 흔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책이 나옵니다. 계속 매뉴얼대로 같은 멘트만 반복하는 고객센터에 전화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들만 아는 말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글씨로, 이미 약관에 다 적혀있다고 우겨대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리더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출구는 Sortie.. 누군가 숨기고 있는 Sortie.. 막힌 길은 역방향으로..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출구는 Sort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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