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시티 프리퀄] 아직도 니가 보여

in kr •  3 months ago




아직도 니가 보여

+ Rouen, France



루앙 (Rouen).. 쟌다르크가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한 그 도시.. 원래 코스는 이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계획대로면 최대한 빠른 코스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는데, 다음 코스들이 대부분 비가 올 예정이라 멀린은 코스를 변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캠핑여행의 시작을 우천 속에서 감행하기에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코스를 변경해 볼까? 몽생미셸 쪽으로 가면 어떨까?’ 하고 주변 도시들을 탐색해 봅니다. 그러다 발견한 겁니다. 쟌다르크가 화형 당한 도시가 파리와 몽생미셸의 경로에 놓여있음을…

 

쟌다르크.. 마법사와 마녀의 만남이라..

 
언젠가는 한 번 만났어야 할 그녀입니다. 마법사의 딸들인 마녀들의 행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멀린은 쟌다르크를 만나 봐야겠습니다. 출생지도, 생가도 아닌, 불에 타 사라진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있는 그곳에 말입니다.

13살 양치기 소녀는 직관의 음성을 들었을 뿐입니다. ‘나라를 구하고 황태자를 왕으로 세우렴.’ 말하는 존재가 신인지, 천사인지, 유령인지, 헛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시된 계시인지, 꿈속의 메시지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직관은 모습과 형태를 달리하고, 경험하는 이의 이미지 체계와 익숙한 상징의 옷을 덧입게 될 뿐,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너에게 이 나라를 구원할 힘이 있다. 너에게 이 나라의 왕을 세울 사명이 주어졌다.’ 거부하는 자에게 그것은 망상이고 헛것이지만, 지금의 나이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생인 시골 소녀의 순수한 영혼에는 천사의 부름, 신이 내린 소명으로 각인된 것입니다.

직관을 얻은 모든 이들이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신의 계시라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또한 아닙니다. 이 어린 소녀는 그것을 황태자에게 전해야 했습니다. 상처 많은 유약한 황태자를 찾아가 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야 했습니다. 그 시간이 3년이나 걸렸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소녀가 여고생의 나이가 된 뒤에야, 갖은 노력 끝에 황태자 샤를 7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 의심 많은 황태자는 그녀가 적이 보낸 암살자인지 모른다고 하며, 부하를 황태자의 옷을 입혀 자기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부하들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짝이는 그녀의 직관은 단숨에 황태자를 찾아냅니다.

 

어디 숨었니.. 너가 왕이 될 거라니까.

 
이후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대로, 영화에서 본 대로, 쟌다르크는 햐얀 갑옷에 백마를 타고 깃발을 휘두르며 연전연승합니다.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두고 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귀결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샤를 7세는 황태자의 꼬리표를 떼고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직관을 따르는 자는 직관을 따르는 일에만 집중하지. 계시를 받은 자는 계시의 완수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게 돼. 문제는 그 직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지. 자신으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닌, 누군가의 계시로 말미암은 승리를 취해야 하는 그 대상은 온전한 성취를 경험할 수 없게 되는 거야. 그것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승리야. 남으로부터 주어진 권리는 반쪽일 수밖에 없거든.

 
그렇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진 왕권이 아닌 쟌다르크의 절대적 공로로 획득한 왕권, 이 세워진 왕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은 천천千千이요, 다윗은 만만萬萬이라.’ 탁월한 부하를 둔 왕은 그 부하가 언제든 자신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계시를 받은 자는, 직관을 얻은 자는, 그 공로를 뒤로하고 쏜살같이 그 자리를 떠나야 할까? 어떻게 하면 그 순수성을 의심받지 않을 수 있을까? 직관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실 위험하기도 하지. 그 직관이, 그의 계시가, 왕을 권좌에서 내리라고 하면 또 그것을 따를 테니 말이야.

 
역사에 기록된 대로, 쟌다르크는 그의 높아지는 인기를 경계한 샤를 7세가 전투 지원을 하지 않음으로써 적에게 포로로 잡히고 맙니다. 게다가 샤를 7세는 관례에 따라 몸값을 지불하고 포로를 생환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쟌다르크를 마녀의 죄목으로 화형 당하도록 방관합니다.

 


샤를 7세는 사실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왕이었어. 아버지는 정신병에 걸려 있었고, 그런 아버지에게 구박을 당한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영국 왕(헨리5세)과 결혼시킴으로 프랑스를 영국에 넘겨주려 했지. 형들이 모두 일찍 죽은 탓에, 어린 나이에 프랑스 왕위에 올라야 할 아들에게 ‘지 주제를 모르고 왕이 되려고 한다.’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어. 어머니는 오히려 사위(헨리5세)에게 기대고 있었거든. 게다가 방탕한 어머니의 행실 때문에 사람들은 샤를 7세가 오를레앙 공작과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태어난 가짜 왕자라고 의심하고 있었지. 샤를 7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쟌다르크와 샤를 7세가 꼭 선조와 이순신 장군 같단 말이야.

 
정통성을 의심받는 왕,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아들, 그리고 혜성같이 나타나 자신을 구하고 왕위에 올려 준 또 다른 어머니 쟌다르크.. 샤를 7세는 오이디푸스처럼 저주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샤를 7세 한 개인의 상처의 역사 속에, 쟌다르크는 무능하고 무관심한 어머니의 반대 그림자로, 헌신적이며 강력한 어머니의 희생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불에 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계시를 번복하거나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아들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샤를 7세는 이후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영토 전역을 회복함으로 백년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끝맺고, 백성들로부터 ‘승리왕’이라는 칭송을 얻게 됩니다. 또한 중앙집권체제와 조세제도를 정비함으로써 봉건시대를 끝내고 프랑스를 절대왕정국가로 성장하게 합니다.

 


쟌다르크가 불쌍한가? 아니 그건 직관을 따르는 이의 숙명 같은 거야. 과연 이 모든 결과를 알았다 한들 쟌다르크가 계시를 따르지 않았을까? 오히려 적과 타협하거나, 계시를 부인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했다면, 그것은 더더욱 명예롭지 못한 선택이었겠지. 또한 샤를 7세가 배신하지 않아서 계속 공적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들, 어차피 권력관계 속에서 이를 시기하는 집단들이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고 직관을 무시하고 평생 후회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쟌다르크가 말이야. 역사가 뒤바뀌어 영국의 식민지로 살아가야 했다면 그 시간 동안 쟌다르크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직관을 깨달은 순간, 계시가 내려진 순간, 이 모든 역사는 기록되어버린 거야.

 
그녀는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신과 직접 소통했다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직관을 따랐다는 이유로, 계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죄목은 그것뿐이 아닙니다. 더해진 죄목에는 남장을 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전투수행의 편리를 위해 갑옷 아래에 반바지를 입었을 뿐인데.. 권세자들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라.’는 구절을 들이대며, 여자가 남장을 했으므로 신성모독, 풍기문란이라는 죄명을 씌웠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히려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쟌다르크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여자가 전투에 이렇게 뛰어날 리 없다는 의심과 호기심. 결국 쟌다르크는 그녀가 여자임을 증명 당하기(?) 위해 불에 탄 시신 상태에서 옷이 벗겨졌습니다. 대중의 관심은 오로지 그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있었기에..

마녀사냥은 이것입니다. 그녀의 계시가 진짜인가? 가짜인가?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그녀는 여자인가? 남자인가?’, ‘어찌 여자가 살을 드러낸 반바지를 입을 수가 있는가? 그것도 성경이 금하고 있는 남자의 복장을..’ 자신의 지위를 위협당하는 모든 권세자들은 직관을 따르는 그녀를 부도덕한 마녀로 둔갑시키고, 그들이 인육을 먹는다든지, 집단 혼음을 한다든지 하는 소문을 퍼트려 대중의 관심을 끌어옵니다. (요즘은 숨겨둔 아이와 스폰서가 있다더라가 단골 소재입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그들의 계시와 직관에 관심이 몰리면 사람들은 자신들을 버리고 그를, 그녀를, 신으로 모실 테니까요. 그러니 씹어대기 좋은 말랑말랑한 가십의 주인공으로 몰아가야 대중의 관심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의 음성을 따르는 순수한 영혼들은 패륜과 부도덕의 화신이 되어 화형대에 오릅니다. 섹스와 살인, 성性적인, 광狂적인 소재는 언제나 대중의 유일무이한 관심사이고, 그러므로 마녀사냥의 단골소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광장에서(요즘은 인터넷 광장에서) 불에 태워집니다.

 


대중의 관심과는 달리, 권세자들의 두려움은 그것이었어. 그녀가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 그래서 그걸 막으려고 화형 당한 시체를 재로 만들어 강에 뿌렸어. 그녀의 유해가 숭배의 대상이 될까 봐 말이야.

 
진실은 언제나 이면에 있습니다. 그리고 내세워진 명목은 늘 사람들의 눈을 가리웁니다. 그러므로 직관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옳은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따르고 싶은 것만 옳다 합니다. 계시를 따르는 자는 ‘내가 옳다.’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얼 보고 싶어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계시’를, 내게 온 ‘직관’을,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 따르고 싶은 것으로 성숙시켜 가야 할 과제를 수행해야 합니다. 불에 타 죽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배신을 당하고, 이용당한 채 버려지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린 소녀의 선택은.. 순수하고 타협이 없는 삶의 선택에는 힘이 있습니다. 비록 불에 타 순교를 당할지언정, 죽음을 무릅쓰는 모든 선택에는 강력한 영향력이 깃들게 마련입니다. 결국 샤를 7세는 그녀가 화형에 처해진 지 25년 만에, 쟌다르크의 명예 회복 재판을 열어 그녀에 대한 이단 판결을 취소시킵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수백 년이 지난 1920년, 그녀를 ‘성녀’로 시성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가 목숨을 걸고 지킨 조국 프랑스의 영웅으로 당당하게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진실은 무얼까? 신의 뜻은? 그것들은 오히려 권세자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 사람들이 마녀로 몰아 자신들 사이에서 지워내려고 하는 것. 그것들 속에 있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숭배할까 두려워하는 그것들. 권세자들이 우상이라고 말하는 그것들 속에 신의 뜻이 있고 신의 현현이 있지 않을까? 적어도 역사적으로는 늘 그랬어. 성녀와 성인들은 늘 마녀와 마법사들이었으니까.

 
마녀가 성녀가 되는 데에는 오로지 시간만이 필요했습니다. 비록 수백 년이 걸렸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희생이 숭고한 건 버림받은 아들을 죽음으로 지켜 낸, 결국 승리의 왕으로 성장시킨 어머니로서의 소명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쟌다르크에게 마지막 질문이 주어졌어. ‘신의 은총을 받았는가?’, 쟌다르크의 대답은 이것이었지. ‘받지 않았으면 은총을 받기 바라며, 받았으면 신께서 은총을 유지해주시기를..’

 
직관을 따르는 모든 마녀들에게, 계시를 거부할 수 없는 모든 어린 소녀와 어머니들에게 신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마법사 멀린은 그녀의 불타는 열정이 끌고 간 500여 년 전, 쟌다르크의 화형대 그루터기 아래에서 나지막이 속삭입니다.

아직도 니가 보여..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 아직도 니가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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