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넷 중 넷

in #kr8 years ago

bull-3112617_1280.jpg

상황이 좋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여러 사람이 안 좋게 만들려고 애를 쓰는 형국이었다. 갑자기 한국의 부모님과 유학원 관계자들의 연락이 잦아졌는데, 이건 오히려 역효과다. 사춘기의 남자애들은 이유가 뭐가 됐든 여기저기서 간섭하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내 사춘기 시절이 그랬고 애증이도 똑같았다. 보스가 전화를 해서는 전형적인 꼰대 마인드로 나름의 달래기에 들어갔다.


많이 힘들지?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내가 미국에 있을 때는 말이야-



당신의 미국 시절은 아마 궁금하지 않을 거야. 제발 그냥 끊어..

내 보기엔 뱀은 그냥 핑계다.
호스트 아들들한테 스트레스를 받아서 혹시나 호스트를 옮길 수 있을까 지르고 본 것일터. 라는 내 의견은 그대로 츄잉하고 보스는 본인이 상황을 수습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수시로 애증이에게 전화를 해서 본인이 원하는 답만을 기어코 들어내고, 메신저처럼 부모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옆에서 보기에 이건 면책을 위한 증빙 만들어가기에 불과했다.


솔까말. 옮기고 싶은 거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애증이는 밖에서 뛰노는 성향이 아니다.
네이트온으로 물어본 옮기고 싶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그리고 늘어놓는 얘기를 듣자니 해법을 찾아 고심하게 된다. 호스트 아들들은 이리저리 산을 타며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종의 ‘사냥’ 을 하고 전리품을 집에 가지고 와 기른다. 그런데 애증이는 산 타는 것도 싫고, 곤충이나 파충류를 잡는 것도 싫고, 그냥 집에 있고 싶었다.


그럼 만들어.



호스트 아들들의 관심을 끌고 오랜 시간 집에 머무르기 위한 떡밥으로 사냥 전리품의 우리 만들기를 떠올렸고 호스트 아들들은 제대로 낚였다. 이색히들은 순식간에 친형제 이상이 되어, 나무를 구해와 자르고 붙이고 톱질과 망치질을 하며 우리 만들기에 들어갔다. 애증이도 이건 재미가 붙었는지 나름 잘 지내기 시작했다. 숟가락 제대로 얹은 보스는 사태 수습에 대한 본인의 무한한 능력에 도취되어 부모에게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고 잠시 평온의 나날을 보냈다. 떡락하던 스팀 차트가 일단 멈추고 횡보에 들어가듯이.



adult-2449725_1280.jpg



교환 학생 교체를 요청합니다.
떡락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상황은 소용돌이치며 최악을 향해 치닫는다. 이번엔 호스트에게서 교환 학생 교체 요청이 들어왔다. 갑자기 한국의 부모 및 유학원 관계자와 연락이 빈번해지자 의아했던 호스트 엄마였다. 애증이의 방을 청소하다 타미플루를 발견했고, 신종플루에 걸린 것으로 의심되니 보호를 하지 못하겠다고 나섰다. 타미플루는 어머님 작품으로 혹시나 신종플루에 걸릴까 염려되어 약을 굳이 굳이 들려 보냈다. 오리엔테이션에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지참하지 않도록 안내를 했으나, 도를 지나친 염려와 과보호 그리고 근시안적 결정이 아이를 혼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교환 학생은 한국에서 1학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는 게 좋다.
미국의 새 학기 시작에 맞출 수 있기 때문에 온전히 한 싸이클을 돌 수 있고, 미국에서의 1년 학업 성취를 한국에 돌아와 고스란히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환 학생 도중 학업에 이상이 생기면 정상적으로 학업 성취를 인정받지 못하여 추후 한국에서의 진학에 문제가 생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 년을 꿇는다.

애증이의 경우 아직 한 학기도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이대로 학교를 옮기거나 사립으로 옮길 경우 한 학기가 공중에 붕 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진학에 차질이 크다. 나는 한국에서의 진료 기록을 전부 챙겨 해명하자 강력히 건의했고, 보스는 갑자기 우유부단했다. 미국에서 계속 학교를 다니게 되면 진학에 문제는 없지 않나. 상황을 일단 지켜보고 부모와 논의하자. 속셈이 뻔했다. 나는 불가피한 상황을 만드는데 동조할 수 없고, 한국과 미국 중 어느 곳에서 학교를 계속 다닐지는 나나 당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며 부모가 결정할 문제도 아니고 학생 본인이 결정할 사항이다. 이번만큼은 물러서면 안 된다 판단했기에 한마디로 개겼다.


알겠고 내일 아침에 얘기하지.



착 가라앉아 조용해진 사무실에 내가 계속 있으면 분위기는 하염없이 무거울 게 뻔했다.
눈치 보느라 퇴근 못할 동료들의 속 사정도 감안하여 먼저 착잡하게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깊어가는 가을밤 거리를 걷자니 입김은 헐떡이며 계속 눈앞으로 올라왔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은 얼마나 싸워야 하나.
출근길 내내 미간을 찌푸렸고, 쉬이 흥분하고 싶지 않아 매일 아침 마시던 커피도 스킵한 채 사무실로 향했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했지만, 차라리 멍한 상태가 낫겠다 싶었다. 능구렁이처럼 계산이 많은 사람을 대할 때는 말이 길어지면 안 된다. 말꼬리 잡고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시간만 흐른다. 예민하게 조목 조목 반박을 하기보다는 그래도 이건 아니다로 일관해야 말려들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게 책상 앞에 앉아 PC 를 켰고 부팅이 완료된 윈도우가 떴다.



그리고 아웃룩은 삭제되어 있었다.
회사 계정으로 되어 있는 네이트온의 패스워드 역시 바뀌어 있었다.



전후 상황 파악이라는 사고 회로가 돌기도 전에 눈은 보스로 향했고, 보스 역시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에 눈이 마주쳤다. 탐욕에 눈이 먼 그 눈을 진짜 멀게 해버리고 싶었으나, 더 이상 같은 수준으로 내려가 말을 섞고 싶지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아버님께 전화를 드려 자초지종과 해결책을 상세히 말씀드렸다.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고,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퇴사를 하게 됐다.

퇴사의 여운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애증이가 궁금했다. 유일하게 사적인 감정을 쏟았던 학생이기에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한 달 후 동료에게 연락을 취해 물어보니, 결국에는 사립으로 전환하기로 했단다. 애증이가 원했는지 떠밀려 간 건지는 아직도 궁금하다.



books-918521_1280.jpg



그렇게 연달아 타의에 의해 퇴사를 했고,
더럽다고 정의 내려버린 ‘사회’ 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다. 신경 쓰일 일 없이 책이나 보고 싶었다. 학생 때가 좋다. 명확하게 할 일이 정해져 있어 책만 보면 아무도 상관하지 않으니까. 여기에 생각이 다다르자 몇 달 어학원이나 다니다 올까 싶었고, 이제는 꽤 원가 구조가 눈에 들어오는 유학 상품들을 펼쳐놓은 채 쇼핑을 했다. 그리고 필리핀에 몇 달만 있다 오자 결정했다.

물론 나는 나를 안다.
자유로운 곳에 가자면 금세 책은 팽개칠 것 같았기에 해가 지면 외출이 제한되고 외박은 불가한 기숙 형태의 어학원을 골라 갔다. 나이 먹고 기숙 생활을 하자니 은근 재밌었다. 누군가가 적당하게 사생활을 잡아주는 경험이 오랜만이었고, 늦은 밤이 되자면 함께 부대낄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과 나누는 서로의 스토리가 재밌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훈련소 시절 잠들기 전 동기들과 노가리 까던 기억과 비슷할까.



morning-819362_1280.jpg



주말과 주일 아침이면 무조건 근처 5성 호텔의 레스토랑 겸 카페로 갔다.
정원 앞에 위치한 야외 테이블은 적당히 조용했고, 5성 호텔이라 해도 당시 동남아 물가는 축복이었다. 커피를 물처럼 들이키고 Rib-eye 를 껌처럼 씹어대도 큰돈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침이면 자리에 앉아 커피 두 세잔 즐기고, 배고프면 먹으며 책을 봤다. 배불러 졸리기에 잠시 눈을 붙여도 아무도 터치하지 않았던 시간을 즐겼고, 너무 심취하다 보니 책을 읽어버리는 페이스가 예상보다 빨랐다. 그렇게 싸 들고 간 책이 동날 무렵, 서점을 찾아 헤맨 로컬 거리에서 우연히 헌책방을 하나 찾게 된다.

책만 보겠다고 카메라를 한국에 두고 온 것이 아쉬울 만큼 분위기 있는 곳이었다. 선풍기 소리만 윙윙 들리던 서점에서 이리저리 중고 서적을 뒤적였는데, 갑자기 날아와 눈에 박히듯이 모습을 드러낸 책이 있었다. Street Fighters. 월스트리트 저널 리포터였던 Kate Kelly 가 베어 스턴스 은행 파산 직전까지의 취재 기록을 엮어 쓴 책이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책을 샀고, 서점을 나오는 동시에 첫 장을 넘겼다.



23.jpg



이 책은 미국에서 마주했던 공포와 애증이로 인한 감정 소모의 시간, 그리고 동남아 한 섬의 헌책방에서 한 발짝 나서던 바로 그때까지의, 내 시간의 영수증과도 같은 책이 되었다. 이 책을 보며 인과의 고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이후 독서 취향이 180도 바뀌었다.
학교에서나 관심을 가졌었던 기축통화, 금, 거시 경제에 다시 눈을 돌리게 되었고, 막연히 즐거울 것 같았던 미국에서의 삶에 대해 다시 재단을 해본다. 그리고 동경 그 너머의 삶과 비교해본다.



집으로 돌아가자.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돈은 거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컨트롤한다. 그리고 그 돈은 지금 사악한 중이며, 무작정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이제는 그곳에 드림이라는 것이 없으리라.

믿게 됐다.

프롤로그 넷 중 셋
프롤로그 넷 중 둘
프롤로그 넷 중 하나

Sort:  

죄송한데 이번 에피소드만으로는 이야기가 이해가 안가서... 다음 애피소드를 기다릴게요~~

제가 구성을 잘 못했나봐요.ㅠ
처음 얘기부터 보시면 이해가 되실..거에요 ^^a

암튼 중요한 건 반갑습니다.
첨 뵙네요. 앞으로도 자주 뵈요 :D

유학시절 고생하신 이야기인가요 묘사가 소설마냥 빨려들어가네요

유학원에서 잠깐 일했었는데,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어서 얘기를 꺼내 봤어요.ㅎ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몇일 스팀잇 안했다고 읽을 거리가 천지네요 ㅋㅋㅋㅋ
이전 에피소드보러 가즈아~~!!ㅋㅋㅋ

ㅎㅎㅎㅎ 웰컴백입니다. ^-^

프롤로그 끝이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인가요??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

윽. 예리하신.ㅎㅎㅎ
근데 본편이 재미 없으실 거에요.ㅠㅠ
(그리고 쓰다보니 엉뚱하게 빠져서 본편하고 연관성이 그닥 없다는 것도 문제...ㅠ)

암튼 살짝 써둔 게 있어 시작은 했지만 오래 걸릴 것 같네요 xD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

다음글이 더 기대가 됩니다.
소설의 한장면을 보는듯 묘사력이 대단하신거 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오겠습니다.
기분좋게 미약하지만 보팅하고 갑니다!

읽어 주시고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리고 보팅 금액 보다 보팅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D

와 드디어 프롤로그 완성이네요.
애증이 ㅠㅠ 사장님 나쁘네요. 싸운 후 다음날 패스워드 다 바꾼거죠? 진짜 치사하네요.
필리핀에서의 책 한권의 인연으로 스팀잇까지 오시게 된걸까요?ㅎㅎ

굉장히 굴욕적이었ㅅㅂ니다. 오타 아니에요.ㅎㅎㅎㅎㅎㅎ
책 한권의 인연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 :)

간만에 콜라보래이션

[골든티켓x짱짱맨x weee] 18차 현타토끼 이모티콘 증정 !
https://steemit.com/goldenticket/@goldenticket/x-x-weee-18

참여하세요!

더위는 한 풀 꺾였나요?ㅎㅎ
수고 많으십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2
JST 0.081
BTC 61240.63
ETH 1620.29
USDT 1.00
SBD 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