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트를 보고..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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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로 뒤덮인 마트, 다가오는 괴물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엄청난 대혼란 앞에서 카모디는 신의 이름을 외친다. 오 주여! 그녀의 이러한 광신적인 태도는 영화를 보는 내내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주었고, 마트를 탈출하려는 장면에서 그녀가 죽는 순간 진심으로 통쾌했다. 그래, 넌 진즉에 죽었어야 했어! 나는 그제야 일이 제대로 진행되어간다고 느꼈다. 만약 데이빗 일행이 탈출에 성공했다면 그녀에 대한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비극적인 결말은 나로 하여금 카모디를 다시 생각하도록 했다. 인간에게 이 세상은 얼마만큼은 신비롭고 불가해(不可解)한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그저 짐작만 한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 이러한 알 수 없는 인생 앞에서 사람들은 우주의 신비를 알고자 한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우리 곁에는 ‘예수’가 있었고 ‘운명’이 있었다. 때론 ‘부조리’가 있었고 ‘유전자’가 있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이 세상을 설명해주고 의미를 부여해줄 ‘그 무엇’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 동안 삶이 기반하고 있던 인식체계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괴물에 의해 당장의 생존이 위협받는 극한의 상황에서, 카모디와 그 일파에게도 ‘그 무엇’은 마찬가지로 필요했다. 이 영화에서는 그 자리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을 뿐이다. 광기에 휩싸인 그들을 보며 불쾌함을 느꼈던 것은, 단지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안정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수 천 년 동안이나 토템이나 신과 같은 것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그들이 보인 모습은 자연스러웠고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 마지막 장면이다. 나는 데이빗에게 깊이 몰입한 채 이 장면을 보았는데, 네 번의 총성이 울리고 안개가 걷히는 순간 데이빗의 절규하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아, 저런 것이 바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소설 속 장면.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일제시대 독립혁명가 장지락(김산)의 자서전과 같은 것인데, ‘조선시대 민중은 너무 쉽게 자살하는 연약한 민족’이라 말하는 님 웨일즈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살은 식민지 민중이 선택할 수 있는 불과 몇 안 되는 존엄한 인간의 권리입니다.” 영화를 본 뒤에야 비로소 (아마도 실재했을) 소설 속 이 장면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고, 그 소설 덕분에 데이빗의 행동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차 안에서 자신의 아들을 포함하여 네 명을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자신은 괴물과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리라 결의했던 데이빗의 행동은 극한의 상황에 놓인 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불과 몇 안 되는 존엄한 인간의 권리’로 나에게는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안개가 걷히면서 데이빗의 행동은 결국 끔찍한 비극으로 드러난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두 눈을 찔렀던 오이디푸스나 목을 매달아 자살한 이오카스테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잘못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최선의 선택이 비록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그 순간 최선의 것을 택하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마틴 루터 킹이 비난을 무릅쓰고 백인 숙소에서 잘 수도 없는 일이었고,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신탁을 듣고도 부모님이 계신 코린토스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운명 혹은 신(神)과 같은 것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우리들 인간이 처해있는 실존적 조건 하에서 안개(Mist)가 영원히 걷히지 않으리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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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을 보고 나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던 기억이 나네요. 공포속에서 광기어린 사람들과 주인공의 비극적인 선택이 아직 장면으로 남아있어요 ^-^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영화가 끝나고 한 동안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감사합니다 :)

앤딩을 보고 어버버 했던...

오이디푸스의 운명처럼 전 어느정도 운명은 정해져 있다 생각해요 ㅎ
광신적인 그녀는 상황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제가 극악의 죽기 직전의 상황이라면
그녀를 믿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었어요

잘읽고 갑니다 ㅎㅎㅎㅎ

저도 그런 극한의 상황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

오우... 전 그 영화를 친구들이랑 봤기에... 멋지고 깊은 감상은 없고
그저 어이가 없고 화가 났더랬죠...
좋은 감상문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이거 반전이 좀 강력했던.....

정말 인상적인 결말이었습니다..

영화를 본 것이 가물가물한데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오우..

감사합니다 :)

법률 관련 글 자주 봤었는데 영화 후기가 올라오니 반갑네요!!ㅎㅎ
제가 7 Days Black&White Challenge 의 다음 지목자로 @lawyergt 님을 선택했어요 ㅎㅎ 앞으로 7일간 @lawyergt님의 소소한 일상을 엿보길 기대합니다 :-)

지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도 진짜 결말 때문에 엄청 찜찜했던 기억이 나네요.
죽음보다 더한 고통 공감합니다 ㅋㅋㅋ
그만큼 보는 관객도 고통스러웠죠 ㅜㅜ

맞아요ㅠㅠ 정말 강렬한 결말이었습니다..

우연한기회로 미스트 봤었는데 그 BGM과 마지막장면의 여운이
몇일내내 가더라구요 후유증있는 영화였습니다.
동시에 시간이 흐르자 생각나는 영화이기도 하구요
특히 그 선동하는 아줌마 ㅋㅋㅋㅋㅋ 아이구 아주매야 ㅠ_ㅠ
글 잘보고 갑니다^^

ㅋㅋㅋ 참 인상적인 아주매셨어요.. ㅋㅋㅋ 감사합니다! ^^

저예산으로도 이런 명품영화를 만들 수 있단걸 보여줬지요. 섬세한 사유 잘 보여주셨네요. 고맙습니다.^^

Tata님도 이 영화 보셨군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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