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s daily] 반수면 상태에서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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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가 지난 금요일부터 주말까지 삼일쯤 열이 나고 기침을 해대더니, 월요일엔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애는 아픈 삼일동안 기침을 심하게 하느라 밤에 수시로 깼다. 옆에 누운 나도 수시로 깨서 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월요일이 되자, 아이의 바통을 넘겨받아 내 목도 칼칼해지더니, 맑은 콧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수업 중에도 콧물은 쉴 새 없이 나왔고, 휴지를 뜯어 콧속을 헤집어 콧물을 수거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책상에 앉아 수업을 하면서 휴지를 책상 위에 잔뜩 뜯어 놓고는 콧물이 땀처럼 흐를라치면, 재빨리 휴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모니터에 바짝 붙어 콧물을 수거했다.

 이순신 장군이 전투 중 고뿔에 걸려 콧물이 났다면, "적들에게 나의 콧물을 보이지 마라." 라고 했을까. 난 아이들에게 내 콧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한창 감수성이 자라는 나이, 친구의 콧물도 용납이 안 될 텐데 하물며 다 큰 성인의 콧물을 보는 일이란! 내 콧물을 아이들이 본다면, 분명 그 장면은 아이들의 머릿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점심시간, 식판을 앞에 내려놓자마자 벌떡 일어날 것이다.

 그 시간 수업 분량을 마치고, 시간이 조금 남아서 복습 시간을 주고 나니, 한쪽 콧구멍에서 나오는 콧물은 더더욱 땀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코에서 바로 수직 낙하할 정도였다. 점성이 하나도 없는 게 신기했다. 휴지로 콧구멍에서 나오는 땀을 훔쳤을 때, 피를 보고 말았다.

 난 모니터에 바짝 붙어 얼굴을 숨기고 코피를 닦았다. 휴지를 조금 말아서 콧구멍을 봉했다. 다행히 피는 금방 멈췄다. 그 날 밤에 아이들 목욕을 시키고 세수를 하는데 두 번째로 코피가 터졌다. <천장지구> 마지막 장면의 유덕화 만큼은 아니지만 코피는 제법 빠른 유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의 코피 소식을 듣고 와이프가 다가와서는 말했다. "내일은 조퇴하고 일찍 와서 쉬어."
 그 말을 들은 나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집에 오면 쉴 수 있남?"

 아내는 동의도 부정도 아닌 묘한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어떤 공포심이 나를 관통했다.

2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혹시 밤에 꼭 깨어 있어야 하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이 약을 드세요. 밤에 먹는 약 속엔 잠이 오는 성분의 약이 포함됩니다.”

 약효에 대해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수면 욕구 정도는 스스로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밤 11시가 넘어가자, 눈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제 밤에 글쓰기에 대한 글을 하나 썼는데, 가수면 상태로 썼음을 고백해야겠다. 노트북을 앞에 두고 자판을 두들기다가 눈이 감기고, 몇 분이 지나 다시 자판을 두들기기를 반복하며 완성한 글이다.

 겨우 눈을 떠서 모니터를 응시했는데, 나의 뇌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한 문장을 쓰고 나서 눈꺼풀이 부르르 떨리더니, 글의 맥락과 맞지 않는 새로운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새롭다기보다, 말도 안 되는 단어의 나열이었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일기는 여러 면에서 유용한 것이다. 달뱅이가 기여가는 저녁 부렵에 은하수는 찬한하고” 가수면 상태에서 글을 쓰니 맞춤법도 안 맞고 문장도 되지 않는 이상한 단어의 나열이 되고 만다. 깜빡 졸았다가 눈 떠보면 이런 문장들이 생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문장 고치기를 반복하고 자고 깨고를 반복하면서 그 글을 완성했다. 그래서 이야기가 멀리 뻗어나가지 못했고 당장 눈앞에서 구할 수 있는 어휘들을 겨우 주워 사용했다. 뭐 어쨌든.

 아까 이 글을 시작할 때, 딸애가 먹는 짱구 젤리 2개와 레츠비 캔 커피를 꺼내왔다. 졸음이 쏟아질 때 저항하기 위한 도구로 말이다. 짱구 젤리 2개는 벌써 껍질이 벗겨졌고, 캔 커피도 바닥이 보인다. 아, 또 시작됐다. 졸음은 기어이 내 몸에서 항복을 받아낼 것이다. 이 글을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을까. (이까지 쓰는데도 이상한 문장을 한 서너 번 쓰고 지웠다.)


3

 아차, 다시 눈을 떠보니, ‘전학 온 여고생들 때문에 교통 교육w’ 이런 이상한 문장이 씌어 있다. 무슨 뜻이냐고? 나도 모른다.

 분명 할 얘기가 더 있는데, 여기서 더 이야기를 길게 끌고 나가자면, 얘기를 다 못 끝낼 것이다. (방귀 얘기다.) 이쯤 되면 여기까지 쓴 것도 황송하다.

 노트북을 덮고 잠을 청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모든 감각을 닫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난 쉽게 굴복할 생각은 없다. 간단히 제압당하기 일쑤면서 호기를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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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일하고 싶은 뇌와 몸이 호기를 부리기도 하지요. 잠오는 약과 싸우면서도 글을 남기시다니.. 걱정되는 동시에 존경스럽네요. 푹 쉬고 돌아오세요.^^ 몸이 빠르게 회복되길 바라고 있을게요.

콧물과 목이 따가운 증상이었는데 많이 나아졌네요ㅎㅎ 간밤엔 감기 증상과 싸운 게 아니고 약하고 싸운 거 같네요ㅋ 레일라님은 이런 성가신 증상과 마주하지 않길 바랄게요^^

역시 글은ㅎㅎ자고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써야 인간의 글이 되더라고요^^)

좋은 생각을 하며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겠습니다ㅎㅎ

으어 솔메님 감기 기운과 싸우시며 간신히 쓰신 글인지 전혀 몰랐어요!
마치 전신마취 이후 비논리적인 말을 쏟아내는 사람처럼 잠에 취해 글을 완성하셨군요.건강이 우선이니 며칠 푹 쉬고 돌아오세요! 점성 없는 콧물이 얼마나 괴로운지 잘 알고 있거든요.

맞아요. 마취후 헛소리를 하는 경우요~~ 내시경 하고 나서 그런 일이 많다던데요. 말 뿐 아니라 자판을 칠 때 글도 그럴 수 있단 걸 알았네요ㅎㅎ 다행스럽게도 주책 맞은 콧물은 안납니다^^

아내분의 의미심장한 표정이 선합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매우 일반적인 공포죠..ㅎㅎ
푹 쉬시고 쾌차 하십시오.

ㅎㅎ 일반적인 공포를 공유하고 있군요ㅋㅋ
꾀병처럼 다 나았습니다. ㅎ

지금은 좀 어떠신가요??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쏠메님^^

걱정해주신 덕에 몸은 아주 가뿐합니다ㅎㅎ
오늘은 동료들과 여행을 떠나왔어요.
호돌박님도 좋은 주말되세요^^

학생 시절, 늦은 봄이면 항상 노트 구석을 차지하던 글자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기묘한 형태의 연필자국을 연상시키는 구절이군요ㅎㅎㅎ

달뱅이가 기여가는 저녁 부렵에 은하수는 찬한하고

학창시절에 춘곤증에 자주 걸리셨군요ㅎㅎ
졸다 깨면 노트에 지렁이가 기어가곤했죠ㅋ

역시 솔메님 완전 멋진 의지의 소유자 이신듯합니다. 약을 드시고 밀려오는 잠 속에서도 이렇게 생생한 글을 읽게 해주시다니 ㅠㅠ 감동입니다. ㅜㅜ
읽는 내내 제가 다 조마조마했어요. 아이들 앞에서 콧물 떨어질까 봐요^^
콧물을 마구 상상하게 하시는 ㅎㅎ
그나저나 콧물을 넘어 코피라뇨.ㅠㅠ 깜놀 ㅠㅠ 몸 잘 회복되고 계시길 바랍니다. 기력이 많이 약해지신 모양이에요. 푹 쉬시고 빨리 건강해 지시길 바랍니다🙏 🙏

ㅋㅋ 약은 힘이 세더라구요. 컨디션 조절도 할겸 밤에 푹자고 최근에 업무도 많아서 스팀잇도 며칠 푹 쉬었습니다. 덕분에 잘 회복했어요.
다행히도 저의 콧물을 애들은 보지 못했죠ㅋ
다시 일상의 질서를 좀 세워야겠어요ㅎ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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