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공책 찾기에 대한 잡설과 프리 라이팅

in #kr6 years ago (edited)

kyslmate.jpg

 저는 공책을 단어들을 써놓은 저장소라거나, 제 생각과 자기반성을 적어놓는 비밀스런 장소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공책에 무엇을 적어놓았는지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즉 종이에 단어를 적는 행위에도 관심이 있지요.

 항상 공책에 씁니다. 작은 사각형들로 가득 찬 모눈 종이 공책을 특히 좋아합니다.

    -폴 오스터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사용하는 공책이나 펜 같은 것에 엄격한 자기 기준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글을 쓸 때, 아무 종이에 그저 손에 잡히는 펜으로 쓰지 않겠다는 이상한 신념 말입니다. 폴 오스터는 그런 부류 중에서도 좀 유별한 경우입니다. 적당한 공책을 골라 쓰는 걸 넘어서 공책 성애자 수준이지요. ‘공책 패티쉬’라는 말이 없는 걸 보면, 공책에 성적인 흥분을 느낄 거라는 의심은 비약일 듯싶지만, 자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도 공책을 즐겨 쓰도록 할 정도니 보통 애정은 아니라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어떤 공책을 쓰느냐, 즉 공책의 색감이나 크기, 질감 따위가 실제로 글의 내용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제 생각엔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자, 지금부터 글을 써볼까.’ 하고 그 날의 글쓰기를 시작하는 작가의 마음과 기분엔 어느 정도 영향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책의 선택이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면, 그건 논리적인 이유보다는 내 기준에 맞는 공책이 아니면 좋은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기 최면 내지는, 선사 시대의 동물 벽화처럼 좋은 글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미에 가까울 것입니다.

 제겐 일기장도, 메모장도 아닌 용도의 공책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공책은 일기장이라고 말할 수도, 메모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명확하게 무얼 쓰겠다고 정해놓은 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뭔가를 자유롭게 쓰기 위한 용도입니다.

 저도 폴오스터처럼 공책을 애정하고, 공책에 대한 이상한 신념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무 공책이어서는 안 됩니다.(펜에 대해서도 비논리적인 기준을 갖고 있지요.) 공책은 제가 가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내 작은 가방 속에 실려 다녀야 하므로 엄격한 선택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크기는 너무 작아서도 안 되고 너무 커서도 곤란합니다. 제가 즐겨 쓰는 가방 중에 가장 작은 가방에도 들어가는 크기여야 합니다. 경험상 A5 크기가 적당합니다. 겉표지는 부드럽게 휘어지되 찢어지거나 쉽게 훼손되지 않아야 합니다. 공책을 다 채울 때까지 갖고 다녀야 합니다. 부지런히 쓰면 몇 달, 좀 게으르면 2-3년이 될 수도 있으므로, 쓴 글과 종이를 최대한 보호하되 가방의 움직임도 받아낼 유연함도 있어야 합니다. 그 같은 조건엔 PP재질 겉표지가 제격입니다.

 속지는 일반 대학노트처럼 가로줄만 있어야 하고 제 글씨 크기엔 0.7cm간격이면 적당합니다. 풀로 제본된 것은 불편합니다. 작은 공간에서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면만 펴고 쓰기 좋게 다른 면이 완전히 넘어가는 링 제본 공책이어야 합니다.

노트.jpg

 몇 년 전, 대학원 기숙사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마침 공책을 다 써서 새 공책을 사야 했습니다. 전 제 기준에 부합하는 공책을 구하기 위해 저녁 시간을 투자해 도시의 중심가로 나가서 문구점들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새 공책을 쇼핑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괜찮다고 소문난 여성이 나오기로 한 미팅에 나가는 기분이랄까요.

 지하철역을 나와서 낯선 거리를 걸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문구점을 찾았습니다. 우연히 제 뒤를 따르던 사람이 있었다면, 저를 오늘 갓 상경한 시골 청년으로 상정하고 연민의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심가엔 꽤 큰 문구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3군데쯤 돌아다녔는데 조건에 들어맞는 공책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카메라가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었다면, 그리고 상점은 비추지 않고 제 표정과 행동만 찍었다면, 시청자는 제가 영락없이 고가의 시계나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선택하려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선택의 과정은 신중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귀한 물건을 찾는 일엔 언제나 난관이 따르게 마련이지요. 전 빨리 사서 돌아가야지, 하는 조급함은 없었습니다. 그 과정을 즐기고 있었지요. 누군가가 취미란에 ‘낚시’를 적을 때, 전 ‘내 맘에 드는 공책 찾기’로 적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니면서 새로 알게 되었던 건, 문구점마다 참 다양한 노트를 팔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구점마다 각기 다른 브랜드 위주로 진열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문구 회사의 영업 사원들이 이 지역에서 다 부지런히 영업을 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디자인, 색상, 재질이 제각각이었습니다. A5크기에, PP재질의 앞뒤 표지를 가진, 줄 간격 0.7cm인 링 공책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꽤나 평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문구점에 들어가면 조용히 움직이며 세심하게 찾았습니다. 제가 찾는 공책의 조건을 문구점 주인에게 굳이 알리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찾는데 저보다 더 오래 걸릴 것 같았습니다.

 4번째 방문한 문구점에서 찾던 공책을 발견했습니다. 표지 색도 형광 빛이어서 맘에 들었습니다. 두 권을 사서 한 권은 독서노트로, 한 권은 ‘프리 라이팅 노트’로 사용했습니다.

 사실 이 글의 초고도 그때 산 ‘프리 라이팅 노트’에 저장된 글입니다. 글을 쓰면서 내용의 70%이상 바뀌긴 했지만, 이 글의 씨앗 역할은 충분히 담당했지요. 가끔 다 쓴 노트를 뒤져보곤 합니다. 잡다한 감상과 잡문, 소설 구성과 단편 소설 초고도 있습니다. 목적과 테마를 규정하기 힘든 공책인데 제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기록 유산이지요.

노트5.jpg

덤) 프리 라이팅



 요즘은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비율이 높아져서 예전처럼 육필로 적는 경우는 많이 줄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트북보다 공책을 적극 활용하는 글쓰기가 있습니다. 바로 ‘프리 라이팅(Free writing)’으로 글쓰기 연습을 할 때입니다. 많은 글쓰기 책에서 ‘프리 라이팅’에 대해 말합니다. 대표적인 책으로,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입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공책을 펴고 5~10분간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나오는 대로 손 가는 대로 쓰는 겁니다. 한 가지 주제를 정하고 그것에 대한 문장을 써내려가도 됩니다. 머물러 생각하기보다 속도가 중요합니다. 처음엔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지 않고, 쏟아져 나옵니다. 10개의 문장을 썼다면 그 10개가 모두 연관성이 없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걸 하면 할수록 쓰는 속도가 빨라지고, 머릿속에서 쏟아지는 문장들을 걸러내고 앞에 문장과 연관된 문장을 찾아내는 여유도 생기게 됩니다.

 ‘프리 라이팅’ 으로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완성도 있는 글을 쓰긴 어렵습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쏟아내는 글쓰기이므로, 글을 쓰는 속도를 높이고 직관을 기르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이른바 연습법이지요.

 저는 이 연습을 대학교 입학 직후에 했는데, 이후 시험을 치를 때 가장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대학 시험이라는 것이 머릿속으로 기억했던 지식을 짧은 시간 내에 쏟아내어 조직하는 작업이지요. 바로 ‘프리 라이팅’으로 가장 훈련이 잘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후 문학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초고를 뜨거울 때 얼른 써버리려고 하는 상황에서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영양소로 바뀌어 내 몸 속을 돌아다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공책을 가득 채운 ‘프리 라이팅’의 흔적들은 가끔씩 공책을 열 때마다 제게 쓸 거리를 준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습니다.

영감5.jpg

Sort:  

프리라이팅.. 내일부터 해봐야겠네요.
예전에 이런 이름은 아니더라도 그냥 뭔가를 쓰고 싶을 때 끄적거리곤 했었는데.. 그러고 싶을 때마다 시간을 정해놓고 한번 써봐야겠습니다 ^^
처음이라 뭔가 연결하긴 어렵겠지만 생각의 흐름을 연결시키는 연습도 되겠네요.ㅎ 감사합니다~~

네 미동님, 하는데 십분 정도 밖에 안 걸려요. 매일 하니까 도움이 되더라구요.ㅎ
뭐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겠죠.ㅋ 전 요즘은 아주 가끔씩 해본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공책부터 하나 장만하심이.. ^^

완벽한 공책이나 펜을 찾으러 온 시내를 돌아다니는 기분 공감가요~. 전 까다롭진 않지만 좋아하는 공책을 찾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억... ㅋ 연습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왜때문인지 모든 글을이제껏 프리라이팅하고 있었던 느낌적인 느낌; ㅋㅋㅋ 전 신중히 쓰는 연습을 해야할 것 같아요.

좋아하는 공책, 마음 속으로 딱 그리던 공책을 사면 정말 기쁘지요.ㅎ 그 공책과 동행하며 꽤 긴 시간을 함께 해야 하니, 온 시내를 뒤져서라도 찾아야죠.^^
ㅋㅋ 모든 글을 프리라이팅 하시는..ㅋㅋ 근데 프리라이팅으로 써도 이 정도다! 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되는 거죠.ㅎ

오우 ㅋㅋ 오해십니다.. 아주 느린 프리라이팅(?) 논리가 일도 없이 쓰고싶은대로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입니다~;ㅋㅋ

오호 프리라이팅이라니. 저랑은 완전 반대의 개념으로 공책을 사용하시는군요!
저는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용도로만 썼어요. 그 외의 것들, 특히 문득 떠오르는 생각 이런걸 급히 적다보면, 마음에 안드는 글씨 때문에 찢어버려서 못 쓰겠더라고요.
지금은 그냥 에버노트에 의존해서 삽니다. ㅎㅎ

와아. 정말 반대의 개념으로 쓰셨네요! 써니님은 최종으로 정돈된 결과를 쓰신 것이고, 저는 정리되지 않은 과정을 쓴 게 되겠네요.ㅎㅎ
써니님의 정돈된 공책은 아주~ 오래 소장할만한 가치가 있겠습니다.^^
저도 공책이 담당하던 많은 부분이 스마트폰 메모장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네요. 흐음, 가장 기억에 남는 공책은 대학원 때 흥미롭게 들었던 과목 중 하나를 정리한 공책이었는데 후배에게 줘버렸더니 이제와서 아쉽네요. 게다가 이사를 몇 번 하다 보니 책마저 안보여서요 :(

아니 정성껏 정리했던 공책을 줘버리다니요! 왜 그러셨어요~~! '복사기'라는 좋은 문명의 이기가 있는데 말이죠. 두고두고 아까우시겠어요.ㅎ 당장 써먹을 지식이 아니라도, 개인 역사의 중요한 사료일텐데 말이죠.^^

헉... 지.. 지금이라도 달라고 하면 과연 갖고 있을지 ㅠㅠ 당연히 아니겠죠? 흑

ㅋㅋ 아직도 교류하고 있다면, 한 번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네요.ㅎㅎ

공책 유목민 생활을 하다 몇년전 다양한 용도로 적당한 공책을 딱 찾았는데 그후로는 다른 공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네요. ㅎㅎ 펜도 마찬가지로 완벽한 궁합을 타는듯해요. 솔메님의 정갈한 글씨체가 부러워요 :)

궁합이 맞는 공책을 찾으셨군요.ㅎ 그럼 다른 공책엔 못 쓰죠.ㅋ 직접 들고 쓰는 펜은, 어쩌면 더 세심하게 골라야 하는 물건인지도 모르겠어요.
제일 정갈한 페이지입니다.ㅋㅋ 다른 페이지는 줄 긋고 칠하고, 아주 혼탁합니다.ㅋ

Upvoted.

DISCLAIMER: Your post is upvoted based on curation algorithm configured to find good articles e.g. stories, arts, photography, health, community, etc. This is to reward you (authors) for sharing good content using the Steem platform especially newbies.

If you're a dolphin or whales, and wish not to be included in future selection, please let me know so I can exclude your account. And if you find the upvoted post is inappropriate, FLAG if you must. This will help a better selection of post.

Keep steeming good content.
@Shares - Curation Service

Posted using https://Steeming.com condenser site.

아날로그의 반격!

아날로그 좋아합니다. 점점 입지가 좁아지고 있지만요. 작은 거라도 큰 만족감을 주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아이패드가 나온 이후로는 현저히 종이에 글을 쓰는 일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내용을 메모하거나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종이만큼 좋은 건 없더라구요.

네 종이에 꾹꾹 눌러쓰는 맛이 있지요. 손과 몸을 쓰는 원초적인 행위랄까요. ^^

boddhisattva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boddhisattva님의 TOP 200 effective Steemit curators in KR category for the last week (2018.09.17-2018.09.23)

...tyle="text-align:left">132 kyslmate/td> 95 <td style="text-al...

t3ran13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t3ran13님의 [The Alternative Steem TOPs, 24.09.2018 GMT] Top Of The Pop

...>77.889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공책 찾기에 대한 잡설과 프리 라이팅
kys...

초고가 뜨거울때 쓴다 라는 표현이 아주 멋져요! 저도 프리라이팅용 공책하나 마련해야겠다는 맘이 무럭무럭듭니다~!^^

초고를 뜨거울때 써버려라. 스티븐킹이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강조했던 내용 중 하나지요. 공책 장만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ㅎ

Coin Marketplace

STEEM 0.17
TRX 0.15
JST 0.028
BTC 58116.56
ETH 2361.49
USDT 1.00
SBD 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