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이기적 유전자와 김동률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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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유명한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생명체와 유전자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인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좀 풀어보도록 하겠다. 리처드 도킨스에 의하면, 유전자의 최종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유전자는 섞이고 교차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 유전자의 특질이 좀 바뀔 순 있어도 유전자는 영속한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고 생명체를 옮겨 다니며 존재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가 잠시 타고 가는 자동차와 같다. 유전자는 생명체 속에서 머물다가 자동차가 고장 나기 전에 다른 차로 갈아타기 위해 성호르몬을 분비하도록 명령한다. 이렇게 유전자는 생명체를 바꿔 타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기적 유전자>의 주요 골자다. 생명체의 구성 요소로만 인식되던 유전자를 오히려 그 지위를 바꾸어 버림으로 과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가만,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냐고? 천만에.

나의 연애, 김동률의 생존 기계가 되다

 〈이기적 유전자〉에서의 생명체와 유전자의 정의를 빌어 말하자면, 김동률은 나의 연애를 타고 영속하려는 유전자와 흡사한 존재이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 연애사 속에서 김동률은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곤 했다. 늘 우월적 지위로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했다. 내 연애가 끝났을 때, 김동률은 다음 연애에 옮겨가 보란 듯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상상 속에서만 연애를 했다. 고교 졸업과 함께 첫 데이트 상대가 나타났다. 그녀가 내게 준 첫 번째 선물은 ‘전람회 1집’ 음반을 복사한 테이프였다. 1990년대 중후반, 음반의 불법 복제는 더블데크를 통해 각 가정에서 버젓이 자행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음반의 복제 테이프를 내게 주면서 그녀에게 ‘전람회’가 어떤 의미인지 역설했다. 그 그룹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던 나는,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도 공감하겠다는 자세로 그 얘기를 들었다. 내가 드디어 전람회의 음반을 들었을 때, ‘김동률’이라는 강력한 유전자는 내 귀를 타고 들어와 내 안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그 연애가 비록 썸만 타다가 끝장났지만, 내 안에 한 번 들어온 그 유전자는 내 몸에서 적응을 끝내고 다음 연애로 옮겨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맘대로 평가를 내리자면, 역사상 최고의 명반 중의 하나인 ‘전람회 2집’을 접했을 때 난 내 목소리를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김동률’로 변화시키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노래를 할 때마다 지금도 따라 붙는 ‘비음’은 그때 생긴 것이다. 모임과 만남 코스에 꼭 들어 있던 노래방에 가면 줄창 김동률을 소환했다. 내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김동률은 내 안에서 나를 조종했다. 연애 상대와 함께 노래방에 가서 <기억의 습작>을 부를 때, 그때는 그게 죄인 줄 몰랐다. 회개의 기회는 그로부터 한참 후에 찾아왔던 것이다.

 내게 고음이 필요한 건, 오직 <기억의 습작>을 완창하기 위해서였다. 김동률의 음울하면서도 포근한 저음을 위해 성대의 구덩이를 파고 한없이 내려갔다. 그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때때로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때 남은 성대의 상흔으로 난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떤 노래를 불러도 비음이 섞여 나와서, 김동률 노래가 아닌 노래를 부를 땐, ‘정준하’라는 오명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전람회 3집’을 지나, 김동률의 솔로 앨범이 차례로 나올 때도 노래방에서의 내 선곡은 꽤 오랫동안 그 유전자의 지배를 받았다. 노래에 대한 열망은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이제서야>로 이어졌다. 가끔 그 유전자는 ‘이승환’으로 변이를 일으키기도 했다. 김동률의 묵직한 비음은 이승환의 가늘고 날카로운 비음으로 전이되었다. 비음은 내 최고의 무기이자,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타이틀곡이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김동률의 노래들이 더 좋아지고, 나만 사랑하는 듯한 곡이 하나둘 늘어갔다. <귀향>, <동반자>, <이방인> 같은 곡들이다. 변화하고 교차하면서 김동률은 내 감성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유전자를 추출하는 건 어렵지 않으나, 완전히 파내는 일은 이제 글렀다.

 2013년 9월, 나의 마지막 연애 상대와 처음으로 김동률 콘서트에 갔다. 콘서트홀에 퍼지던 그의 목소리와 격조 높은 반주들. 그곳엔 김동률이라는 유전자가 타고 다니는 ‘연애’들이 가득 차 있었고, 우리도 그 중 하나였다. 나의 마지막 연애 상대와 그해 11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연애의 종말이었다.

 연애가 끝장나고도 생존하여 새로운 연애에 준엄한 명령을 내리던 김동률은, 이제 내 기억에 터를 잡고 그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다. 내 안의 김동률이 발현할 때면, 난 귀향하듯 플레이 버튼을 눌러 그를 맞이한다. 그러면 그는 이기적인 유전자가 되어,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잠잠하고 외떨어진 장소에 날 세워두는 것이다.

 김동률은 이제 내 연애사에서, 내 삶으로 거처를 옮겨 강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


추억이 된 김동률 노래 몇곡 소개합니다.

전람회 1집, ‘너에 관한 나의 생각’

전람회 2집, ‘이방인’

김동률 3집, ‘귀향’

최신곡을 안 들어볼 수 없죠.

김동률,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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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ㅎ

첫 사랑이 건네준 카피테입, 그리고 전람회의 음악... 영화같은 첫사랑의 추억이네요. 건축학 개론이 떠오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You're so nice for commenting on this post. For that, I gave you a vote! I just ask for a Follow in return!

비슷한 시기에 20대를 보냈다면 다들 공감할 수 있는 추억들이지요^^ 잠시나마 추억을 떠올리셨다면 보람찹니다. 감사해요.

휴일 아침의 시작이 김동률이라니요!
어지간해서는 오글거려서 안그러는데 일면식도 없는 이분을 전 형이라 불러요ㅋ 동률이형!!
포스팅 제목에서 김동률을 발견하니 갑자기 막 흥분되고 글을 읽기 전에 의식을 치르듯 김동률을 검색해서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고 있네요. 리스트를 추리는 동안 내 기억속의 이야기들이 "나! 나! 나를 꺼내줘!" 하며 아우성치네요.
아! 아침부터 술땡기네요. 김동률이 남다른 의미인 사람과의 술자리에서 김동률이라는 화두로 밤새 인생스토리를 나누다가 끝은 노래방으로 향해 목이 터져라 부르며 카타르시스를 맘껏 발산하고 싶은 욕구가 치미네요. 정말 김동률이란 이기적 유전자는 몸뚱아리를 가리질 않네요. ㅋ

제 최애곡은 "REPLAY"에요. 김동률 곡중에서 가장 의미가 남다른 노래죠. 특정시기에 한곡반복재생으로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을때까지 듣고 또 들었던 곡이에요. 지금도 오랜만에 들으니 그 때 감정이 약간 올라오는 듯 한데 풀어 놓으면 하루의 시작이 우울할 거 같아 여기까지 해야겠네요ㅋ
음악 감상하고 잠시 회상하고 댓글 쓰다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됐네요! 맛점 하시고 활기찬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김동률 유전자를 갖고 계신 분이 여기 또 한 분 계셨군요!ㅎㅎ 저한테도 동률이 형이니, ryuie님과 저도 형제가 되나요?ㅋㅋ
노래방에 가시면 동률이 형을 자주 소환하셨겠네요ㅎ 왠지 ryuie님의 분위기에 김동률이 딱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많은 분들이 동의할 것 같습니다.
Replay 좋아하시군요! 좋은 노래가 한둘이 아니지요. 저도 좋아하는 노래입니다ㅎ 나직이 속삭이는 그 부드러운 저음을 들으면 참 많은 감정이 교차합니다. 공통된 기호를 하나 더 찾은것 같아 기쁩니다. 어느새 저녁이네요. 즐거운 저녁되세요^^

안녕하세요 @kyslmate님 일전에 당첨되신 대문이미지가 완성되었습니다
마음에 드셨음 좋겠습니다!

https://steemkr.com/kr/@ceoooofm/kyslmate

잘 보고 왔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멋집니다^^ 잘 활용하겠습니다ㅎㅎ 와 신난다. 나에게도 대문이 생겼다아~~ 문학적 글쓰기 강좌 시리즈에 활용할 예정입니다ㅎ

잘 활용해주신다니 보람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네요
퐈이팅

감사합니다. 방문 대환영입니다ㅎ

전람회로 시작해 카니발, 솔로, 베란다프로젝트.
저 역시도 그와 함께한 시간이 오래 되었네요.
'기억의 습작'은 높기도 높지만 끝을 어디서 맺어야 하는지...예전에는 그런 노래가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볼륨이 서서히 작아지며 끝이 나는.

슈퍼스타K가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네 댓글보고 슈퍼뉴비된 거 알았습니다.ㅋ 냉큼 달려가서 확인하고 왔습니다. 이런 좋은 날도 있군요.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kyslmate님~~~~슈퍼스타 1위 축하드려요~~>ㅁ<
저도 어제 김동률 노래 포스팅했어요~통하는건가요???
김동률의 피아노 선율이 너무 좋더라구요~

그리고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 주문했습니다.
이사짐 들어오느라 이제야 주문했네요~~
읽어보고 포스팅 하겠습니다~^^*

와 축하 감사합니다! 알려주신 덕에 확인했어요^^
김동률 빠가 여기도 있네요. 좀이따 포스팅 보러갈게요ㅎㅎ
'금수' 좋은 선택입니다. 후기 꼭 보고 싶어요. ^^

김동률 저도 참 좋아하는데 이렇게 글로 풀어내시니 정말 감동입니다! :D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리플레이, 기적, 오래된 노래, 그게 나야, 취중진담, 아이처럼 등등... 세대를 가리지 않고 누가 들어도 명곡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이 맘에 드신다니 기쁩니다ㅎ 에버님 말씀대로 한곡을 꼽기 어러울 정도로 명곡이 넘쳐나죠. 우리의 젊은 날을 함께 한 소중한 가수입니다^^

몸뚱아리는 그저 그릇일 뿐이고
사실상 그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자신에게 가장 크게 영감을 주었던
김동률이라는 명칭이
다른이들에게는 다른 명칭으로
다른 모습으로 님과 같은 형태로 활동하고 있는 건아닌지
생각하게 합니다.

잘 보고 가요

후... 제 유전자도 복제하고 싶네요...

노래 한 번 들으시면 김동률 유전자가 고추참치님 속에 침투할 거예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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