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적 한국사] 천추태후 1편 - 고려시대의 근친혼

in #kr6 months ago

우선은 천추태후의 이야기를 하기전에 태조 왕건의 정책부터 조금 알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추태후가 현재의 성의식으로 본다면 문제가 되는 점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천추 태후를 첫번째 주제로 삼은 이유가 근친혼이라는 부분부터 시작을 하는데 왜 이런 근친혼에 대해서 이 당시의 역사가 많이 다루지를 않는지 그 배경부터 조금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우선 태조 왕건의 정책부터 조금 언급하고 천추태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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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청동

1. 신라말 고려초

신라가 망하고 후백제 견훤과의 피튀기는 전쟁이후 한반도를 통일한 왕건은 우선은 지방 호족의 힘이 어마무시한 것을 파악하게 됩니다. 원래 왕건 자체도 송악 – 현 개성 – 의 유력 지방호족 출신이었으므로 이런 분위기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렇게 지방 호족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이유가 어디있었을까요?? 요즘도 통하지만 당연히 돈이 많았기 때문이죠. 물론 이 시기는 화폐라는 것의 가치보다 바로 땅이 경제력을 나타내는 바로미터였죠. 신라가 혼란스러웠던 시기, 호족들은 귀족이나 관료들이 차지하고 있던 식읍이나 녹읍을 전부 다 차지하고 이러한 토지를 경영하기 위해 부속건물을 짓기위한 공간이 전장도 모조리 사유화 해 버렸죠. 자 이제 돈이 많으면 무엇을 꿈꾸겠습니까?? 그냥 이 당시 호족으로만 남을려 했을까요?? 당연히 자신의 재산의 안전을 추구하게 되겠죠?? 그래서 권력에 대한 욕구를 드러내게 됩니다. 자 우선은 보호를 목적으로 자신만의 군대 – 사병 – 을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사병을 잘 운용하기 위해서는 지휘체계도 있어야 하는데 이러다 보니 관부조직도 만들어서 지역백성을 중앙정부 대신 통치하기도 했죠. 이렇게 중앙의 말을 안 들을 수 있는 호족의 존재는 통일 왕국을 형성하고자 했던 왕건에게는 크나큰 부담이었습니다.
견훤과의 전쟁도 막 마무리 된 고려초, 이러한 지방 호족을 잡으려 또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태조에게도 큰 부담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방호족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한쪽 호족을 토벌하러 가면 다른 호족들이 연계를 할 가능성도 존재 했습니다. 그래서 고민끝에 왕건은 중앙 정치에 안정을 꾀하고 지방 호족들을 누를 수 있는 차선책으로 바로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본 결혼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2. 결혼 정책

우선 왕건은 이 정책을 시행하기 전에도 이미 3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왕건이 맘에 들어서 결혼을 한 사람은 두명이었습니다. 첫번째인 인혜 왕후 유씨, 두번째는 장화왕후 오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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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왕후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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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왕후 관련은 유명한 설화가 있죠 급하게 마시지 말라고 버드나무 잎을 띄워서 준

그런데 세번째 부인부터는 조금 상황이 달라집니다. 세번째 황후는 신명순성 왕태후는 충주의 유지였던 유긍달의 딸과 혼인을 한 것이죠. 이 당시 충주는 신라 5소경 – 신라의 행정구역중 하나로 작은 서울 – 중 하나인 중원경 지역으로 후백제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이러한 혼인으로 중원경지역의 호족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즉 고려가 성립하기 전 이 3번째 부인과의 혼인으로 그 경험을 충분히 했으므로 아마 혼인정책을 자신감있게(?) 추진한 거 아닌가 생각합니다.
네번째 왕후는 신정 왕태후인데 바로 황주 황보씨로써 시중을 지낸 제공의 딸이었습니다. 황주는 지도를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대동강 아래쪽에 위치하여있습니다. 즉 신라의 국경지방으로 군사요충지였습니다. 즉 이 지방의 호족딸을 아내르 맞아들임으로써 태조의 입지는 더 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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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 5소경

다섯번째 왕후는 신성 왕태후인데 경주 김씨 집안 김억렴의 딸이었습니다. 자 여러분들도 촉이 오시죠 ?? 바로 신라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신라지역의 호족들을 자신의 세력권안에 묶어놓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이 왕태후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더 자세히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튼 이후로도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결혼 정책은 계속되었고 총 29명의 부인 30명이 넘는 자식을 얻게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식들이 많으면?? 여러 문제들이 생기게 되죠. 결국 태조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우리 자손이 왕이 되어야 한다라는 후계 문제가 복잡해 지게 됩니다. 물론 태조가 살아있을때는 이런 속셈을 잘 드러내지 않다가 태조가 죽은후 본격적으로으로 왕권에 도전을 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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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왕후의 무덤

3. 근친혼의 전통 시작

태조의 아들 중 왕위에 오른 이는 제 2대 혜종, 제 3대 정종, 제 4대 광종입니다. 혜종과 정종은 현대에 윤리관에 비추어봐도 별문제없는 결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광종이 문제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노비를 해방하고, 과거제도를 시행했다는 그 업적으로 알고 있는 광종… 하지만 광종은 근친혼을 통해서 왕건의 세번째 왕비였던 신명순성 왕후 유씨, 네번째 왕비였던 신정완후 황보씨계집안을 고려역사의 중심으로 가져옵니다. 가계도가 좀 복잡한데 광종은 신명순성 왕후 유씨의 셋째아들입니다. 첫번째 왕비로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 대목 왕후를 제 1비로, 제 2대 혜종의 딸 경화궁 부인 임씨(태조의 두번째 왕비였던 장화 왕후 오씨의 손녀) 를 두번째 왕비로 맞아들입니다. 즉 이복 누이들과 결혼을 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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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 - 오른쪽 동상

자 이렇게 왕비들이 많을 때 누가 총애를 받는다?? 후계자를 낳아주면 총애를 받죠. 첫번째 왕비는 후계자인 제 5대 경종을 포함해 다섯명의 자식을 낳지만, 두번째 왕비는 자식을 낳는데 실패합니다.
이렇게 광조대에 이르러 고려 왕실의 근친혼은 시작되었으며 왕족의 순수 혈통을 이어가기 위함으로 여겨져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습니다.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패륜이나 다름없지만 이 당시는 크게 문제될 부분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근친혼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천추 태후의 일생이 어땠는지 하나씩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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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 역사책…..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나 봅니다. 재미있어요

아닙니다. 저보다도 더 지식이 많으신 분들이 많으십니다. 저도 많이 읽었던 부분을 부족하나마 이야기로 풀어나가는거 뿐입니다. 앞으로도 자주 읽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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