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em essay @jjy의 샘이 깊은 물 - 불려먹기

in #kr7 years ago

불려먹기 @jjy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어른들의 마음에 제법 똘똘해서 쓸 만한 아이다 싶으면 하시는 말씀이

“그놈, 조금만 가르치면 불려먹고 살겠다.”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등을 토닥여 주기도 하셨다.

불려먹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가 실력을 인정받아 여기 저기 청하는 곳이 많아 즉 부르는 곳이
많아서 명성도 얻고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처음엔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어떤 노력과 과정을 거쳐 몇 배로
많은 양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두 가지가 다 덕담의 의미를
담고 있다.

며칠 전 가까운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고기를 다 먹고
나니 종업원이 식사 주문을 받는다. 보통 밥이나 면을 먹는데 누룽지탕이
있다고 해서 그걸로 주문을 했다. 요즘엔 전기밥솥에 밥을 해서 누룽지가
귀하다. 밥이 눌어도 맛있는 누룽지는 일부러 만들어야한다.

농촌에서는 늘 품앗이를 통해 여럿이 모여 일을 했다. 따라서 밥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많은 양을 해야 했다. 무쇠 솥에 밥을 지으면 노릇노릇하게
보기에도 먹음직한 누룽지가 생긴다. 요즘도 누룽지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때는 누룽지도 훌륭한 한 주전부리였다.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아침에는 누룽지를 긁지 못하게 하셨다. 마른 누룽지를
뜯어 먹지 말고 불려먹어야 하루 종일 재수가 좋다고 하시며 숭늉을 끓여
온 가족이 함께 먹었다. 여름에도 끓인 숭늉을 한 김 나간 다음에 먹었다.
가끔 들르시는 소 장수 아저씨도 우리 집에서 푹 끓인 누룽지를 드신 날에는
장사가 잘 되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밥을 먹고 그릇을 말리면 안 되고 자기가 먹은 그릇에 물을 부어 밥알이나
음식 찌꺼기나 양념이 말라붙지 않도록 주의를 주셨다. 그렇게 하고 나면
설거지 할 때도 수월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우리 식구끼리 있을 때는 몰라도 많은 밥을 하는 날엔
누룽지가 별로 없는 숭늉이 나왔다. 나는 수저로 숭늉그릇을 저으며 누룽지를
찾았지만 허사였다. 그런 날엔 누룽지를 긁고 숭늉을 끓였다. 하루 종일 일을
거들어준 아주머니들에게 집에 가서 아이들하고 먹으라며 싸서 보내셨다.

좋아하는 누룽지를 뺏기고 심드렁해서 아침에는 재수 좋아야 하고 밤에는
재수 없어도 되는 거냐고 하면 잘 자리에 많이 먹으면 안 된다. 내일 아침에
새로 끓인 누룽지 먹으라고 달래셨다. 그리고 너도 이다음에 커서 대갓집으로
시집가면 아침에는 숭늉 끓여 식구들 따뜻이 먹이고 저녁 누룽지는 남들이
긁어가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요즘처럼 풍족한 세상에 누룽지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양보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누룽지탕을 먹으면서도 그 시절의 누룽지 맛과 정은 흉내 낼 수 없는
귀한 것이었음을새삼 확인하게 된다.

대문을 그려 주신 @cheongpyeongyull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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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글이네요~ 불려먹기의 참됨을 알게 되었어요^^
좋은밤 되세요!

자애로우신 어르신을 뵈면
말씀에서도 숭늉냄새가 나지요.
구수하고 따뜻한...
감사합니다.

무언가 그리움이 느껴지네요.

지금은 쉽게 만나지 못하는 맛이기도 하고
정이 있는 풍경이라 그렇겠지요.
감사합니다.

누룽지 구수하니 저는 밥 보다 더 좋아요

제대로 된 누룽지나
숭늉 언제 먹었는지 가물가물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릴적 시골생활이 생각나네요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시골스러움
그 추억이 있어 어려움도 이겨내게 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 할머니도 누룽지를 엄청 좋아하시는데 저는 그 진짜배기맛을 느끼긴 어렵겠내요 ㅎㅎ

지금은 전기밥솥이 대세라
무쇠솥에서 제대로 눌은 누룽지가 드물지요.
감사합니다.

누룽지 정말 좋아하는데^^

가끔 남은 밥으로 만들어 봐도
그 맛이 안나요.
그 땐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요.
감사합니다.

아주 일리있는 가르침이셨네요.

처음엔 뜻도 모르고
밤에는 왜 누룽지 안 주느냐고 떼를 썼지요.
정말 철 없던 시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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