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스를 듣는다.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6 years ago (edited)

지난 두 달 정도는 제법 불끈, 하고 집중해서 연습했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겠지만 일단 이번학기부터 시작한 대학원 수업이 큰 계기가 된 게 분명했다. 그러고보면 재즈 뮤지션이 재즈 아닌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던 게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사실 나는 재즈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아니라 학생들과의 접점을 찾기 어려운 편이 아니었는데도.

대학원에 재즈란 음악의 가치를 믿는 소수의 학생들을 모아 놓으니, 히스토리 수업은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고 와서 소개하는 게 되었다. 앙상블 수업은 학생들과 섞여 땀을 뻘뻘 흘리며 같이 연주하는 시간이 되었다. 학교 앞의 조그만 카페에 합주실 악기들을 들고 나가서는 소소한 공연을 했다. 그러다보니 나 역시 자연스럽게 열심히 연습하게 되었다.

한 학생은 나를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연주를 잘 했다. 자신이 잘 한다는 것조차 잘 모르는듯한 눈치였는데, 많은 영역에서 이미 나를 한참 앞질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 학생이 아직 관심을 갖고 있지 않거나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찾아내어 소개하고 자극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최대한 같이 많이 연주해주려 애쓰고 있다.

그렇게 두어 달 지냈으니 나도 좀 늘었나 싶었는데, 지난 한 주간 했던 연주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에게 많이 실망했다고 하는게 더 맞겠다. 뒤늦게 시작한 음악 인생이 그래도 벌써 이십 년이 되었는데, 잘 안되는 건 참 지겹게도 안된다. 요즘들어 악기가 손에 달라붙는 느낌이 들어 좀 늘었나보다 하며 기분이 좋았는데, 연습할 때와는 달리 연주에서 자꾸 무너지니 자존감에 상처가 난다.

그냥 착각일 수도 있다. 벌써 몇 년째 하고 있는 긱 중에는 평범한 스탠다드 곡들을 무난한 템포로 연주하는 게 있다. 비슷한 레파토리를 반복하고 있는 그런 공연을 할 때면 당연히 연주가 쉽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다 갑자기 젊은 연주자를 만나 도전적인 재즈를 하자면 갑자기 연주가 잘 안풀리는 기분이 들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어려운 음악을 슥슥 연주해 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날이면 재능의 크기를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고, 제법 우울한 기분이 든다.

어제도 그렇게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연주를 하고 돌아왔더니 오늘은 도통 악기를 잡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핑계로 멍하니 음악을 듣는다. 마일스는 여전히 좋다.

근데 진짜 신기한 게, 엘피로 들으면 음악이 잘 들린다. 잘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하여간 그렇다. 카세트테이프와 엘피로 음악감상을 시작하긴 했어도 본격적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해서는 씨디를 사 모았는데도 그렇다.

한 십 년 전쯤, 그야말로 중고등학생 시절의 향수로 중고 레코드 플레이어를 샀었는데, 그 이후로 그냥 가지고 있다시피 했다. 그러다 작년에 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연구실이 새로 나오고 하면서 집에 있던 오디오를 좀 들고 나오고 한두 가지는 새로 사서 구색을 갖추었다. 그때부터 틈틈이 엘피로 음악을 듣는데 이게 참 음악을 잘 전달해준다. 음악이 잘 들린다.

근데 삼사천 원 주고 레코드판을 사던 기억이 아직 생생해서 지금 열 배의 가격으로 레코드판을 사는게 쉽지는 않다. 씨디 가격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어서 더 비교가 된다. 물론 모든 물가가 오른 마당에 씨디값만 안 오른거고, 음원 서비스를 통해 공짜나 다름없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레코드판을 사는 건 소유욕이 반을 넘는 행위이다. 살때는 레코드를 사서 음악을 더 잘 듣겠다는 핑계를 대지만 막상 받아들고는 비닐도 뜯지 못하고 모셔두기 일쑤다. 종종 레코드판을 사고는 씨디나 애플뮤직으로 음악을 듣는다.

In A Silent Way 역시 지난 가을에 샀었던 것 같은데, 지난 주에야 에라이 하는 마음으로 비닐 포장을 뜯었다. 무슨 일에선지 조금 짜증이 났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난 주는 여러 연주와 학교일로 정신이 없어서 잘 듣지 못했고 오늘에야 찬찬이 들어볼 여유가 있었다.

역시나 음악이 막 들린다. 신기한 일이다. 애플뮤직으로 들을 땐 딴 짓을 했는데 말이다. 사십대 중반의 나는 아직도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하지만 마일스는 여전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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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레코드판을 사시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한 달에 몇 장만이라도 사 모으려고 노력중입니다 :) 고르는 과정이 좋고, 배송받으면 또 기분이 좋아지고 그러네요.

👍 아직도 저는 마일스 데이비스 음악이 어렵습니다. 그나저나 울엄마가 버려버린 존콜트레인 LP 은 어쩌죠...ㅠㅠ
제즈를 듣고 연주하고 싶어하는 일반인입니다만, 듣기는 좋아도 연주는 도대체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팔로와 풀봇으로 !

감사합니다 ㅎ 저도 모두들 마일스를 들어야 한다고 해도 못 듣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재즈를 공부하기 시작한 뒤에도 한참동안요 ㅠ 재즈의 감상이나 연주가 진입장벽이 높은건 부정하기 어렵겠지만, 막상 해보면 또 생각만큼 어렵지도 않은것 같은데, 잘하려면 끝도 없는 그런 기분입니다 ㅎㅎ

베이스 하세요??? 와~~~... 배우고 싶어서 안달난 1인...요즘 옛날에 치던 클래식기타를 다시 꺼내서 제즈연습을 하려고 이것저것 두둘기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스윙기타에서 딱 멈춰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네요...ㅠㅠ

요즘은 동영상 레슨도 많으니까 마음먹고 시작하시면 곧 감이 올거에요! ㅎ

홈스쿨링을 해서....한계가 있어요. 이번 기회에 어디 래슨이라도 받으러 가야겠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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