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pen 공모전] 나 혼자 산다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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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깨끗한 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끓여 마신다. 공기가 나쁠 땐 창을 열지 않아도 되도록 생수를 잔뜩 주문한다. 또 요거트 만들 우유, 고양이 모래와 사료, 고기, 야채, 치즈, 피칸을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기록하기 뭐한 것들을 제외하면 이 정도가 내 생필품이다.

공기 좋은 날은 계란을 사러 40분쯤 걸어서 백화점에 딸린 대형 마트에 간다. 나름 먼 곳이기 때문에, 아무리 장보러 가는 거라지만 예쁜 운동화를 신고 간다. 옷이나 신발은 매장서 걸쳐보고, 역시 인터넷으로 산다.

쇼핑을 하는 대신, 피부나 머리 손질을 위해 가는 곳은 없다. 고양이들 때문에 손톱에 뭘 바를 일도 없고, 화장도 안 한다. 검소해서라기보다는 끈적거리는 제품, 그리고 남의 손이 머리나 얼굴에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가끔 같은 여자가 친근감의 표시로 팔짱을 껴도 기절초풍한다. 티가 날는지는 모르겠다. 요즘은 새 친구를 굳이 만들려들지 않으니까.

원래는 서너 명쯤 초대해서 요리를 해 먹이는 것을 좋아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나 재미있는 면을 잘 찾아낸다. 타인은 내 간접 경험이니까. 그런데 요즘은 쉽게 거리를 좁혀주고 싶지 않다. 아주 가까운 사이는 원래도 싫어했고, 아예 멀리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적당한 거리를 기꺼이 유지하려는 사람은 잘 없다. 혼자 빠져들고 혼자 미워하는 사람이 더 많은지도.

혼자 살기엔 넓은 내 집엔, 비록 오래 전이지만 나름 고급 주택으로 지어진 느낌이 아직 남아있고, 거실 창은 지금 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풍경을 담고 있다. 집에서 편하게 일하는 나는 그저, 이곳에서 살고 싶어서 서울에서 온 사람이다.

고양이가 아홉 마리나 되지만, 집 안에 갈 곳이 많다보니 한꺼번에 다 보긴 힘들다. 고양이는 원래 애교가 많은 게 아니라 애정이 많다. 요는, 좋아하는 전쟁영화라도 보면서 눈물을 빼지 않으면 나는 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팔자가 늘어진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나는 항상 ‘더 베풀어도 되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게 별로 유쾌하진 않으니, 혼자를 선택하는 날이 많아졌다.

인터넷 쇼핑을 좋아한다곤 했지만, 얼마 전부터는 최소한의 생필품만 산다. 내심 기다리던 택배가 오면 반가워서 기사 아저씨에게 현관 폰으로 인사를 열심히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바빠서 집에 없는 척 하면, 안 가고 서 있는 것을 자주 본다. 길고양이를 보고 들어오는 어두컴컴한 길에 차를 대놓고 있다가 불쑥 인사를 하는 일도 있었고, 한 번은 친척이 와서 현관 폰을 받았는데 그 후에 누가 같이 사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악의는 없었겠지만, 혼자 살다보면 순간 간이 작아질 때가 있다.

그래도, 여기 온 후로 혼밥, 혼차, 혼술이 너무 즐겁다. 물론 혼자 사냐고 놀란 투로 묻는 사람도 있기는 했다. 다 큰 자식이 있는 아주머니였는데, 파고들 것 같아서 미리 철벽을 쳤다. 그 다음에 마주쳐서 예쁘다고 칭찬해주실 때를 기다렸다가, 무신경한 표정으로 “아, 네”로 응수했다. 이젠 말을 쉽게 안 건다.

사실 맘에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고, 원래 좀 감흥이 없다. 내 얼굴은 아빠 얼굴이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시간을 들여 얻은 것은 남들이 종종 고상하다고 하는 내 “취향” 뿐이다. 집도 물론 아버지 소유다.

어디 싸우러 나가서 영웅이 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문학적 소질이 있어서 예술가 행세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점이 목적인 학생들 가르치기도 싫어서, 취업하려는 시도 역시 하지 않았다. 읽는 책과 보는 영화, 듣는 음악을 제외하면, 내 삶은 저탄수화물 식단과 자가 모공 관리, 자유롭다는 만족감, 그뿐일지도 모른다. 제 아무리 깊은 영혼일지라도 얕은 생활에 젖어 살게 마련이다. 종종 하는 표현인데, 이것 역시 인간의 condition(조건이자 상태)이다.

간밤에는 익숙한 류의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어쩌면 이틀 전 밤이었을 수도 있겠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결혼을 앞두었지만 밝히고 싶지는 않은,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던 친구의 전화'. 용건도 없는 듯 하면서 끊지도 않는 이런 전화는 주로 자유를 잃기 직전의 누군가가 거는 것이다.

예전에 너무 친한 친구가 이랬을 때, 뭔가 아까워서 그런 망상도 해봤다. 영화 ‘졸업’처럼, 손을 잡고 도망가자고 말하는 거다.

그러나 도망가는 것까지만 재미있을 것이다. 내가 또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다. 그래서 그냥 장난기를 누르고 날짜는 잡았냐고 대뜸 물어본다. 당황해하는 데서 재미를 찾는다. 진짜로 깔깔 웃는다.

누군가가 자유를 잃기 전에 생각나는 게 나라는 느낌은 그리 나쁘지 않다. 뭔가 비겁한 것 같지만 나는 적당하거나 먼 거리에서 봐서 무조건 반짝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 남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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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 딸린 대형마트가 걸어서 40분 거리라면,
상당한 요지에 사는 것.. 으로 생각..

누군가가 자유를 잃기 전에
졸업 장면을 꿈꾸며 연락해 온다면,

ㅋㅋㅋ

못이기는척 한번 저질러 보는 것도... ??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각자 성향대로 판단할 문제..

ㅋㅋ사실 그런 대담한(?) 꿈은 꾸지도 못하고 전화왔을거에요. 꿈도 제가 꾸고 접는 것도 제가 합니다. ㅋㅋㅋ그걸 실제로 이행하진 않을래요. 애초에 친구였다는 건 굳이 데리고 도망갈 매력이 부족했다는 뜻이기도 하고...일단은 자유의 상징인척 살아볼려구요. ㅋㅋㅋ

사실은 신상 정보를 전혀 모르니,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이 우스운 일이기도 하겠지만,
결혼해서 한번쯤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생각..
가끔 정말 멋진 독신 여성들 보는데, 말은 못해도, 좀 안타깝다는 생각을 할때가 있어서요..

여기 까지만.. 하고.. 따로 요청없으면 더 이상 이런 말씀드리지는 못할 것 같네요..

넵, 조언은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사실 저는 공간이 가장 중요해서,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따로 공간을 두고 산다면 가능하다곤 생각하고 있어요. 무리한 조건일 수도 있지만요!

결혼해서 살아도 독립 공간에 대한 욕구는 항상 있는 것 같에요. 독립공간 조건으로도 가능한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왜 결혼하냐 라는 물음도 생길수 있겠지만.. 흔히 결혼한 여자분들로부터 듣는 이야기가, 서울에서 가장 좋은 신랑감이 춘천이나 천안 정도에 매일 출퇴근 부담스러운 거리에 안정된 직장이 있으면서, 평소에는 주말부부하다가, 급한일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도와줄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으니, 님의 욕구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고, 일반적인 것 같네요..

네, 보통은 같이 살다가 그렇게 현실 때문에 그렇게 살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란 점만 빼면요.

(따로 살거면) 그러면 왜 결혼하냐

저도 이거 때문에 ㅎㅎㅎㅎㅎㅎ

평생 결혼 안하고 사는 것 보다, 따로 살더라도 결혼해야할 이유는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만, 더 이상 나가면 nsfw 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어야 겠네요..

ㅎㅎㅎㅎㅎㅎ 넵.

와 제형 글 너무너무 잘쓴다. 웃음기 쏙 뺀 글인데 뭐가 이렇게 재밌는건지 난 알수도 없다. 근데 아무튼 재밌게 잘 읽었어. 문학시간말고 이런글도 많이 써줘.

와 제형이라고 하니까 마치 동생과 형을 다 아우르는 느낌이네 ㅋㅋ 다른 댓글에도 썼듯이 일상일기도 쓸라고 대문까지 받아놓고는...
가즈아 문제 해결되기 전까진 좀 눈치 보면서 가즈아 아닌 일기랑 영어 위주로 써야겠어.

문학시간도 그냥 가즈아태그 없이 반말체로 쓰면 안돼? 내 블로그 내맘대로 반말쓰겠다는데!!! 뭐어때!!!

ㅇㅇ그러게 말이야. 내일부터 가즈아 태그는 살포시 치워놓고 쓰겠어. ㅠㅠ슬프다

응 뭐 꼭 가즈아만 반말을 써야하는건 아니니까

근데 시타형 일기 썼으면 좋았을걸 ㅋㅋㅋ

다음에 제형꺼 참고해서 비슷하게 써야겠다ㅋㅋ
난 모방이 좋으니까

보통 번호도 많이 붙이던데 내 것도 은근히 번호 붙여도 되는 단편적인 내용들인데...그냥 안 붙임 ㅋㅋ

아하...쏭가형 스타일 말하는거지? 제형꺼는 안붙이는게 낫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인데!!

쏭가형 말고도 많이들 쓰더라고. 오죽하면 공모전도 번호일기라고... ㅎㅎ

[kr-gazua] 제형 ㅋㅋㅋ 나도 왠지 가즈아 말투로 써야 될것 같았는데 그렇게 느낀게 나만은 아니었구나.

워낙 가즈아에서만 보다보니 다들 그게 익숙한듯ㅎ

ㅋㅋㅋ그래도 이 형은 댓글마다 자체 가즈아 태그 달고 쓰는...ㅋㅋㅋ

크크크. 재미지내요. 어둠속의 재미, 어둠속의 유희(遊喜). 원래 태어날때도 혼자오고 갈때도 혼자가니까 그 중간에 이곳 저곳 풍경 잘 보다가면 되긴하지요. 관계는 때론 구차느니까요. 아무튼 고양이들과 사시니까 고양이의 습성이 되신것도 같네요.

유유상종(類類相從) You - You follow You

ps. 근데요, 아플때는 금새 달려올 가족이건 누군가는 필요합니다. 아직은 젊으니까 아무걱정이 없겠지만요.

사실 과잉보호 받고 자라서 진짜 진짜 혼자일 일은 없을거에요. 제가 편한만큼의 생활을 유지할 뿐...제 세대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네요. 나중에 부모님이 안 계실 때도...저랑 똑같은 생각을 가진, 또는 너무나 흔해진 가정해산(?)의 과정을 거칠 수도 있을 친구들과 근처에서 지내자고 얘기를 가끔 하죠.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상당히 정제된 글이라고 느껴져, 어디 출품하려고 하나 했더니, 진짜 출품작이네요. 제가 잘 모르지만, 독서량이 매우 많은 분으로 느껴집니다.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엇 그러고 보니 good21님 일기 안 내셨었군요.

감사합니다. ㅎㅎ

팬으로서 이번 일기는 완전 득템인데요.
음~~ 근데 너무 티내면 아~~네 ~~.가 될까봐
참습니다. ㅋ 혼자서 마음대로 팬이라고 하고 관섭은 ~~
재밌있게 읽었고 좀 더 알게 되서 완전 좋습니다.
또 들를께요~

일상 일기라는게 좀 그런가봐요. ㅎㅎ 감사합니다.

아~~네..
ㅋ^^ 멋짐.

이렇게 기름기 쏘옥- 뺀 일기! 너무 담백하게 잘 읽었습니다. 읽는 내내 눈이 즐거웠네요. jamie님 성격 확실하게 알 것 같습니다ㅎㅎ

후후 감사합니다. ㅋㅋ

'적당한 거리'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글입니다. 저는 '적절한 거리'를 추구하곤 하는데, 이 글에서의 적당한 거리는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제가 생각하는 적절한 거리보다는 조금 더 먼 느낌의 거리입니다. 영향을 주고 '받기에는' 조금 더 먼. 아마 그 것 또한 각자 생각하는 적당함이자 적절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적당...이 좀 더 자의적인 기준에 따르는 것일 것 같기는 하네요. ㅎㅎㅎ

글을 읽으니 이것저것 궁금한 점이 생기지만, “아, 네.”라는 답변을 들을 거 같아서 궁금함으로 남겨 둬야겠네요. ㅎㅎ 텔레비전 보는 것 같아요. 재밌게 잘 읽었어요. :-)

ㅋㅋ사실 온갖 속에 있는 생각 얘기도 많이 썼던 것 같은데 이런 일상 일기가 더 털어놓기 싫은(?) 것 같더라구요. 안그래도 종종 일상일기 쓰려고 @kiwifi님의 솜씨로 대문까지 만들어놨긴 한데...ㅋㅋ 이번 아니었으면 언제 시작했을지 모르겠네요.

내가 또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다. 요부분 맛깔 남. ㅋㅋㅋ. 납치를 했지만, 방치하고 싶은 마음. ㅋㅋㅋ. 제이미 스타일의 멋이 남. ㅋㅋㅋ

방치가 아니라 다시 혼자 도망갈거 같은데요 ㅋㅋㅋ

아앗 역으로 도망치다니 ㅋㅋㅋ

소설은 아니지만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으면서 왜 그런지 모르게 글이 잘 읽혔어요. 이게 대작가의 필력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죠.
제이미님의 일상적인 글, 생각, 단편소설을 읽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아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달까...^^

이런...감사합니다. ㅋㅋ 사실 읽어보진 못했지만 굉장한 칭찬인 것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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