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시 아닌 시를 선물한 기억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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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지 못하겠거든 소설을, 소설을 쓰지 못하겠거든 평론가를 하라는 말이 있다. 주로 평론가 입장에서 자조적으로 할 만한 말이긴 한데, 나는 꽤 어릴 때부터 이 말을 달고 살았다. 분석하기를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감성적인 글의 가치는 알지만 차마 직접 쓰지는 못하는 성격이 빚어낸 결과였다고나.

그러다가 언젠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한 은사님, 내 지도 교수님께 직접 만든 액자를 선물했다. 스승의 날에 학생들이 드리는 선물을 전부 돌려보내시던 분이었지만, 연구실을 찾으면 책장에 어김없이 내가 드린 액자가 올려져 있었다.

액자라고는 하지만, 물론 사진을 넣어드린 것은 아니다. 그건 좀...

내가 좋아하는 글귀를 넣어서 드렸다. 시에 대한 것이지만 시는 아닌, 시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문학을 하고는 싶지만 눈만 높아져서 직접 하지는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울릴만한 글이었다.

시인 릴케의 말테의 수기...나는 그 책을 영문으로 읽었는데, "시를 쓰려면"이라는 제목으로 묶을 수도 있는 부분이 가장 와닿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원문도 참고해서 옮겨서, 액자에 넣었다.

릴케는 그 글에서, 시를 쓰려면 필요한 조건들을 나열한다. 펜을 쉽게 들 생각을 접게 만드는 내용이다.

그러나 시를 쓰려면 필요한 삶의 조건들을 더 열심히 채우라는 뜻으로 다가오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열심히 쓰라는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내 마음에 드는 글이기도 했지만 우리 교수님도 나처럼 문학을 좋아하시지만서도, 아니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감히 직접 쓰려는 생각을 못 하시는 것 같아 그 글을 골랐다.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그 글을 읽으실 것 같았다.

릴케의 그 글이 담긴 액자는,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시는 우리 교수님께 내가 드린 유일한 선물이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젊은 시절에 쓰는 시는 별로 의미가 없다.
평생, 가급적 기나긴 생을 보내며, 달콤함 그리고 빛을 모은다면 아마도, 인생의 끝자락에서 괜찮은 열 줄의 시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시라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듯 감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은 일찍이 생겨날 수도 있다.)
시는 경험이다.
시 한 줄을 쓰기 위해, 시인은 많은 도시들, 사람들, 사물들을 보아야 한다.
그는 동물에 대해 배우고, 공중에 나는 새를, 아침에 피는 자그마한 꽃들의 움직임을 느껴야만 한다.
알지 못하는 곳의 길들을, 예기치 못한 만남들을, 오랫동안 예견해온 이별들을 회자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유년 시절의 나날들, 기쁨을 받고서도 (다른 누군가를 위한 기쁨으로 여겨졌기에)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픔을 끼쳐드릴 수밖에 없었던 부모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몇 가지 심오하고 중대한 변화와 함께 시작된 어린 나날의 질병들, 홀로 갇힌 조용한 방에서 보낸 나날들, 바닷가에서의 아침, 바다 그 자체, 여러 바다들, 급하게 떠나서 모든 별들과 함께 날던 여행의 밤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같이 다른, 수많은 사랑의 밤에 대한 기억,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의 비명과 가볍고 새하얗게 잠을 자며 다시 회복되어 가는 여인에 대한 추억이 있어야 한다.
죽어가는 이의 곁을 지켜도 보고, 열린 창으로 소음이 들어오는 방에서 죽은 이의 옆을 지켜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추억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이 쌓였을 때, 잊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 추억들이 되살아나기까지 기다릴 크나큰 인내심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추억 자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추억이 우리 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어, 그 이름도 상실하고 더 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될 수 없이 될 때야 비로소 찾아오는 어느 드문 순간에, 시 한 구절의 첫마디가 그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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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시 쓰기란 때로 고통스런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통제하거나 피할 겨를도 없이, 마치 경련이나 반사운동처럼 드문 순간에 불현듯 찾아드는 추억과 대면해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시에 대한 공감compassion은 그러한 고통passion을 함께하는con 것일 테지요. 제이미님의 글을 보며 불현듯 든 생각이었습니다...

엇, 리스팀 해주셨네요. 전 글이 아직 몇 개 없어서 리스팀은 아직 생각도 못 하고 있는데...감사드려요!

창작자의 고통을 같이 느끼는 것이 독자라고 생각하면 상당히 기분이 좋은(?) 일이네요.

쓰신 글의 갯수랑 리스팀이 무슨 상관일까요?^^ 생각을 좀더 이어가자면 창작의 고통까지 함께하지 않은 독자란 어쩌면 진정한 '독자', '수용자'는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소비자일 수는 있어도 말이죠... 수많은 팬들에 둘러싸여 외로움을 느끼는 뮤지션들도 어쩌면 같은 이유 때문이겠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들의 창작물과 이미지만을 끝없이 소비하고 버리는 팬들이 오히려 착취자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개인적으로 스팀잇에서 느낀 것이긴 한데...댓글을 보다가 어떤 사람이 궁금해서 들어가 보았을 때 스크롤을 내려도 리스팀 글만 계속 보이면 좀 궁금증을 풀지 못한 느낌이랄까....그래서 은연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외엔 대역폭이 적은 뉴비는 리스팀은 자제하라는 글을 보기도 했구요. 물론 팔로워 수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 때 리스팀이 의미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래서 꼭 글 갯수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인해...좀 더 제 공간이다 싶어져야 할 것 같아요 ㅎㅎ

(개인적으로 스팀잇에서는 태그가 있기 때문에 주제별 카테고리는 필요를 꼭 못 느끼는데 , 블로그에서 본인 글과 리스팀한 글을 분류해놓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창작자가 팬에게 항상 감사만을 하지는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오늘날의 창작자란 전부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창작물 뿐 아니라 온갖 면들까지 다 소비되는 입장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서로를 바라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미디어가 관객을 많이 만들어주지만 그 과정에서 뭔가 상실되는 것 같네요.

그렇군요... 저는 좀더 리스팀을 적극적으로 하는 편입니다. 리스팀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글이라 해도 피드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거든요. 그래서 보팅보다 더 중요한 게 리스팀인 거 같다는 생각도... 그리고 생각에 따라서는 어떤 사람이 어떤 글을 리스팀하는지도 그 사람을 표현해주는 훌륭한 수단이 되는 거 같아요. ^^

네, 맞아요. 막상 팔로우한 분이 여러 글들을 리스팀 해주시는걸 보면 참 유용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자체의 가치는 절감하고 있는데..단지 지금 저는 피드를 봐주시는 분도 적지만 제가 보는 피드도 거의 멈춤 상태가 많아서...ㅎㅎ 좀더 발을 넓힌 후엔 꼭 할 생각입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셨을지 안 하셨을지 모르지만 무척 기뻐하셨을 것 같네요. 책장에 올려둔 것으로 이미 충분히 표현하신 것 같지만...

말씀은 따로 없으셨지만 원래도 무언가를 하는 것보단 하지 않음으로 표현하는 분이셨죠. 회사 상사처럼 발표문을 집어 던지거나 다시 해오라고 할 때가 더 많은 분이었는데 전 안 당했거든요...

여긴 아직 일요일 아침인데,,,님의 글과 인용글이 잔잔히 다가옵니다. 저도 릴케의 명언으로 댓글 남깁니다.
"경쟁심이나 허영심이 없이 다만 고요하고 조용한 감정의 교류만이 있는 대화는 가장 행복한 대화이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일요일 아침의 바삭한 느낌 참 좋죠. 고요할 수도 분주할 수도 있겠으나...남은 하루가 아름답길 바랍니다. 감사해요!

오늘 생각해 주신 덕분인지 정말 아름 다운 하루 보냈습니다. ^^ 친구들과 친구들의 애기들 속에서 북적북적대다가 한가하게 동네 한바퀴 산책하고 이제 자러갑니다 고맙습니다 ^^ 우리 새로운 이번 주도 화이팅해요!!

내가 이런 대화 해본 적이 있었는지..가족과의 여행에서도 하지 못한 거 같네요..나는 불쌍한 1인입니다.
-불쑥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동감이 가는 명언인라..-

좋은 글귀와 더불어 이쁜 추억을 가지고 계시네요. 팔로했어요.

고맙습니다. 저도 방문할게요...자주 뵈어요!

릴케의 말테의 수기, 제 이십대때 글쓰기에 큰 영향을 줬던 책입니다. 여기서 보다니 반갑네요^^ 전 말테의 수기에서 릴케가 한 말, '나는 보는 법을 배워야겠다.' 이 문장을 이십대 내내 가슴에 품고 지냈지요ㅎ

"시는 경험이다."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감명깊은 시라고 해도 읽는 사람이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좀..시는 쓰는 작가도 읽는 독자도 쉽지 않은것 같습니다.

시인의 경험과 조금이라도 맞닿아 있는 것을 경험하고 속에 품고 있는 독자가 더 이해하기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 jameineinthedark 님 제가 sevenday bnw challenge 두번째로 @ jameineinthedark 님을 지목했어요~

앗, 네 알겠습니다. 뉴비 챌린지인 것 같던데 저도 뉴비 위주로 지목할게요. 프사를 귀여운 늑대?로 바꾸셨네요!

그림 그리시는 작가분 중에, 60이 넘어서야 첫 개인전을 하시는 분을 보았어요. 젊은 작가들이 넘쳐나는 요즘, 참으로 보기 드문 느낌이었어요.
몇십년을 작업 하셨는데 왜 그러셨느냐 여쭈었더니, 60도 안되어 어떻게 감히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느냐, 그러시더라고요.

물론 모든 작가들이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성공적인 전시 한두번으로 유명 작가가 된 것처럼 활동하다가 사라지는 일부 신진 작가들 중에 이런 분의 자세를 한번 더 바라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네, 나이가 지표일 수는 없겠지만 경험의 무게를 가늠하는 한 가지 방법은 될 수 있으니까요...그렇다고 무조건 표현하는데 있어 주눅들 필요는 없을 것이고, 그만큼 많은 것을 느끼고 다시 꺼내어보는 순간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해가는 요즘이라서
느리게 살아가는 가치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글이었어요^^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작가나 시인,소설가가 될 수 있죠. 단 ,무대가 다르다는 것이 요점이죠. 동네 축구도 축구고 EPL 무대도 축구라고 할 수 있겠죠. 꼭 프로일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자기 스스로 시인,혹은 소설가,작가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은 조심해야 할 요소죠. 타인이 그렇게 불러 준다면 감사하게 받아 들일 뿐입니다. 마지막 문장이 특별히 인상깊게 각인이 됩니다."추억이 우리 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어, 그 이름도 상실하고 더 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될 수 없이 될 때야 비로소 찾아오는 어느 드문 순간에, 시 한 구절의 첫마디가 그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멋진 포스팅 감사합니다.

네, 특히 릴케의 시대를 감안하면 직업적 자격을 이야기한 것은 아닐 것이고...결국 저걸 쓰고 한 10~15년 남짓 더 살다가 죽었으니 여러 가지 복합적이고 자조적인 마음이 아니었나 생각되네요. 아직 자신의 베스트는 나오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을법도...더불어 시라는 것이 산문이나 해설에 대해 항상 가져온 우월감 등등 참 여러 가지 상념이 담겨 있었을 것 같네요(그것도 굳이 소설로 시도한 말테의 수기에서...). 자신의 최상의 시가 탄생하는 순간에 꼭 글로 써내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구요.
저도 그 마지막 구절을 참 좋아합니다!

그림도 글도 간결할 수록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스팀잇에서 아직 많이 돌아다녀 보질 못해서...쪼야님 그림을 오늘 조금 보았는데요, 너무 귀여워요. 그리고 배우 오드리 헵번이 어릴 때 그린 그림들을 봤을 때의 느낌이 생각나기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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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드리햅번이 어릴때 저보다 더 잘그렸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ㅎㅎㅎㅎㅎ 아니에요 일단 허벅지가 없 홀로 잘 노는 소녀의 느낌이 좋았어요. ㅎ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역시 허벅지 실한 소녀소녀 느낌이 최고죠! ㅋㅋㅋㅋㅋ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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