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아니었겠지만 아마도 처음이었을 그 기네스

in #kr6 years ago

지나온 회사 중에서 인사권을 가지고 흔들 수 있었던 곳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뭔가 좀 창피하게 느껴지는 경력이라 그곳에서의 직급이나 활동 등은 내 이력서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근성 있고 쓸만한 사람인가? 하고 뽑았다가 낭패를 봤던 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언제나 그렇듯 필요한 인재人才는 모자라고, 인재人祸는 넘쳐나기 때문에...)


이력서

키는 188인지 뭔지... 같이 서 있으면 그냥 쳐다보기 불편했던 그 친구의 이력서에는
두 차례에 걸친 해외 인턴십 경험과 아마추어 복싱 준우승 타이틀이 있었다.

[해외 인턴십 2회]
해외 인턴십 의 경우는.... 가서 놀고만 왔을 확률이 90% 이상이라 별로 믿지는 않았다.
그래도 개발자 중에는 영어 포비아가 많기 때문에 그것만 아니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기업도 아니고, 중소기업도 아닌, '영세한 기업'(을 포장해서 벤처나 스타트업으로 부르자)에 이력서를 제출하는 사람 중에서 영어 가능자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애초에 영어를 엄청 잘한다면 개발자를 할 필요가 없고, 영어 잘하는 개발자 또한 한국에 있을 이유가 없다.

[복싱]
준우승이라니... 복싱을 그렇게 오래 할 정도면 끈기도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개발 일이란 것이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이력서 내용 자체로는 괜찮아 보였다.
(뭔들 안 그렇겠냐만...)

복싱은커녕 그때까지 헬스장 한번 제대로 다녀본 적 없는 주제에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기억

생각해보면 그냥 키 큰 직원을 한번 부려보고 싶어서 뽑았던가? 하는 순간도 많았다.
나보다 머리 하나 반(?) 정도 큰 남자 어른이 쫄쫄거리고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며 어떤 우월감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병아리 같았다.

키가 180이 넘는데도 그냥 오늘 저녁이든 내일 아침이든 언제고 콱 죽어버릴지 모르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약해빠진 친구였다.

똑같은 내용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알려주는 중에도 일 처리를 못 하기에 그 친구가 설명을 들으며 열심히 적었던 노트를 대신 펼쳐주며 고함을 지르기도 했었다.

"여기 적힌 메모들은 그냥 나한테 잘 보이려고 시늉만 했던 거냐?" 라든가
"한국말로 친절하게 설명해줘도 알아듣지 못하는 놈이 해외 취업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서 뻘짓만 하고 있으면 되겠냐! 영어로 설명하면 네가 이해하겠냐?"고 했던 거 같기도 하다.

영어권 국가에 개발자로 취업하고 싶다던 그가 Game of Thrones 영문판 책을 출퇴근 길에 들고 다니는 것을 봤었기 때문에 더 화가 치밀어 올라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그 드라마를 최근까지 안 봤던 것일지도..)

아마추어 복싱 준우승자(feat. 180cm 넘음)는 눈물을 찔찔 짜며 죄송합니다만 연신 내뱉었다.

'이게 눈물을 보일 만한 일인가?'하고 내 머릿속에서는 수천 줄의 에러 메시지가 쓰이고 있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직장에서의 모습과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 힘들었을 수도 있지...
어쩌면 우는 시늉을 하는 중에 당황한 내 모습을 보고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지도.. ㅎ
아니면 진짜 서럽고 답답해서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랬던 그 친구가 첫 월급을 받자마자 나에게 술을 사겠다고 했다.
술자리를 싫어해서 회사 회식도 다 없앴다니까(그 당시 나의 권력이란-ㅅ-) 얘는 그게 농담인 줄 알았으려나?

기네스?

술 싫어하는 직장 상사를 고집스럽게 끌고 간 곳은 또 분수에도 맞지 않는 Bar였다.

거기에서 당당하게 기네스를 시키던 그 친구를 보며
'지금 얘 월급으로 이걸 몇 병이나 살 수 있더라?', '해외에서 술 마시는 것만 배웠군...', '조만간 그만 나오라고 해야겠구먼...'
요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내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처량하고 안타깝다.-_-

두 병 정도 마시다가 역시이건 아닌 거 같아 여기 술값으로는 부모님 속옷이나 사드리라고 하고 내 돈으로 계산하고 나왔었다.
@afinesword님 정도로 술에 애정이나 지식이 있었다면 맛나게 마셨을 텐데 병째로 마신 기네스는 비싸기만 하고 맛도 없었다.
"나 좀 잘 봐주십시오." 하고 술을 사줘도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그 친구가 배웠길 바란다.

결국, 그 친구는 3달을 못 버티고 스스로 회사를 뛰쳐나갔다.
어찌 나갔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시 수많은 이력서를 검토하고 면접을 봐야 했기에 귀찮음이 있었을 뿐 별다른 감상은 없었던 거 같다.

지금 마시는 기네스

[술] 맥주가 사람을 만든다 https://steemit.com/kr/@afinesword/axqnt

‘300만개의 거품이 만드는 천상의 부드러움’이라고 흑맥주 기네스 광고에 쓰여 있다. 진짜 300만개인지 내 알 도리가 없으나, 천상의 부드러움은 익히 마셔 잘 안다.

칼님(@afinesword) 글을 읽고 나니 기네스가 맛있다.
종종 사다가 마실 거 같다.


덧, 김보통 에세이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에서 읽었던 '동메달의 비밀' 내용을 생각해보니, 그의 아마추어 복싱 준우승 타이틀도 참가자가 2~3명뿐이 없어서 가능했을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하다.

덧2, 4~5년 후에 몇다리 건너 들은 소식으로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외 어딘가에 취업을 했다고 한다. 이제는 울지 않기를.... -ㅅ-;;

덧3, 여행은 잘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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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덩치로 눈물 흘릴거 생각하니 ㅠ-ㅠ
아흑ㅠㅠ
이제는 울지 않기를. ㅋㅋㅋㅋㅋㅋㅋㅋ

러브흠님 어서오셔요. ㅋㅋㅋ

인사관리가 힘들다는 점을 보여주는 포스팅이네요. 해외에서 바라는 인재상과 한국에서 바라는 인재상이 다른걸가요? 해외 인재상이 한국에 오면 적응이 어려운걸가요?

모르죠...

바에서 기네스를 시키며 자기도 이렇게 할줄 아는 사람이라고 어필하고 싶었던 걸까요?ㅎ 저도 기네스는 아직 그다지 맛있는지는 모르겠더라구요~ 덧1에 동메달의 비밀 내용을 보고 아~하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ㅎㅎ

기네스의 맛을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저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요. ㅎ

지금은 맛나게 마십니다. ㅋ

크..글보다가 좀 짜증났어요..너무 꼰대같아요 솔직히..

댓글을 두서없이 다시네요.

그리고 저 완전 꼰대 맞습니다.
'같아요'라뇨.

인사가 만사라는데 잘할 줄 알고 뽑아도 예상 외이기도 해서 어렵네요. 제게 인사권이 주어진다면 거절하고 싶을 거 같아요.

음... 어려운 문제죠. ㅎㅎ
신입의 경우 완전히 사람에 투자하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직접 뽑으면 대처가 가능한데... 임원진이 어디서 막 주워오면 답도 없어요.ㅎㅎ

여행 잘 다녀오셧군요.
누군가의 인사적 조치 및 권한이 있다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더라고요.

@jaytop님 안녕하세요.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거겠죠.

예전에, 친구들과 장사할때.. 사람 구하는게 일이었습니다. 정말 면접도 많이보고, 이력서도 많이 보고..했는데, 번지르르한 이력서보다, 몇줄 안되는 이력서의 사람이 더 성실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인사에 정답은 없는것 같습니다. 면접때, 최대한 잘 뽑는수밖에는요. ㅎㅎ

@zzings님 안녕하세요.
제 경험상 스펙 보다는 이력서에 보여준 성의(?) 정도가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뭐.. 저야 이제 그런 일과는 관련이 없어졌지만 말입니다. (백수만세!)

현실성은 좀 없지만..
대기업처럼 트레이닝 과정이나 멘토링 프로그램이 없는 영세(ㅎㅎ)한 회사의 경우
빠르게 뽑아서 빠르게 자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저는 관리자의 입장 보다는 신입 사원의 마음이 가깝게 느껴지네요- 분명히 답답한데 뭔가 불쌍한 건 왜일까요..ㅠㅠ 이래놓고 제가 상사였으면 더 화를 냈을 지도...

ㅎㅎ 그럴 수도 있죠.

왜 뽑아놓고보면 저런 사람들이 많은걸까요...

아마추어 복싱의 경우에는 혼자 출전해서 금메달 따는 경우도 봤습니다만...

음 ㅋㅋ

맛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준우승은 2명 참가에 준우승이었을까요...

글세요. ㅎㅎ
개인사는 잘 안 물어보는 편이라..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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