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에 관해 물어야 할 질문들 (1): 은행 예금은 화폐인가?

in #kr8 years ago (edited)

앞 게시물 말미에 더 적으려다가 포기한 내용에 대해 밥 먹으면서 몇 글자 더 적어 봅니다. 글쎄요. “화폐에 관해 물어야 할 질문들”이라는 시리즈가 될 만할지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 “은행 예금은 화폐인가?”

우리는 흔히 은행에 넣어 둔 돈을 내 돈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만 내 돈일 뿐, 엄밀하게는 내 돈이 아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기고 받은 통장(및 그것의 인터넷 버전인 인터넷뱅킹 계좌)은 거기 적힌 금액의 돈을 예금주인 우리가 요구할 때 돌려주겠다고 약속한 (은행 입장에서는) 채무 증서, (예금주 입장에서는) 채권 증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은행에 넣어 둔 돈은 내 돈이 아니라 은행 돈이고, 예금주인 나는 그 돈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채권 증서’로 ‘계좌 정보’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첫 번째 질문, “은행 예금은 화폐인가?”에 대한 엄밀한 대답은 “아니다. 은행 예금은 채권/채무 증서다”가 되겠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해, 우리가 은행에 돈을 넣는 행위는 집에 있는 금고에 돈을 넣는 행위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은행에 빌려 주는 대출이다. 그 대출의 대가로 ‘예금 이자’를 받는다.

그러면 위 질문을 바꿔보자.

“은행에 넣어 둔 내 돈은 ‘법화’인가?”

오잉? 질문이 좀 야릇해지는 걸?

아니다. 야릇할 것 없다. 답은 똑같다. 그 답은,

“은행에 넣어 둔 돈─일반화해 말해서 은행 예금─은 법화가 아니다. 그것은 예금주가 요구할 때 법화로 지급해 주겠다는 약속, 즉 채권/채무 증서다.”

가 되겠다.

어? 이상한데? 계좌 이체로 내 돈을 송금해서 지불하는 것은 법화를 지불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법화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금주 A의 채권증서 상에 있는 숫자를 예금주 B의 채권증서 상에 있는 숫자로 옮기는 것이다. 즉, 법화가 A에서 B로 이동하는 게 아니다. 신용상의 한 숫자에서 지불액만큼 뺄셈하고, 신용상의 다른 숫자에 그 금액만큼 덧셈으로 보태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케이? [여기까지 질문 있으신 분들, 질문해 주시면 환영합니다!!]

정리해 두자.

은행 예금은 화폐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화폐로 간주하는 채권/채무 증서다.

용어를 바꿔, 반복하자.

은행 예금은 법화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법화로 간주하는 채권/채무 증서다.

오케이? [여기까지 또 질문 있으신 분들, 환영합니다. 예컨대 “‘간주한다’는 게 무슨 뜻이죠?” 도 환영합니다.]


또 하나의 관련된 질문: “내 급여계좌로 들어오는 돈은 화폐인가?” 달리 물어도 마찬가지. “내 급여계좌로 들어오는 돈은 법화인가?”

어떻게 생각들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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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이 화폐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니
왠지 그럴듯 하기도 하네요.
조금 충격적이기도 하고.

지금 님께선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처럼, '화폐 매트릭스'의 경계를 마침내 벗어날 수 있는 질문의 경계에 서 계십니다.^^ 아주 헷갈리죠. ㅎㅎ

재미있는 내용인데
결론까지 내려주시면 더 좋을듯 합니다^~^;;

어떤 질문들을 찾으면 좋을지, 답 찾기에 적합한 개념들의 순서는 무엇일지 등을 생각 중입니다. ^^

그타면 거래될 때 소통되는거는 법화, 합법적 도둑넘들에게짱팍아 둔건 채무증서, 이렇게 이해하면 되나요? (도둑넘들=은행)

넓게 보아 '너에게 빚졌다고 인정하마. 여기 우리가 약속한 이 조건대로 네게 빚진 것을 다시 돌려줄게' 하는 약속이 채권/채무 증서이니, 은행 예금도 은행 업무를 규제하는 법규의 조건에 따라 예금주의 돈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는 채권/채무 증서의 일종이지요. 채권/채무 관계를 생성시키는 모든 약속이 불법은 아니니, '은행 = 도둑넘들'은 너무 많이 나가 버린 비약이십니다. ^^

쥐꼬리예금이자와 덩어리 대출이자를 비꼰거지요. 혹시? 은행과 관련? 꾸벅~

하하. 은행과는 예금통장이 딱 하나, 카드가 딱 하나 있으니 은행과 직접적인 거래 관계에 있습니다. ㅋㅋ

PS. 제가 너무 간단히 언급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위 제 원글에 언급한 정도의 개념과 추론만을 토대로 그와 같은 (대출금리>예금금리의 커다란 차이에 대한) 유추나 판단까지 함축하는 것으로 읽힐까 봐서 남겨둔 것에 불과합니다. :-)

글을 읽으니 충격인데요...
은행예금액도 없지만, 빼내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드네용
너무 무지해서 그런거겠죵? ^^
팔로 보팅하고 갑니다.

충격을 받으셨다니 걱정이 됩니다. 저에게는 그 말씀이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은행계좌에서 돈을 빼내야겠다는 생각은 기우십니다. 기존의 금융 시스템은 결점이 많아도 상당히 탄탄합니다. 갖가지 다양한 종류의 채권/채무 증서들이 이미 화폐로, 또 법화로 간주되는 채로 꽤나 안정적으로 돌아갑니다. 다만, 그 정체와 작동 방식을 정확히 꿰뚤어 보기가 매우 어려울 만큼 정교한 매트릭스로 짜여 있습니다.

그 매트릭스 밖으로 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할 만큼 '탄탄한' 매트릭스이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와핫. 재미있는 질문을 적으셨네요.^^
저는 이 세상에서 화폐를 주고받는 행위가, 서로 빚을 떠넘기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예를들어서 내가 노동해서 돈을 벌면, 나는 나의 빚을 내게 돈을 지불한 사람에게 떠넘기는 거죠. 그 사람은 돈을 벌어 또 그걸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고...애초에 화폐의 본질은 '빚'이니까요.

어떤 사물에 대해 여러 가지의 정의를 동시에 머릿속에 담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그런데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구요).

화폐의 경우가 그런 것 같습니다. 빚을 화폐의 본질로 볼 경우, 발생론적인 심층의 정의가 되겠고, 역사상 빚을 표시한 막대기를 화폐로 사용했고 세금으로도 지불했으니 켜켜이 쌓인 시간에 덮혀버린 역사의 흔적이기도 하겠습니다. 그 밖에 여러 방식의 정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발생이나 본체를 따지지 않는 기능적 정의 같습니다(사람들이, 특히 경제학자가, 이걸 알면 다 끝나는 것인 양 별 생각 없이들 읊어대는 가치 척도, 교환 수단/지불 수단, 가치 저장이 기능적 정의라고 봅니다).

이 여러 가지 정의를 동시에 말하면, 사고의 회로 스위칠 꺼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

저는 (이 복수의 정의가 필요한 상황과 약간 관련하여) '빚'이라기보다는 '빚의 표시'라고 생각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화폐와 신용을 구분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냐는 문제도 여러 가지 정의가 필요해지는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빚은 그 자체로 신용이니, 화폐를 신용으로 간주하면 표층의 현상 세계애 등장하는 신용은 '신용의 신용', '빚의 밪'이 되는 것인가? 이 정도의 질문만 떠올려도 대단하다고 봅니다만, 대부분 거기서 또 사고 회로의 스위치는 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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