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가족, 자연… 그림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써버린 화가 ‘장욱진’

in #kr4 years ago

장욱진 30주기 기념전
<집, 가족, 자연 그리고 장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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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 의 아이, 1975, 캔버스에 유채, 14×25.8cm

“집도 작품이다.” 화가 장욱진이 즐겨 했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집을 평생 화폭에 담았다. 장욱진에게 ‘집’은 가족과 생활하는 안식처이자 예술적 영혼이 깃든 아틀리에였다. 그는 화백이나 교수보다는 화가畵家라는 말을 가장 좋아했다. 집 가家자가 들어간다는 이유에서였다. 생전에는 한적한 시골의 오래된 한옥과 정자를 손수 고쳐 아틀리에로 사용하곤 했다. 천성적으로 서울을 싫어 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을 싫어했다. 그래서 서울을 버리고 한강이 문턱으로 흐르는 덕소에 화실을 잡았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곳의 비와 바람과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지은 1963년 양주 덕소 화실, 1975년 낡은 한옥을 개조한 명륜동 화실, 1980년 농가를 수리한 충북 수안보 화실, 1986년 초가삼간을 개조한 용인 마북동 화실… 그의 집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며 그림의 본질에 다가서고자 했던 화가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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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951, 종이에 유채, 14.8×10.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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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 1957, 캔버스에 유채, 45.5×27.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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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도, 1972, 캔버스에 유채, 7.5×14.8cm

종로구 삼청동 현대화랑에서 장욱진 30주기를 기념하는 전시를 연다. <집, 가족, 자연 그리고 장욱진>이라는 전시 제목처럼 그의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소재에 주목한다. 평생의 작업에서 이토록 주제가 크게 변하지 않은 한국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그 집약적인 주제에 관한 연구가 이 정도로 방대한 경우는 더욱이 많지 않다. 집, 가족, 자연은 그의 그림에 늘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대표적인 모티프다. 장욱진이 추구한 이상세계에 가깝다. 초기작부터 말년의 작품까지, 그림 곳곳에 따로 또 같이 등장하는 세 요소에서는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 산업화 등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한 예술가의 시대정신이 포착된다.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
<샘터>, 197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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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1957, 캔버스에 유채, 40.9×31.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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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아 이, 1973, 캔버스에 유채, 27.3×2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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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1973, 캔버스에 유채, 17.9×25.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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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 캔버스에 유채, 32×23.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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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캔버스에 유채, 30.5×22.8cm

전시장에서는 장욱진이 머물렀던 집의 모습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살펴볼 수 있다. 1969년 작 <앞뜰>은 아내를 위해 덕소에 지은 한옥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슬래브 지붕으로 된 열 평 남짓의 시멘트 집. 가족과 떨어져 작업에 매진했던 작가는 주말마다 화실을 방문하는 아내를 위해 한 칸짜리 한옥을 더 지었다. 1976년 출간한 ‘강가의 아틀리에’는 바로 이 덕소 화실을 일컫는다.

장욱진은 12년간 머물렀던 덕소가 한적함을 잃어가자 1975년 명륜동에 새로운 화실을 차렸다. 양옥에 붙어있던 낡은 한옥을 마련한 뒤 한 평 남짓의 부엌을 작업실로 개조했다. 마당에는 양옥으로 스며드는 물기를 잡기 위해 연못을 만들고 그곳에 이엉을 얹은 정자를 세웠다. 그의 친구였던 국어학자 이희승은 정자를 보고 ‘관어당觀魚堂’이라 이름 붙였다. 그래서인지 1970년대 장욱진의 그림에는 정자와 원두막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비록 서울 한복판에 정자를 지었지만, 그만큼 자연에서 지내고자 하는 작가의 소망이 컸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화가는 한옥으로 들어가는 길 쪽에 있던 헛간을 개조하여 침실과 화실을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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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집, 1976, 캔버스에 유채, 37.9×45.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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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1978, 캔버스에 유채, 33.4×24.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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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 1978, 캔버스에 유채, 30×40cm

수안보 시골집에서 작업하던 시기에는 빈틈없는 화면으로 주변 환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근경에 시냇물이 흐르고 원경에는 가파른 산등성이가 중첩되는 식이었다. 1986년 작 <아침>에 등장하는 집 역시 수안보 시골집을 닮았다. 시멘트 담장을 헐고 마당에 토담을 지어 싸리문을 단 집. 1980년 이름 봄, 담배 농사를 짓던 충북 시골집을 장욱진이 직접 개조하여 마련한 화실이었다.

집밖에서 뒷짐을 지고 밤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긴 노인을 그린 1990년 작 <밤과 노인>의 집은 작가가 아내와 둘이 살며 작업에 매진하기 위해 지은 마북동 화실의 모습이다. 특히 마북리 244-2번지에 위치했던 한옥 아틀리에는 석 달 동안의 수리 기간을 거친 후 5년간 살았던 곳으로, 그의 마지막 거처였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 그린 720여 점 중 1/3에 달하는 220여 점을 남기며 “그림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써버릴 것이다”라는 예술적 열망을 작품에 녹여냈다. 화가의 손을 거친 낡은 초가삼간은 안채 세 칸과 맞은편 사랑채로 개조되었고, 정자와 두송나무로 이루어진 울타리로 옛 한옥의 격식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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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1983, 캔버스에 유채, 33.4×24.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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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1987, 캔버스에 유채, 45.5×3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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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톳길, 1989, 캔버스에 유채, 46×4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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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노인, 1990, 캔버스에 유채, 40.9×31.8cm

집과 공간, 나아가 건축에 대한 장욱진의 관심은 그림의 조형적 질서와 구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집 혹은 나무를 중심으로 해와 달, 두 아이가 자연스럽게 좌우 대칭을 이루는 구도를 자주 사용했고, 화면에 타원형이나 사각형 등의 기하학적 공간을 별도로 구성했다. “나는 심플하다”라는 장욱진의 자기 고백은 작고 간결하지만, 응집력 강한 화면으로 표출된다.

덕소, 명륜동, 수안보, 신갈 등 시대별 작업실을 기준으로 그의 작업 양상을 논할 정도로 장욱진의 작품과 집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그에게 ‘가족’이란 그 자체로 사랑과 행복의 감정을 표상하며 ‘자연’은 집과 가족의 보금자리이자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는 평화의 장소이다. <집, 가족, 자연, 그리고 장욱진> 전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독보적 회화 세계를 펼쳤던 장욱진의 대표작 50여 점을 통해 그의 도가적 세계관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해학과 자유, 순진무구함이 깃든 그의 아름다운 조형 언어는 코로나 시대를 사는 모든 관객에게 집의 소중함과 가족을 향한 사랑, 그리고 이제는 사라져가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동화적 세계를 상상하도록 특별한 순간을 선사한다. 전시는 2월 28일까지.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니까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서 다 써버릴 작정이다. 저 멀리 노을이 지고 머지않아 달이 뜰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적막한 자연과 누릴 수 있게 마련해준 미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엇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강가의 아틀리에> 196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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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소 시기(1963-1975)의 장욱진, 사진: 강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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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동 시기(1975-80)의 장욱진, 사진: 강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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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갈 시기(1985-1990)의 장욱진과 아내 이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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