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베토벤과 사자와 나

in #kr6 years ago (edited)

#1
할아버지를 뵈러가면 우리는 거실의 쇼파에 앉는다. 의자보다는 쇼파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물건이지만 전형적인 쇼파처럼 안락을 제공할 정도의 품질은 아니다. 그의 생활은 이전보다 더 단조로워졌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노인대학에 다니시고 일주일에 7번 무료 급식을 먹으러 나가시고 국가유공자를 대상으로 한 무료목욕 혜택도 매 번 누리셨는데 이제 무릎 통증으로 인해 외출이 어렵다. 간신히 화, 금에 목욕만 가시는 듯 하다. 하지만 오늘은 가지 않으실 것이다. 매해 6,7,8월은 무료목욕탕 운영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올해 들어 내가 얼굴과 촌수는 고사하고 그 관계가 유효한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운 머~언 친척들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나는 집중해서 들어도 반 이상을 못 알아듣는다. 발음이 많이 어눌해지셔서 그렇다. 내가 주의를 기울여 듣고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추임새처럼 방금 하신 말씀에 관한 질문을 하지만 사실 나는 다른 생각을 한다. 이 다른 생각이란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과 전혀 관계없는 '내 모바일 게임의 이벤트 시간이 언제인지', '수분 크림이 다 떨어져가는데 언제 엄마 카드로 주문할지', '요즘 탄수화물 섭취가 늘었는데 왜 이렇게 밥과 면이 전부 맛있는지' 등의 상념이 아니다.

나는 할아버지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과 '몇 십년째 한결같은 집 안의 모양'과 집 안과는 달리 변화가 느껴지기는 하시는지 궁금한 '그의 시선 속 세상의 풍경'을 상상한다.

나는 늘 헤밍웨이의 작품 속 노인이 꿈에서 본 아프리카의 사자를 생각한다. 그 사자의 위엄이라든가 생김새보다는 사자가 노인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고민한다. 사자의 의미에 대한 사유가 고민인 이유는 아프리카 초원지대를 누비는 사자의 모습과 같은 이상(理想)이 나와 가장 가까운 이 노인에게도 남아 있기를 바라는 심정때문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똑같은 오늘과 어제가 안쓰럽고 내일과 일주일 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 속상하다. 나와의 만남을 좋아하시지만 나는 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그 곳에 한 달에 2번 이상은 가지 못한다. 못한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2번 이상은 굳이 시간을 내서 가지 않는다. 30일 중 28일을 무심하게 지내는 내가 고작 이틀, 그것도 하루에 7-8시간만 함께 하고 오면서 '할아버지 걱정을 많이 하는 듯'하는 이 행태가 실소를 머금게 한다. 내 얄팍한 동정심과 연민에 대해서

#2
아침에 일어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환희의 송가를 듣고 있다. 몇 시간을 틀어 놓아도 별다른 감흥은 없다. 약간 '태교음악을 듣는 임산부의 기분이 이것일까?' 싶다. 안락사 전 104세의 구달 박사가 들었던 환희의 송가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내 나이가 되면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점심때까지 앉아 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다시 앉아 있다.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

쓸모가 제대로 번역이 된 단어인지 의문이 들어서 나는 '의미'로 바꾸어서 이해했다. '그 분의 삶'과 '아침도 거를 정도로 피곤하고 바쁜 이들의 삶', '104세의 노인이 아침 식사를 하고 점심을 먹을 때까지 앉아 있는동안'과 '같은 시간에 눈코 뜰 새 없이 많은 과업을 처리하는 이들의 생활'은 각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한다. 가장 주된 내용은 이 것이다.

"신체가 쇠약해지고 감각이 무뎌진다고 하여 그래서 생산적인 활동을 거의 못한다고 하여 설레고 싶다거나 즐거워지기를 원하는 마음마저 사라지는지?"

나는 헤밍웨이의 지친 노인이 허름한 오두막에 몸을 누이고 꾸었을 아프리카의 사자 꿈을 다시 떠올린다. 꿈에서나마 그 모습을 보고 설레고 즐거웠을까? 환희의 송가는 혹시 구달 박사의 첫 사랑이 그에게 피아노로 연주해줬던 곡이었을까?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청년 시절의 떨리던 마음을 떠올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두근거림'이 없이 살아도 괜찮은, 어제와 오늘이 같아서 지루하고 병원에 약 타러 가는 날 아니면 딱히 기억해야 할 날이 없어도 괜찮은, 스마트폰 사용법 같은 거 가르쳐 드려도 어차피 못 배우시니까 대충 설명해 드려도 괜찮은, 언제나 괜찮다고 하시니까 세상 모든 일이 괜찮기만 한 사람의 이름은 노인일까? 나의 아빠도 내 년이면 예순이다.

#3
사진으로만 만났던 호주의 할아버지가 말씀 하셨던 '의미가 적었던 시간'은 내 할아버지에게도 주어지고 있다. 본인의 고집으로 채널은 kbs1만 나오는 TV를 가지고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물건들과 생활하시는 할아버지의 눈에 비친 풍경은, 그가 사는 세상은 느리고 재미없고 똑같다. 구달 박사의 말년은 더욱 느리고 하나도 재미없고 매일 똑같았을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를 만나면 활기차게 내 이야기를 한다. 좋은 회사에 멋진 모습으로 다니고 있지 않아서 걱정 하시지만 원하는 일을 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 드린다. 그런 내 이야기를 들을 때.. '가장 설레고 즐거워하신다.' 고 내가 느낀다. 자꾸 결혼 얘기를 하시는데.."할아버지 저 이제 인기 없어요..자리도 잡고 돈도 많이 벌어야 여자들이 좋아하죠!" 말씀 드리면 웃으신다. 할아버지때문에 갑자기 결혼을 할 수야 없지만 한 달에 1번 정도 더 찾아 뵐 수는 있다. 지난 번에 월드콘을 사다 드리고 함께 먹었던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나는 살찔까봐 월드콘 같은 거 진짜 2년에 한 번도 안 먹는데..) 그 날은 아이스크림의 과도한 단내가 입 안에 맴돌아 불쾌한 한 두 시간보다 같은 것을 들고 함께 즐거웠던 잠시가 더 중요했다. 아이스크림때문에 늘어나는 내 체지방과 단조로운 할아버지 일상에서 즐거운 잠시를 비교하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살을 더 많이 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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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가 된 이다 (강종열 화백) 출처-아트뮤제

오랜만에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고 있다. 오늘 밤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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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달 인터뷰 원문은 모르겠지만, 쓸모라고 번역했다면 '소용'으로 보통 옮기는 use였을듯. '무슨 소용이냐', 하면 되는 일을 '무슨 쓸모냐' 하면 겉돌아버리는...

고마워! 의미보다는 소용으로 바꿔서 읽으니 나도 훨씬 마음이 편하당!!

좋을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상해 주시는 분이 계시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할아버지 이야기 읽으니 괜히 마음이 편해지지 않네요.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지내서 알게 모르게 죄책감이 들기는 하는데, 엄마의 모진 말들을 타지에서도 견디기가 힘들어 그냥 외면하게 되네요. 그냥 서로가 서로의 말을 잘 들어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무진장 어렵습니다ㅎㅎㅎㅎㅎ 미드나잇 인 파리 ost를 상당히 좋아하는데, 오늘 한 번 틀어놔봐야겠어요 ㅎㅎ

부족한 왕래 밖에 하지 못 하면서 괜히 좋은 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글을 제가 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드네요! 저도 참 긴 시간동안 부모님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결국 저도 부모님도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나서야 조금씩 이해가 시작 되었습니다. 주제 넘게 조언을 하려는 마음은 아니고..그냥 제 경험을 이야기 해 본 것 입니다^^; 모두 편안하고 좋은 날이 올거에요. 오늘 밤에 제인님은 음악을 듣고 저는 영화를 보겠군요!

헤헤 그렇네요. :-) 여긴 석양이 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걸 내려 놓기까지, 서로 시간이 필요한 거겠죠. :-) 그 기간동안 큰 상처 내지 않으며 잘 버티고 싶네요 ㅎㅎㅎ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평온한 밤을 맞이해요 ㅎㅎㅎ

한 달에 두, 세번....생각만큼 쉽지않은 방문횟수인데 꾸준히 찾아뵈신다니 좋아보여요.

살 찔까봐 잘 드시지 않는 월드콘을 드시는 그 마음이 나중에 그럴 수 없는 시점이 오면 할아버지에게도 가든님에게도 따뜻한 마음의 양분으로 남을거라 생각합니다. 할아버님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댓글에서 진심이 느껴집니다! 고양이가 만화 속 주인공처럼 참 이쁘게 생겼습니다^^

그림이 눈에 뙇 들어오네요.. ㅎㅎ 이런그럼 좋은거 같아요~

네! 저도 눈에 확 들어와서 글에 사용해 보았어요ㅋㅋ 그런데 이런 거 저작자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써도 되는지 늘 고민이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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