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3

in #kr3 years ago

#1
여름 밤에 주로 느낄 수 있는, 비가 내리고 나면 더 진하게 올라오는 풀내음 섞인 흙냄새가 있다. 아주 가끔 그 냄새가 난다. 가장 가까운 기억은 9년 전 여름. 연병장을 가로 질러 검문소를 열러 가면서 함께 가던 후임에게 그 흙냄새를 이야기 해 줬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달가워 할 수 밖에 없던 위치였으니 그 아이의 답변은 기억나지 않고 내 느낌만이 새록새록하다. 이후로 한 번도 여름 밤의 흙냄새를 맡아본 일이 없다. 그 경험이 그 때 뿐이었을리 없겠지만 가장 최근의 흙냄새는 그 때의 기억 뿐이다. 나는 그 흙냄새를 군인이 아니라 다른 신분으로, 그리고 후임이 아닌 친구와 또는 애인과 함께 하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애틋하고도 강렬한 감각의 각인이었다.

#2
이런 각인들이 있다. 산발적이지만 공통적인, 공통적이지만 즉흥적이고 이어져 나가는 장면들..장면 위엔 글도 써지고 음악도 흘러 나온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이 등장하고 그 이야기는 끝나고도 끝나지 않는다.

흙냄새는 영화 클래식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던 김광석의 목소리는 세르게이 예세닌을, 예세닌이 생각나면 달리와 이상과 커트 코베인도 떠오르고 이사도라 던컨을 보면 달리와 함께 있던 갈라도 함께 온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누워 있던 얼음 위는 차가웠을까 따뜻했을까. 마주보고 있던 쥰세이와 아오이가 떠오르면 나도 피렌체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진다.

#3
사랑하고 살려면 그 사람만 사랑해서는 안 된다. 식사가 코 앞이어도 먹으려 하는 그 사람의 간식, 항상 약속에 늦는 그 사람의 시간, 나만 생각하라고 해도 가끔 그럴 수 없는 그 사람의 마음까지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랑은 가능한 사랑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다. 나에게 사랑은 정말로 전쟁 같았다. 아침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커튼을 쳐 놓은 채로 누워서 울다 잠들었다 깨다를 반복했던 날도 있다.

#4
엠씨더맥스의 '낮달'이라는 노래를 듣다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온다.

태양빛에 가린 하얀 저 달처럼
볼 수 없는건 이 세상에 없는거야
넌 날 잊어야해

사랑은 슬퍼서 아름답다는 말을 마음 안에 새긴다. 나 그 누구도 지나간 사람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어 본 적이 없다. 이게 내 유일한 자랑이자 위안이다. 볼 수 없는건 이 세상에 없는거야.

#5
"이별연습을 해봅시다"
그녀는 결국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이 영화의 메인 포스터는 영화 속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장면이다
나오지도 않는 장면을 나는 제일 좋아했다
가장 비슷한 장면이라면 결국 서럽게 우는 그녀를 안아주는 이 모습뿐.
그녀의 눈물이 내 어깨에 닿는 기분이다

화양연화1.jpg

화양연화2.jpg

화양연화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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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느껴지는 글을 오늘도 읽고 갑니다.
혹여나 제가 글표현이 서툴러 지워지지않는댓글이
누가 될까 조심스럽지만
읽고나서 표현하지않는다는건. . 예의가 아닌거같아 남겨봅니다😁

같은 생각으로 적습니다. 후각이나 미각 같은 감각이 남겨놓은 기억이 시각이나 청각보다 훨씬 오래도록 강하게 각인되지 싶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시절 초여름 새벽에 할아버지 손잡고 논길을 걷던 기억이 있습니다. 달큰하게 벼가 패는 향기와 거칠지만 따뜻하던 할아버지의 손에서 전해오던 체온 그리고 이슬에 젖은 촉촉한 논뚝길이 고무신으로 밟을 때의 그 습습한 부드러움. ....

그 표현하신 바를 상상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면서 뭉클해 오기도 합니다. 저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께 이쁨도 많이 받고 그 분들께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늘 제 글을 읽어주심과 또 좋은 눈으로 봐주셔서 가치 있게 봐주심이 더 할 나위 없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편안한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댓글을 적으심에 있어서 그런 고민은 전혀 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순간 드는 감정을 얼른 기록으로 옮겨야 그 느낌을 비교적 만족스럽게 표현할 수 있으니, 그렇습니다. 댓글에 너무 감사하고 오래 교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글이좋아서 팔로우 업보트 남기고갑니다^^

글이 좋다니, 너무 기분 좋은 댓글이십니다. 아직 블로그에 들러보지 못 했는데 비빔밥의 생김만 봐도 군침이 돕니다. 자주 뵈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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