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담수첩] 그 시절 놓친 영화, 꽃잎. 1996년 作

in #kr6 years ago

그 때, 1996년.

서른 즈음이었던 김광석과 이별했다. 시대유감을 외치며 너와 함께한 시간속에서 Good bye란 마지막 인사로 작별을 고한 서태지와 아이들. 삐삐는 10만대를 돌파 했고 영화관람료는 6000원으로 올랐다. 우성이형은 CBR-600을 타며 우상이 되었고, 2002년 월드컵이 한일 공동 개최로 결정되었다. 소설가 이창동이 영화'초록물고기'로 데뷔했고, 마카레나 열풍이 불었다.

movie_image.jpg

1997년, 그때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지 다시 되돌아올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선택하며 한 발짝 더 거슬러 올라 보기로 했다. 그 시절 영화의 한 장면으로 접한 그녀의 첫인상은 파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몇 년 뒤 무대에 오른 그녀는 또 한번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이상한 누나가 나오는 이상한 영화인 줄 알았던 그 영화를 오늘 그려 본다.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질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로 가 버렸나
꽃잎 보면 생각나네 왜 그렇게 헤어졌나


movie_image (3).jpg

꽃을 든 광년

꽃을 든 추레한 옷차림의 소녀가 행색이 누추한 남자를 쫓는다. 자신의 몸둥아리를 범한 그 남자를 베시시 웃으며 또 쫓는다. 그들의 옷차림새마냥 낡고 허름한 양철판으로 덧대어진 버려진 농가에 남자는 소녀를 가둔다. 그리고 소녀는 그날의 악몽으로 날을 지새웠다. 그녀는 왜 미쳐있고 남자는 소녀를 어떠한 이유로 가둬두는 것이며 소녀는 왜 악몽을 꾸면서도 쫓아 다니는 것일까.


movie_image (5).jpg

창밖의 여자

동네 아이들의 놀림에 저수지에 빠져버린 그녀를 지나가던 마을 중년의 남자가 구한다. 남자는 얼룩무늬 군복 상의를 입고 있다. 자신을 구해준 성의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남자의 경운기에서 탈출하고 뒤 쫓아오는 그의 모습에 경기를 일으킨다.

창가에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손
돌아서 눈감으면 강물이어라
한줄기 바람되어 거리에서면
그대는 가로등되어 내곁에 머무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도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노래(단발머리)가 영화의 배경에 깔린 것은 처음이었다고 들었다. 그가 어떠한 마음으로 흔쾌히 허락했는지 알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때의 시절이 그의 가수 인생의 첫 시발점이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영화 중간에 슬며시 나오는 장면속의 텔레비젼에는 그의 노래 '창밖의 여자'와 땡전뉴스가 등장한다. 네모난 상자 안의 화면속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그 시절 그때의 그 지역 그 사람들의 술자리의 대화. 그리고 철저히 보이지 않는 창밖으로 내몰려 고통받는 소녀. 영화 속 소녀를 가둔 남자는 소녀를 철저히 창밖으로 내보낸다. 아무도 그녀를 발견할 수 없도록.


movie_image (12).jpg

오빠를 좋아하던 때 묻지 않은 소녀가 아직 잔디의 때도 자리잡지 못한 오빠의 무덤을 찾아 자신이 미칠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고한다. 그리고 소녀를 가둔 남자가 뒤에서 지켜보며 울고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를 아들을 찾아 엄마는 떠나고 그 길을 소녀가 뒤 따른다. 엄마가 어디를 어떤 이유로 먼길을 떠나는 지도 모르는채.
엄마의 손을 놓치기 싫어 따라간 그 여정에서 소녀는 엄마의 굳어져 피어지지 않는 손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죽어가는 엄마를 뒤로 한 채.


movie_image (11).jpg

국기에 대한 경례

남자는 소녀를 가두어 학대하는 사이에서도 간간히 소녀를 챙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자신도 역시 소녀를 대하는 본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미칠듯이 괴롭다. 남자는 자신이 시장에서 사준 원피스를 입고 구걸하는 소녀의 모습이 괴롭다. 시장안에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모두가 태극기를 바라본다. 국가에 충성을 다짐할 때 대중들의 시선은 모두 한곳으로 향한다. 남자를 따돌리는 소녀와 소녀를 쫓는 남자는 그들의 시선에는 들어 오지 않는다.


movie_image (9).jpg

그.찾.사(그녀를 찾는 사람들)

설경구, 추상미, 박철민, 故박광정의 20여년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초반의 그들은 그녀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종반으로 다다르며 이내 찾기를 포기하고 돌아선다. 아마도 소녀 오빠의 친구들인 듯 싶다. 영화속에서 시간을 돌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남자를 소녀가 쫓아다닌 이유를 한 남자의 장례식장에 놓여진 영정사진을 보고 알았다. 소녀의 오빠와 그를 가둔 남자가 너무도 닮아 있었다는 것을.

'당신은 무덤가를 지날때, 아니면 강가에서나 어느 거리 모퉁이에서 어쩌면 이 소녀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찢어지고 때 묻은 치마폭 사이로 맨살이 눈에 띄어도 못본척 그냥 지나쳐 주십시오. 어느날 그녀가 당신을 쫓아 오거든 그녀를 무서워 하지도 말고 무서워 하지도 마십시오. 그저 잠시 관심 있게 봐주기만 하면 됩니다.'


감정이입

나의 본적은 전라남도 ㅇㅇ군ㅇㅇ면ㅇㅇ리이다. 부모 또한 군단위까지 일치한다. 모태 타이거즈팬이고 지금도 그러하다. 음력 생일은 5월18일이다.

이 모든 것이 다른 단어와 숫자가 다른 것으로 치환되어도 나는 이 영화에 빠져들었을까.
아마도가 아닌 어쩌면 그러해야만 했을 그런 감정과 인식들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영화는 묻고 있고, 대답해주기를 바란다.

그녀가 왜 꽃을 들었으며 미칠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것만이 진실이다 말하는 그 네모난 상자속에서 외면해야만 했던 창밖의 그녀를 잊었는지를, 스포츠와 스크린, 섹스로 대중들의 눈을 가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던 그들의 만행을 기억하는지를, 남자가 소녀를 가두고 학대하며 연민의 감정을 가진 아이러니가 과연 그 남자만의 것이었는지를, 자신들의 동료가 억울하게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족들을 찾다 끝내는 돌아서고만 그 모습을. 그리고 잊지 말기를.

1980년 5월 18일 그날을 다룬 영화중 내가 본 것 중의 최고였다 말하고 싶다.


만든이들

감독 장선우
배우 이정현, 문성근, 이영란, 추상미, 설경구, 박철민, 나창진, 故박광정, 그리고 많은 이들
그 외 모든 스텝
그리고 글꼴디자인 안상수.

Sort:  

너무도 애잔한...그리고 잡을 것 다 잡고 끌고가는 리뷰-대단합니다.
무려 0.02의 풀봇으로 응원드려요!
제 찻집에 오시면 커피 무료로 드릴게요. @홍보해

관심있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영화 '지슬'리뷰 이후에 또 찾아 오셨군요!
마음속으로 받은 커피 따뜻하게 잘 마시겠습니다!

헐 봐야겠습니다! 당시 아무도 몰랐던 신예 이정현을 눈빛 하나 때문에 캐스팅했다는 감독의 말이 인상깊었는데 왠지 무서울까봐 보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eternalight 님 이렇게 은근슬쩍 생일 밝히시는거죠..

네 저도 당시에는 어떤 영화인지 잘 몰랐어요. 이정현의 생년을 검색하니 17살이더군요. 나이가 드니 무서움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네요. ㅎㅎㅎ
생일은...한참 생각했습니다. 음력생일을...밝히면...양력도...? 생각해보니 년도를 모르면 못 맞추자나욧!ㅎㅎㅎ그래서 비밀입니다.^^

보아야지 찝어두고 미루고 있는 영화네요. 뭐랄까 감정적으로 압도 당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요. 조만간 보아야 겠습니다.

5.18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는 풀어내는 방식이 달라보였습니다. 보여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닌 감독의 생각을 은유적으로 숨겨두고 관객들이 찾아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았어요.

그 당시 화제가 되었었던 영화, 꽃잎,, 이정현의 열연, 말만 많이 들었었는데, 정작 영화를 보진 않았었죠. 이 글을 읽으면서, 영화 속 소녀의 아픔과 상처가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정말 생생하게 다가오게 쓰셨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소울메이트님의 올려주신 ‘타자화’라는 주제를 생각하며 복기해보니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영화가 이리 오래되었던가... 그 생각이 먼저 듭니다. 문민정부 들어서고 한참 후지만 저 당시만 해도 광주에 관해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여기서 편하게라 함은 이야기 자체를 꺼낼 수 있느냐 없느냐) 하긴 군부가 조작한 실태가 드러난 요즘은 더 심한 날조와 선동을 일삼는 무리가 생겨났으니 아직도 멀었다 싶군요.

문민정부가 들어서지 않았다면 나왔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편향되고 만들어진 프레임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혀 그럴만 한 사건,사고도 아닌 것이 불과 몇 년 전 까지 행해졌으니 말이죠. 날조와 선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32
TRX 0.11
JST 0.034
BTC 66785.29
ETH 3229.75
USDT 1.00
SBD 4.30